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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9
헌터청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백겸이 감탄하던 그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며, 채원우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럼 이어서 하겠습니다. 계속해서 별로 좋지 않은 이야기뿐이네요.”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백겸이 밝은 목소리로 다음 던전으로 넘어갔다. 다음 던전은 안개가 가득 끼고 이상한 꿈을 경험하게 해주던 곳이었다.
“여기는 위험도는 별로 높지 않아요.”
오히려 채원우가 관광명소로 만들 수 있겠다 했지만, 그 말은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랬다가 정말로 헛꿈을 꾸고 그렇게 만들려는 멍청이들이 나올까 봐.
“안개는 성분 분석이 필요할 거 같고요.”
들어가자마자 포집했던 두 명분의 안개통을 채원우가 책상 위로 올렸다. 워낙 가뿐하게 들어서 가볍겠거니 하는데, 병 자체가 꽤 무거웠다. 책상 위로 쿵 떨어지는 소리에 직원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는 게 보였다.
채원우가 정말로 등급이 그렇게 떨어졌나 하는 의심일 수도 있다. 채원우가 사실 지금 능력 상태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음모론은 철따라 시간따라 도는 꾸준한 소문이었다.
그걸 확인할 길이 없어서 참고 있을 뿐이지, 틈이 조금이라도 보이고 기회가 한 번이라도 나면 당장에라도 채혈하고 묶어두고 상세하게 분석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환상 같은 걸 보여주긴 하는데 최고의 욕망 수준을 보여주는 건 아닌 듯싶고요. 그냥 좀 추억 팔이 수준?”
백겸이 머리를 긁적였다. 좀 멋들어진 말을 하고 싶어도 생각이 나야 하지 원.
“걱정되는 건 던전이 이런 환경을 만든 이유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묶여서 뱅뱅 돌게 만들어, 뭔가 빼내려는 건가 싶은 게 제 추측인데, 그러기엔 보여주는 환상 자체가 강력하진 않아요. 여기는 위험도보다 미지수라는 부분에서 활용도가 낮습니다.”
“큰일이구먼. 사람들 생활 반경은 점점 줄어드는데……. 아니, 이렇게 계속 던전이 우리 터전까지 모두 빼앗아 가면 어떡하라고? 대안은 있나?”
“대안을 왜 우리한테서 물으세요?”
채원우가 지금 발언한 남자를 빤히 쳐다보면서 되물었다. 노려보는 것처럼 형형한 눈빛에 남자가 꿍얼댔다. 물론 백겸과 원우의 귀에는 다 들렸다.
“우린 댁들이 돈 쓰기도 싫고 사람 쓰기도 싫고 자원도 쓰기 싫어하는 던전에 들어가서 대신 데이터를 모아주는 건데 무슨 대안까지 우리한테 바라는 건지. 점점 요구하는 게 늘어나는데, 우린 안 해도 상관없어요. 다시 도망자로 만들면 어쩔 수 없죠. 도망자로 살지 뭐. 난 근데 안 잡힐 자신 있는데, 그쪽들은 우리 잡을 자신 있어요?”
상냥한 미소에 화사하게 반짝이는 눈웃음까지 장착한 채원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양백겸은 머쓱하게 입맛을 다시고는, 종이를 모아 옆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던 팀장에게 건넸다. 발언대에 팔을 대고 이 모습을 관망하던 팀장이 고갤 끄덕이며 받아 들었다.
“좋은 소식은 정말 하나도 없어?”
그러자 백겸이 팀장을 보고 웃었다. 팀장은 그 미소가 채원우와 닮아 보여서 조금 놀라고 말았다.
“좋은 소식은 헌터청이 알고 있지 않아요?”
“하하……. 무슨 소리야?”
“던전 발생이 줄고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
“오, 진짜 뭐가 있긴 한 모양이죠?”
골치 아픈 듀오 같으니. 팀장이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최전방에서 뛰던 둘이다. 사라지지 않는, 그들 표현으로는 토끼굴인 던전들만 돌아봐도 알 거다.
“일상 속에 녹아들고 있는 거지……. 확실히 이전보다는 좀 더 안정적이 된 건 맞아. 맞는데, 안심할 수는 없어. 폭풍 전의 고요란 말도 있잖아.”
“그건 저도 동감해요. 동감 못 하는 건…….”
“현장에서 공짜로 우리 굴리면서 다 내놓으라고 하는 건 좀 날강도 같다는 거죠.”
채원우가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이 아니라 다른 직원이 그 말에 분개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겸과 팀장이 한숨을 삼켰다. 사실 지금 상황은 미팅 세 번 중에 한 번은 일어나는 일이라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사고 치고 도망간 걸 묻어준 게 어디인데! 사실 탈영이나 마찬가지였어! 그 극악무도한 행태는!”
“극악무도라뇨?! 우리 원우가 여기서 무슨 피해를 당했고, 그때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다시 구질구질하게 꺼내볼까요? 말꼬리 잡고 아주 몇 년 질질 끌어봐요? 채원우가 쓴 계약서가 얼마나 불공정했는지 인터넷에 공개해 볼까요?!”
“아이고……. 왜 매번 이러십니까. 매번 똑같잖아요. 이기지도 못하시면서 왜 애들을 긁어요.”
기다렸다는 듯이 우다다 외치는 백겸의 앞으로 팀장이 슬쩍 끼어들며 중재를 시도했다. 번번이 이기지도 못하는 것도 맞고, 매번 싸우는 것도 맞아서 야심 차게 일어났던 사람이 뻘쭘하게 다시 주저앉았다.
채원우는 하품을 하고 고갤 갸웃거리다가 테이블 가운데에 비치되어 있던 과자를 끌어왔다. 그중에 백겸이 좋아하는 초코칩이 있어서 그것도 까서 백겸 쪽으로 내밀었다.
“싸우자고 온 거 아니에요, 저희. 저도 평화로운 게 좋습니다. 이왕이면 평화가 길었으면 좋겠고요.”
백겸은 채원우와 다녀왔던 놀이공원을 떠올렸다. 날씨는 화창했고 채원우는 예뻤고 우리는 즐거웠다. 세상을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이 폐허가 되는 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채원우와 다시 전투에 뛰어드는 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저희는 적극적으로 도울 거예요. 대신 우리도 헌터청에서 도는 이야기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보낸 데이터가 어떻게 쓰이는지, 우리가 하는 짓이 뻘짓인지 아니면 효과가 있는 짓인지 정도는 알고 싶어서요.”
백겸의 말이 끝나자 중진 직원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눈빛으로 의견이 정리된 모양이다.
“나머지는 서류 취합 담당인 제가 할게요. 다들 바쁘신 와중에 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팀장이 말끝에 웃음 이모티콘이 붙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회의실을 비웠다.
곧 조용해진 회의실에 채원우, 양백겸, 그리고 팀장만 남았다. 팀장이 책상에 기대더니 조용히 물었다.
“어때? 던전에서 사는 거.”
“할 만한데요.”
“전 좋아요.”
백겸이 심드렁하게, 채원우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채원우는 사람보다 몬스터가 대하기에 나았다. 아무래도 자신은 괴물이 맞는 모양이다. 몬스터 역시 더 사랑스럽거나 친밀함을 느껴서가 아니라, 다른 생각 없고 본능적이란 점에서 좋았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요즘 헌터청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해. 이제 공생 국면으로 접어든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쪽과 여전히 없앨 수 있다고 믿는 쪽.”
“팀장님은요?”
“사라지지 않는 던전들은 없앨 수 없다고 생각해. 다행인 건 그렇게 소멸되지 않고 남는 던전 수가 부쩍 줄었다는 거지.”
“와, 우리 다시 백수 되겠네.”
“그래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 애초에 왜 사라지지 않았는지, 혹시 커다란 던전이 생기기 전 종기 같은 증상으로 봐야 하는 건지, 언제라도 다시 열려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는 건 아닐지. 너희 생각은 어때?”
“제 생각은……. 일단 생각보다 헌터청이나 저희나 아는 건 비슷하단 거네요. 물론 여기 분들이 훨씬 더 똑똑하지만 저희만큼 이 상황을 해석할 수 없는 건 똑같으니까요.”
중졸인데 박사, 석사이실 연구원분들이랑 아는 수준이 비슷하다니 이 정도면 성공했다, 양백겸.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럼 어떡하지? 현장 데이터가 부족해. 던전 자체를 해석하기도 어렵고.”
“그냥 버텨요.”
조용히 과자를 까먹고 있던 채원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냥 하루하루 살면 되는 거죠. 그날 생기는 일을 해결하고 맛있는 밥을 먹고 잘 자면 되죠.”
채원우……!
백겸이 감동한 나머지 활짝 웃으려는 순간 채원우가 한쪽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급격히 불안해졌다.
“여러분은 약물 실험이나 불면증, 환청, 환각을 유발하는 실험을 몇 날이고 며칠이고 당하는 것도 아닌데 그게 뭐 어렵다고 지레 겁을 먹어요.”
감동적인 에세이 재질의 말 다음에는 바로 회초리. 백겸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도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팀장의 얼굴에서 미미하게 떠오르던 미소가 싹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었다. 백겸이 채원우를 벌떡 일으켰다.
“그럼 다음에 봬요, 팀장님.”
그렇게 말한 뒤 회의실을 뛰쳐나왔다.
팀장도 한 성격 했다. 강 팀장과는 결이 다른 다혈질로, 참지 않는 말티즈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뛰쳐나올 걸 피하기 위해서 백겸은 원우를 끌고 비상계단으로 내려오다가 옆으로 훅 빠져서 구름다리로 들어갔다.
천천히 속도를 줄이면서 백겸이 채원우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우리도 좀 똑똑한 거 같지 않아?”
“저쪽이 멍청한 거 같은데요?”
“그 말도 맞고. 한동안 삐져서 연락 안 할 수도 있겠다. 그럼 그동안 뭐 해야 하나. 백수 신세에.”
“저랑 놀면 되죠.”
채원우가 입술을 삐죽이며 웃었다.
“미리 계획하지 말고 다음 끼니, 다음 할 일만 생각하고 살아요.”
“좋아.”
이래 봬도 계획적인 성격인 백겸이 단번에 대답했다.
평생 미래 계획, 안정적인 거주지만 생각해 왔던 백겸의 인생 플랜은 이미 대차게 뒤틀려 버렸다. 더는 계획하며 살기도 피곤했다.
게다가 하나 있는 애인이자 가족은 병적으로 충동적이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선, 자신도 좀 미치는 게 밸런스가 맞았다.
“좋아. 그럼 일단 당장 집으로 돌아가자. 하루 외박이면 충분해.”
“돌아가서 토마토 심어요. 할머니가 씨앗 줬어요.”
“고구마도 심자.”
“딸기도.”
채원우가 킥킥대고 웃었다. 파종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수확을 기대하는 모양이다. 뭐, 유일한 계획이 딸기와 토마토를 따고 고구마를 파내는 것 정도면 좋지.
백겸과 채원우가 손깍지를 꽉 쥐었다. 그리고 소풍을 가는 것처럼 손을 흔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구름다리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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