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신을 차린 후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내게 에르켈이 우는 얼굴로 스토리를 설명했다.
에르켈이 김민지로 살던 시절 쓴 소설의 제목은 ‘그대의 곁에서’. 90년대 드라마 같은 제목을 지적하자 원래 이 장르는 이런 게 통한다는 변명이 돌아왔다.
아무튼. ‘그대의 곁에서’의 주인공은 르웰린 에드윌. 결 좋은 백금발과 제비꽃 같은 보라색 눈을 가진 미소년(에르켈은 죽고 싶어 보이는 얼굴로 이걸 쓸 때는 이런 게 유행이었다고 주장했다.)으로, 그의 주변에는 남자들이 꽃 주변 벌레만큼이나 많이 꼬였다.
“손만 뻗어도 사람들이 술렁거리고 눈길만 줘도 남자가 홀린다고? 미친 설정 아니야?”
“…남성향도 하렘물 많잖아.”
그건 그런데.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숨을 고르게 쉬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걔네는 최소한 여자를 좋아하는 놈들이 여자를 만나는 거잖아. 나는 게이도 아닌데 남자들이 꼬이게 생긴 거고.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심지어 주인공의 자의와는 상관없이 주연이라는 것들이 구애하며 지들끼리 싸우는데, 이게 단순한 스캔들 정도가 아니라 전쟁 스케일로 일이 커진단다. 결국 ‘그대의 곁에서’는 나름의 판타지 요소를 가미한 남자들의 불타는 연애사였다.
원작에 따르면 제국, 왕국 할 것 없이 대륙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모든 남자라면 한 번쯤은 주인공인 르웰린 에드윌 앞에 흔들리는 수준이었다. 이게 대체 말이 되나 싶었지만, 원작자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에르켈이 설명한 ‘BL의 법칙’에 따르면 얼굴이나 능력이 뛰어날수록 비중이 커지는 모양인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꼽을 수 있는 몇이 있었다.
“그래서. 황태자랑 공작이 이 몸을 두고 다투는 연적이 된다고? 이게 무슨 사랑과 전쟁인 줄 알아?”
“어, 그….”
할 말이 없어 입술을 꾹 다물고 있어야 할 에르켈이 뭔가 망설이는 얼굴로 눈치를 봤다. 똑바로 말하라고 눈을 부라리자 그가 얼굴을 바닥으로 푹 숙였다. 더듬더듬 내뱉는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세드릭이라고. 후작가를 뛰쳐나온 마탑주랑 루크도.”
“루크?”
“…그, 뭐냐. 제국… 어둠의… 주인.”
본인이 말하면서도 수치스러운지 푹 숙여 드러난 목과 귀가 온통 시뻘겠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하나도 열 받고 둘로도 벅찬데 넷이란다. 내가 빙의한 르웰린 에드윌은 남자끼리 얽히고설킨 오각관계에 말려든 불쌍한 인간이었다. 뒷골이 당겼다.
에르켈은 심지어 이 몸, 그러니까 르웰린 에드윌이 ‘수’라고 했다. 얘가 그… 대 준다는 거라고. 남자와의 연애도 상상해 본 적 없는데 훅 치고 들어온 섹스 얘기에 손이 떨렸다.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에게 뒤를 위협당하는 게 내 운명이라니.
내 표정이 많이 좋지 않았는지 에르켈이 어색하게 웃으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그, 그래도 다행이다. 최신작에 빙의된 게 아니라서.”
“최신작?”
“응… 그나마 여기는 꿈과 희망이 넘치는 세계관이거든. 최신작에 떨어졌으면 사랑과 전쟁이 아니라 범죄 느와르나 좀비 아포칼립스였을 텐데. 그것보단 이게 낫지.”
하하, 하, 하… 어색한 웃음은 오래가지 못하고 끊겼다. 그가 다시 의자에 얼굴을 박고 훌쩍거렸다.
원작자의 설명에 따르면 주인공은 제대로 된 의견 피력도 못 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몸 고생, 마음고생. 살면서 할 수 있는 고생은 죄다 했다. 정 안 되겠으면 한 놈 잡아 그 망할 구애 전쟁을 끝내야 하는데, 이놈과 있을 때는 이놈에게 흔들리고, 저놈과 있을 때면 저놈에게 흔들리는 게 당시 유행하던 BL 소설 주인공의 운명이라고.
권력 있는 새끼들끼리 치고받느라 일이 존나 커져서 대륙 단위가 된다는데 이게 꿈과 희망이 넘치는 세계라니. 김민지의 취향이 정상적인가에 대한 의심이 들었지만 더 이상 궁금해하면 위험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해결 방법은?”
“글쎄….”
풀 죽은 어깨가 축 처졌다. 워낙 순둥이같이 생긴 탓에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계속 화를 낼 마음도 식었다. 여기서 화를 내 봤자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진정하기 위해 노력하며 숨을 골랐다. 김민지라고 자신이 쓴 소설에 빙의한 것으로 모자라 누군가 주인공으로 빙의할 줄 알았겠어. 쟤도 당황스러울 것이다.
“아직 원작 진입 전이기도 하고. 그래서 얼마나 비틀릴지는 모르겠어.”
“원작….”
“게다가 이게 벌써 몇 년 전에 완결 낸 거란 말이야. 큼직한 건 생각나는데 자세한 건 무리야. 타임라인도 헷갈린다고….”
그래도 뭐라도 쥐어짜 보라는 닦달에 에르켈이 끙끙거리며 주연들에 대한 내용을 써 내려갔다.
[12세, 황궁→황태자. 조심할 것. 원작 메인공.]
[황태자의 첫사랑.]
[첫 만남 황성 화원. 이건 확실!]
[15세, 아카데미→세드릭(마탑주). 미친놈. 조심할 것.]
[또라이. 변태. 가급적 엮이지 말고 보이면 피하는 것 추천.]
[헐 ■■도 있었나? 다른 작품과 혼동했을 가능성 있음….]
[20세, 뭐더라? 아무튼 뭘… 찾으러 감. →공작. 얜 서브였는데 그래도 제일 정상인이었던 걸로 기억.]
[그래도 엮이는 것보단 엮이지 않는 게 좋겠지.]
[20세, 루크. 루크를… 어디서 만나더라? 근데 얘는 자기 영역 잘 안 나오니까 잘 피해 다니면 마주치지 않을 확률 있음. 르웰린과 계약했던 것 같은데.]
[혹시 보이면 무조건 피할 것. 수위 올라갈 확률 높음.]
[집착 감금 외전 있는데 이것도 원작에 포함되는지는 모르겠음….]
…답이 없다.
희망이라곤 남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는 또 뭔데? 펜으로 그어 알아볼 수 없는 단어가 의심스러워 뒤집었지만, 뒷면까지 잉크에 젖어 자국도 남지 않았다.
“이 표시는 뭔데?”
“…모르는 게 마음 편할 텐데.”
“매도 알고 맞는 게 낫다고.”
“…그, 촉….”
“촉?”
“촉수….”
눈앞이 아득했다. 울고 싶은 건 나였다. 죽어도 아카데미만큼은 피해야 했다. 촉수라니. 남자로도 모자라서 이젠 식물인지 동물인지 모를 괴생명체까지 내 뒤를 노릴 수 있다니. 시발, 그딴 거 넣지 말란 말이야.
“황태자는 뭐야. 열두 살? 이 새끼 페도 아니야?”
“어어… 페르온이 지금 열네 살이니까. 페, 페도까지는 아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열여섯 살이 열두 살을 보고 반한다는 거 아니야. 으, 시발. 얼굴로 욕하는 나를 본 에르켈이 서둘러 동조했다.
“그러게! 그러게. 쓰레기네, 황태자.”
“화원? 장소는 확실한 거야?”
“응. 그건 확실해. 그래도 황성이 넓어서 다행이다. 4황자 궁에 들락거려도 지금까지처럼 바로 집에 가면 황태자랑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 황태자는 이쪽에 별 관심 없거든. 거리도 멀고.”
당장 놀이 친구 같은 거 그만두고 성에 처박히겠다는 다짐은 에르켈의 해맑은 웃음 덕에 들어갔다. 제 형제가 관심을 주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듯 구는 모습을 보니 다시 양심이 아팠던 탓이다. 내 관심을 끌려고 진지하게 선물 배틀을 벌이는 형제들을 떠올리면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얘가 르웰린 몸에 들어오고, 내가 에르켈이 됐다면 좀 나았을까.
김민지는 원작자이니만큼 BL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도 나보다 더 대처를 잘했을 것이고, 나는 그에게 걸쩍지근한 감정은 느끼지 않았겠지.
“당장은 피해 다니는 게 최선이라 이거지.”
“으응, 그렇지.”
에르켈의 애매한 대답을 들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아직 어린 몸이라 소파 등받이에 등이 닿는 게 아니라 머리만 간신히 걸친 수준이었다.
막막함에 눈앞이 흐려졌다.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는데 금방이라도 고일 것처럼 눈가가 뜨거웠다.
다른 세계에 떨어지게 된 거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잘 적응해서 이제 앞에는 꽃길만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게 하루아침에 박살 났다. 그냥 박살 난 정도도 아니고, 꽃길이 지옥으로 가는 입구로 바뀌었다. 내가 뭐 대단한 꿈을 꾼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돈 많은 백수로 놀며 인생을 허비하고 싶었을 뿐이다.
“떠오르는 해결책은… 아니, 방법은… 두 가지 정도야.”
에르켈이 급하게 단어를 바꿨다. 해결책이라고 부르기엔 확신이 없다는 거겠지. 나는 성의 없이 손을 휘저었다.
“말해 봐.”
“하나는 원작이 끝나는 순간까지 주연 공들을 잘 피해 다닌다.”
“원작이 언제 끝나는데?”
“…본편 기준으로 스물셋….”
예의 그 어색한 웃음이 따라붙었다. 스물셋. 기가 막혀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지금 열 살이고, 원작이 열둘에 시작되니까 스물셋이라면 간단하게 셈해도 11년이다.
“본편 기준이라는 건 뭔데.”
“2년 후 외전도 있었는데, 그것도 포함… 되는지….”
머릿속에 떠올린 11이라는 숫자 위에 줄을 죽 그었다. 그 옆에 13을 다시 썼다. 두 자리쯤 되니까 그렇게 크게 달라진 줄도 모르겠다.
“다음은?”
“르웰린이 겪는 사건 중 80%가 네 주연 공 중 하나를 고르지 못하고 갈팡질팡 흔들려서니까, 일 커지기 전에 빨리 한 놈 골라서 잡아채는… 알았어. 알겠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마.”
욕을 뱉지 않기 위해 순간적으로 힘을 꽉 준 탓에 이가 부러질 것 같았다. 나름대로 미소를 짓는다고 지었는데. 악문 턱 만큼 힘이 들어간 눈을 마주한 에르켈이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한바탕 손수건을 적신 후라 눈물이 고이지도 않았다. 그냥 흉내만 내는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