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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119화 (120/121)

외전 20 - 4. Wet Dream

채원우는 성적인 부분에서 늦된 편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거다. 뭐, 무심함을 타고났을 수도 있고 관심이 없었던 걸 수도 있고…….

어쨌든 본인도 헌터청도 그 사실에 관심이 없었단 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성욕이 발현하니 안 하니는 던전을 공략하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중요한 건 제대로 된 무기로 활약할 수 있는가였다.

평생 잊지 못할 상대가 있든 없든, 채원우는 그래서 그 상대를 성적인 대상으로 인식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본인이 왜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갖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늦되었다.

채원우는 그저, 양백겸이란 존재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고 자주 보고 싶고 그 사람이 내 파트너면 좋겠다는 아주 1차원적인, 조금은 어린애스러운 생각에 갇혀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그게 바뀌게 된 건 정확히, 그가 꿈을 꾼 순간부터였다.

일일 연속극처럼 매일매일 꾸는 꿈이었다. 첫날부터 양백겸이 다짜고짜 벗고 나온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냥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이 만날 때면 늘 있던 그 자세, 그 구도대로.

채원우는 잠들었다가 깨는 게 일상이었다. 깊은 잠이란 건 그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까 한 번 깨면 다시 잠들어도 이어지지 않는 꿈의 특성상 아주 짧게 만난 다음, 내일 밤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조금씩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겨우 손을 잡게 되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꿈인데도 색이 선명했고 촉감까지 있었다. 손을 잡는 순간 정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쭈뼛하고 온몸이 떨려서 눈이 절로 번쩍 떠졌다.

습관성으로 깨던 것이랑 전혀 달랐다. 각성 같았다. 마치 처음 능력이 발현하던 그 순간처럼, 벼락이 정수리부터 내리꽂히는 듯한 감각과 함께 깨어났다.

“와…….”

채원우는 깨고 나서도 짜릿짜릿한 제 손을 쥐었다 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손바닥이 하얗게 질릴 만큼 세게 쥐었다가 펼 때마다 짜릿함은 점점 사라졌다. 그게 아까워서 손끝을 깨물었다.

하나씩 다 깨물어 열 손가락을 모두 깨문 뒤에는 뒤로 털썩 누웠다. 원래 두 명이서 쓰는 방 두 개의 좁은 관사가 처음으로 지나치게 넓고 조용하게 느껴졌다.

채원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꿈을 꿀 수 있길 바라면서.

* * *

“잠 못 잤어?”

그냥 안부 인사 같은 것에 불과해서, 말을 건 이는 채원우가 어떤 대답을 하든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연구원들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고 채원우가 고갤 끄덕이는지 가로젓는지는 보지도 않았다.

대신 연구원은 채원우에게 돌아와서 LSD처럼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생긴 약을 건넸다. 무기로서는 아주 특출 나지만, 채원우는 양날의 검이었다.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불안정함을 지닌 채원우를 제어하기 위한 독한 약이었다.

독하단 건 여러 측면에서 모두 해당되었다. 약 자체가 독하기도 했고 중독성이 독하기도 했다. 채원우는 이제 물도 없이 그 쓴 약을 먹었다. 한 알로 시작했는데, 이제 세 알이 되었다. 곧 네 알로 늘어날 거다.

‘저러다가 10년도 못 가는 거 아니야?’

10년도 못 ‘사는’ 게 아니냐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무슨 배터리 취급하듯이 못 ‘가는’ 거 아니냐고 쑥덕대는 소리에는 조심성이 부족했다. 채원우가 아직 같은 공간 안에 있다는 인식도 없는 모양이었다.

연구원들은 채원우를 인형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도, 채원우가 여태 외부 자극에 대해 거의 반응하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고 희노애락도 없는 것처럼 군 게 그 이유 중 하나이긴 했을 거다.

채원우는 10년도 남지 않은, 곧 고장 날 배터리 취급을 받으며 삭막한 공간을 빠져나왔다.

관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연구실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연구실에서 철저하게 관리되는 애착 인형처럼 같던 채원우의 분위기가 점점 밝아졌다. 비로소 산 사람 같았다. 심지어는 헌터가 아니라 평범한 또래 청년처럼 보였다.

얼른 가서 자야지. 이제 막 석양이 지고 있을 뿐이지만, 빨리 가서 자야지.

연구원들 몰래 능숙하게 훔쳐 온 수면제가 주머니 안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꿈으로 달려가는 채원우의 모습은 분명 인형과도, 고장 난 배터리와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 * *

그날 꾼 꿈은 분명히 달랐다. 채원우는 천장과 바닥을 포함하여 사방의 벽이 모두 두툼한 흰 쿠션으로 둘러쳐진 방에 갇혀 있었다. 문에 작은 틈도 없었고 창문도 없었다.

이곳에 들어왔던 건 헌터청에 들어오고 초반에 몇 번, 작년에 한 번이 전부였는데 갑자기 꿈에 나오다니. 꿈에서도 오고 싶지 않은 장소였던 만큼 채원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을 보려고 잠을 자는 건데, 이번에는 완전 꽝이다.

온통 솜으로 빽빽하게 둘러쳐진데다가 제습기까지 틀어서 공기 속의 수분 응집력까지 날려버린 이 방에, 수면제를 먹어 평소보다 깊게 잠들었을 상태로 갇혀 있어야 한다니.

채원우는 주먹을 쥔 팔을 뻗어 앞으로 내밀었다가 뒤로 세게 내리쳤다. 쾅 소리조차 먹혔다. 쿠션이 조금 눌린 게 전부였다.

꿈까지 꾸고 있는데, 또 자는 것 말고는 이 시간을 버틸 수가 없을 것 같다. 채원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감았다. 양 100마리라도 세야겠다.

한 마리를 셀 때마다 양털을 한 움큼씩 뽑아 이 벽을 채우는 상상을 하던 채원우의 볼을 누군가 건드린 건, 양 일흔한 마리째의 털을 뽑을 때였다.

“뭐야…….”

당연히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 왔을 요원이나 연구원일 거라 생각하며 거칠게 고개를 든 채원우는 놀라고 말았다. 커다랗게 뜨인 두 눈에 들어온 건 양백겸이었다.

“……왜 당신이 여기에…….”

얼떨떨한 나머지, 일주일을 들여 간신히 손을 잡았던 채원우는 단번에 손을 뻗어 양백겸의 뺨을 감쌌다.

꿈속의 양백겸의 뺨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채원우의 손에 고갤 포갰다. 그래서 채원우는 이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꿈이 아니라면 이렇게 상냥할 리가 없잖아. 애초에 이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웃어준 적도 없고, 이런 웃음을 본 적도 없다. 이 얼굴 자체가 상상 속의 표정이란 뜻이었다.

“왜 하필 여기에 나타났어?”

채원우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하단 듯이 물었다.

“여기에 당신이 나타나면 이 장소를 싫어하기 힘들게 되잖아.”

“왜?”

“어……?”

“왜 힘들게 되는데?”

양백겸의 목소리가 원래 이랬나? 이 사람을 만난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확신이 부족했다. 하지만, 맞겠지. 양백겸은 자신과 다르게 변성기를 이미 겪었으니까 크게 변하지 않았을 거다. 꿈은 깊은 기억을 이용해서 구현된다고 하니까 이 목소리도 맞을 거다.

“그야 그쪽은…….”

꿈이라서 숨길 것도 없이 솔직하게 말하려던 채원우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내가 그쪽을……. 이게 무슨 감정이지?

설명하기 어렵고 정의 내리기도 어렵고, 애초에 분석이라는 걸 해보려 한 적이 없던 감정이라 채원우는 조금 막막해졌다.

입을 꾹 다물고 미간만 찌푸리고 있는 채원우를 가만히 보던 양백겸이 손을 뻗어 채원우의 볼을 감쌌다.

“그쪽은…….”

채원우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방식대로 설명하려 애썼다.

“이 좆 같은 방하고는 정반대에 있는 사람이니까…….”

단순하고 단조로운 자신의 일상에서, 좋고 싫고는 마찬가지로 단순한 지표 위에 세워졌다. 직선을 길게 그려서 오른쪽 끝은 더럽게 싫어하는 것들, 왼쪽은 그 반대인 거다.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그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어서 감히 이름표를 붙일 수 없지만, 어쨌든 더럽게 싫어하는 것에 반대. 왼쪽 끝의 끝에 양백겸이 있었다.

“그래?”

채원우의 대답을 들은 양백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런 것도 하고 싶어?”

포르노를 본 적이 있냐고 물으면, 본 적은 있다. 연구원 중에 소문이 별로 안 좋고 사람들이 좋아하지도 않는, 질 나쁜 양아치, 그 자체인 남자 직원이 하나 있다. 그가 자신과 채원우만 있는 틈을 타 저질 야동을 튼 적이 있었다. 요란한 소리와 처음 듣는 언어와 과하게 키운 볼륨 때문에 불쾌했던 기억만 있다. 채원우에게는 무언가의 자극이라기보다 소음밖엔 되지 않았다.

근데 이 끔찍한 방에서, 꿈속의 양백겸이 시도하려는 행동은 그 포르노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짜릿짜릿하게 느껴졌다.

양백겸이 서서히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싶었지만, 눈을 감지는 않았다. 그건 미친 짓이다. 이렇게 정면으로 이 사람을 보는 꿈을 다시 꾸게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얼굴을 똑똑히 봐두어야 했다. 그리고 만약, 눈을 감았다가 꿈에서 깨어버리면?

채원우가 눈을 감지 않자 양백겸이 눈을 접어 웃었다. 앞이 보이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선명한 눈웃음이었다.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양백겸의 입술은 사방을 두른 쿠션처럼 푹신푹신하고 약간 단단했다. 아마도 입술 너머의 치아 때문일 듯싶었다. 꿈이 총천연색인 만큼 채원우의 수면 질은 최악을 달렸지만, 지금만큼은 그 최악의 수면 질에 감사했다. 컬러풀한 시야에 비례해서 촉감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바닥으로 툭 떨어진 채원우의 손이 천천히 구부러졌다. 바닥을 거세게 긁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아래로 터진 쿠션 사이로 새어 나온 솜이 허공으로 펄펄 날렸다.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비현실적인 효과였다. 이 장소에 쓰이기에는 너무 과분하게 동화 같았고, 양백겸에게 쓰이기에는 부족했다.

“어때?”

입술이 떨어지자 양백겸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이제 알았는데 입꼬리 아래에 점이 있었다. 아주 작아서 이렇게 가까이 봐야지만 볼 수 있었다.

야했다. 야하다는 말이야 많이 들어봤지만, 이렇게 체감하는 건 처음이었다. 꼬리뼈가 저릿저릿할 만큼 황홀했다. 바보같이 입술이 벌어졌다.

“다음에 봐.”

그러나 양백겸은 채원우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가볍게 몸을 돌려서는 벽을 밀었다. 분명 벽이었는데, 양백겸이 미는 순간 벽은 문이 되었다.

넋이 나간 채 양백겸의 뒷모습을 보던 채원우가 다급히 일어나 그 뒤를 쫓았다. 닫히려는 문 틈 사이로 손을 넣고 거세게 밀치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그 끔찍한 공간에서 나올 수 있었다.

채원우는 갑자기 나오게 되어 당혹스러웠고, 사라진 양백겸 때문에 허무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 그에게 눈부시게 하얀 햇살이 쏟아졌다. 발끝으로는 파도가 밀려와 거품이 되어 부서졌다.

이상한 꿈이었다.

* * *

그 이후로 한참을 짧게 자고 자주 깨는 평상시 채원우로 돌아왔다. 꿈을 꿀 수 없었다. 한 번 맛을 보면 더 허무한 법이다. 채원우는 꿈을 꾸지 않아서 잠드는 게 싫었고, 그런데도 꿈을 꾸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잠을 잤다.

“꿈꾸는 약 같은 건 없어요?”

결국 연구원에게 묻자, 그들은 채원우가 마약을 찾는 줄 알고 일언반구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약을 줄여서, 출동을 다녀온 채원우는 열이 올라 끙끙대며 침대를 굴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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