소설리스트

12화 (12/117)

#12 

나는 반짝거리는 이펙트라도 붙여 줘야 할 거 같은 눈을 외면하며 일어났다.

“에이든은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아, 그…. 나는 그냥.”

당황한 에이든이 혀를 깨물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루이스가 잔뜩 올라간 어깨에 턱을 대며 에이든이 읽는 책을 들여다보았다.

맞은편인 내게는 제목이 보였다. ‘황궁의 모든 보물들, 숨겨진 것들에 대해’. 이제 애들 다루는 법을 좀 익혀 가는 아니글란이 수업 중 주의를 끌기 위해 사용하는 책 중 하나였다. 그런데 고개를 다시 든 루이스의 눈이 불안할 정도로 반짝거렸다.

“이것 봐. 황궁에 비밀스럽게 감춰진 보물들에 대한 건데, 그걸 발견한 자가 주인이 된다는 법이 있대.”

“와. 대단하다.”

심드렁하게 답했는데도 루이스는 굴하지 않았다.

“보물찾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친구들.”

“싫어.”

“왜애.”

“귀찮고, 우리는 할 일이 많고, 그중에서도 너는 과제에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안 적었으니까.”

턱을 괸 엘리엇이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로 ‘자본의 역사’를 뒤적거리며 답했다. 똥강아지 같은 녀석. 처음에는 단호하게 ‘안 돼.’ 하면 수그러들더니, 이제 익숙해진 건지 돼먹지 않은 앙탈을 부렸다.

“딱 한 시간, 아니 30분만. 어차피 휴식 시간도 필요하잖아.”

“한 것도 없이 무슨 휴식이야.”

웬만하면 그냥 넘기려고 하는데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된다. 사람이 이렇게 꼰대가 되어 간다.

이러니 내가 과제를 보여 줄 수가 있겠느냐, 고대어는 열심히 하면서 역사를 안 하면 무슨 소용이냐는 요지의 일장 연설을 들은 루이스가 입술을 불퉁 내밀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과제 주제는 자유잖아. 잊혀진 시대의 보물 정도면 과제 제출 용으로 충분하지 않겠어?”

은근히 보물찾기가 하고 싶었는지, 에이든도 고개를 끄덕이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책 뒤로 숨었다. 제일 행동력이 빠른 녀석과 제일 소심한 녀석이 오랜만에 뜻을 맞추자 애늙은이 둘에게 남은 선택지는 항복뿐이었다.

루이스는 이왕 하는 거 스릴을 더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권했다. 술래잡기를 혼용해 한 명의 술래가 세 명을 찾아다니는 동안 나머지 셋은 열심히 도서관 내부와 근처를 뒤진다는 거다. 이미 포기한 나와 엘리엇은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루이스는 ‘황궁의 모든 보물들, 숨겨진 것들에 대해’의 마지막 페이지에 나와 있는 지도를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엘리엇이 자기가 술래를 하겠다고 자처했지만 바로 기각됐다. 너는 우리 찾아다니지도 않을 거잖아! 루이스의 외침에 엘리엇은 부정하지 못했다. 결국 당장 달려 나가고 싶어 하는 루이스와 에이든, 늘어지기 직전인 엘리엇을 제외하자 남는 건 나뿐이었다.

“그럼 조금 있다 찾으러 올게.”

루이스의 손에 끌려가는 엘리엇이 꼭 찾으러 와야 한다고 애타게 나를 불렀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는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날씨는 완전히 가을에 접어들었다. 재킷을 입었는데도 바람이 영 썰렁했다. 몸을 떨고는 숨을 들이켰다. 적당히 한 바퀴만 돌고 들어가야지. 안에서 코코아를 한 잔 마신 후 찾아 나서면 시간이 딱 맞을 것이다.

오래 돌아다녔다간 안 그래도 못 써먹을 체력에 감기까지 더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케일이 당장 코트를 두를 테고, 아벨도 극성일 거다. 고작 마차로 황성이나 오가면서 때 이르게 둘둘 싸매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술래잡기에 보물찾기라니. 10대 남자애들이 고른 놀이치고 아주 건전하고 교육적이었다.

*

연회 시즌이 되면 성 단위로 개방해 통째로 꾸민다더니. 황성에서 좀 꾸며져 있다 싶은 곳에는 빠지지 않고 쉴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벤치에 걸터앉았다. 조금 걸었다고 지치는 몸뚱이가 한탄스러웠다. 운동을 하긴 해야 하는데. 따뜻한 곳에서 맛있는 것만 먹고 평온하게 사니 위기감이 떨어진다. 저녁에는, 내일은, 모레는 하면서 미루던 게 이제 조금만 있다가, 겨울이 지나면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자 상념이 든다.

사실 황태자의 등장 이후 당장 스펙타클한 전개가 기다릴 줄 알고 긴장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잠잠했다. 황태자는 정말 흥미에 와 봤을 뿐인지 그 이후 마주칠 일이 없었고, 아네트도 조용했다. 당장 제일 비중이 큰 두 사람이 조용하니 일상은 쳇바퀴처럼 굴러갔다. 그렇다고 다른 놈들이 등장하기엔 아직 한참 남았고.

에르켈이 뭔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될 정도로 평화롭고 조용한 일상이다.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소원이 없겠다. 이렇게 열둘부터 스물셋까지만 넘기면, 그러면 자유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평화롭게 흘러간다.

하지만 이 평화에서도 안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잔잔하니까 더 불안하다. 금방이라도 일이 터질 것 같은데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으니 안개 속에 떨어진 기분이다. 언제 어디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두리번거리기만 하는. 차라리 뭔가 시작되면 목표라도 제대로 잡지. 지금은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도 감이 안 잡히니까.

그 순간, 벤치에서 멀지 않은 곳의 덤불이 움직였다. 차라리 뭐라도 튀어나오라고 생각했다고 정말 뭐가 튀어나올 모양이다. 무려 황성 덤불을 헤치고 나올 존재가 뭘까. 뻔했다. 내부를 먼저 살펴보겠다고 간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천천히 벤치에서 일어났다. 루이스라면 붙잡혔다고 징징거리는 걸 내내 들어줘야 하고, 에이든은 요령 없이 훌쩍일 테고. 엘리엇이라면 일부러 내 앞에 나타난 걸 테니 뭐든 잡아 줘야 할 필요가 없지만 그 녀석이었다면 저렇게 숨어 있느니 대놓고 앞에 나타났을 것이다.

“와. 저게 뭐지. 슬슬 들어가 보려고 했더니.”

연기 못 하는 척 연기하기도 힘들다. 일부러 자리를 피할 시간을 주려고 등을 돌린 채 딴청을 피우는데 파삭, 하는 소리가 났다. 덤불에서 뭔가 빠져나온 것 같기는 한데. 어린애인 걸 감안해도 너무 가벼운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예상한 눈높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선이 조금씩 내려갔다. 예상보다 한참 낮은 곳에 위치한 것은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다. 털 뭉치 위 솟은 귀, 동그란 파란 눈.

웨웅.

“…고양이?”

가 여기서 왜 나와.

*

“저리 가.”

당연히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짐승은 내 타이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발 근처로 다가오더니 다리에 몸을 비비는 모습이, 길고양이는 아니고 사람 손을 탄 모양이었다. 하긴 황성에 길고양이가 들어올 수 있을 리 없지.

주인 있는 고양이라면 더 문제다. 황성에 애완동물을 데리고 들어오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어. 당연히 황족의 애완동물이라는 뜻이다.

“저리 가라니까.”

먀앜.

고양이는 귀엽지 않게 울며 몸을 비볐다. 이걸 냉정하게 떼어놓고 갈 수도 없고.

그냥 얌전히 실내에 있을 걸 그랬다. 아니면 뭔가 이상하다 싶을 때 바로 돌아서서 아무것도 못 본 척하거나. 늦게 후회하는데 고양이의 상태가 이상했다. 자꾸 앞발을 핥아대는 모습이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웠다. 몸을 숙여 자세히 살피자 고양이는 다리를 다쳤는지 계속 절뚝거리고 있었다.

“어디서 다쳐 와 가지고….”

나는 눈물을 머금고 작지 않은 몸을 안았다. 다친 거라도 못 봤으면 모를까. 보고도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굶었는지 갈비뼈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황성의 것은 모두 황가의 것. 불쌍해도 데리고 나갈 수는 없었다.

일단 도서관에 돌아가는 게 좋겠다. 오래 데리고 있어 봤자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확률만 컸다. 사서에게 넘겨준다면 그곳에서 맡아 주든, 주인을 찾든 하겠지. 마침 애들이 없어 다행이었다. 루이스나 에이든이 본다면 무슨 떼를 쓸지 모른다.

쓸데없이 넓기만 무식할 정도로 넓은 황성이라 돌아갈 길이 막막했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걸로도 지쳤는데, 고양이를 안고 가면 연약해 빠진 몸이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게 말이 돼!”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에 놀라 고양이를 안은 채 몸을 숙였다. 깜짝이야, 시발. 재빠르게 덤불 밑으로 숨자마자 목소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거만한 걸음걸이로 걷는 소년과, 그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 척 봐도 신분이 우월한 소년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가장 앞에서 성질을 내고 있는 소년을 확인하고 입을 벌렸다. 이제 열 몇 살이나 됐을까. 황태자보다 어려 보이는 예쁘장한 얼굴 위로 하늘색 머리카락이 선명했다.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도 흔하지 않은 색에 단번에 그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수도에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존재는 딱 둘이다.

하나는 후궁 엘리샤 부인의 오빠인 노벨린 자작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 엘리샤의 아들인 2황자 테시온 아카레온이다. 그리고 황성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하늘색 머리의 10대 남자애라면 정말 황성이 자기 집인 2황자뿐이다.

욕 나오는 타이밍과 등장인물에 머리가 아팠다.

2황자는 여러 가지로 유명했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부정적인 내용이었다. 또래를 끌고 다니며 멋대로 군다더라, 영애들에게 추근거린다더라, 시녀의 치맛자락을 들쳤다더라. 고작 열셋 된 주제에 벌써부터 싹수가 노란 놈이었다.

나와 에르켈이 손댈 가치도 없다고 판단한 사람이기도 했다. 2황자가 안하무인이라고 해도 제 형제를 찾아와 시비를 걸 정도는 아니다. 앞으로 더 크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딱히 접점도 없고. 게다가 이후 쟁쟁하게 겨루는 아네트와 황태자의 뭣 같은 성격을 고려해보면 저런 놈은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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