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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8
“이런 말 하기 민망한데.”
“어.”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던전을 믿을 필요는 없죠.”
“장난하냐.”
백겸이 뒤로 누우며 웃음을 터뜨렸다. 채원우는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눈을 질끈 감고 크게 웃는 백겸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입술에 그려진 미미한 미소만이 집착을 한 꺼풀 가려주고 있었다.
“너는 괜찮아?”
벌렁 누운 채로 다시 일어나지 않은 백겸이 물었다. 채원우는 쓰레기를 한데 모아 침대 옆으로 떨어뜨리다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고갤 기울였다. 백겸은 또다시 채원우에게 깔린 모양새가 되었다. 몇 시간 전에도 이렇게 있었던 거 같은데.
“뭐가요?”
“헌터청 가는 거. 생각해 보니까 더 일찍 물어봤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물어봤네.”
“헌터청 가는 거요? 그게 왜요?”
“너한테는 별로 편한 장소가 아닐 거 아냐.”
“그래요?”
응?
어쩐지 서로 다른 대화를 하는 것 같아서 백겸이 슬쩍 일어났다. 채원우는 백겸의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무릎에 힘을 주고 앉았다. 얼핏 보면 그냥 무릎 꿇고 앉은 것 같지만, 허벅지에 힘이 단단히 들어갔다. 백겸이 무의식중에 그 허벅지를 긁적거렸다.
“전 아무 생각 없어요. 굳이 뭔가 의미를 부여하자면 형을 만나게 해준 곳이죠.”
“아니……. 그렇게 좋은 의미를 받기엔 과분한 곳인데.”
“그렇긴 한데 또 나쁜 의미를 줄 필요도 없는 걸요. 공간 자체에는 아무 생각 없어요.”
“그럼 연구원들이 싫어……?”
“딱히 그것도 아니고……. 실험 기억은 거의 안 나요. 힘들었던 감정만 좀 남았지.”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채원우의 머리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구체적인 기억은 뭉개고 감각을 점점 죽였다. 감각에 따라서 감정도 꺼졌다. 채원우의 감정이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빛날 때는 오로지 양백겸과 있을 때뿐이었다.
자신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든 걸 잃은 양백겸. 그런 와중에도 채원우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헌터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에 온기와 안식을 줬던 유일한 인물.
채원우는 몸을 굴려 옆으로 누웠다. 다리 하나는 여전히 백겸의 몸 위에 얹어둔 채였다.
“형. 내가 신경 쓰여요? 아니면 형이 헌터청이 싫은 거예요? 헌터청이 없어지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까요?”
“뭐?”
속삭이는 목소리가 악마처럼 달콤했다. 채원우에 한해 둔한 경계심 레이더조차 반짝일 정도였다. 백겸은 손사래로도 부족해서 고갤 마구 저었다.
“아니, 야. 그런 거 아냐. 당장 없어지면 사람들은 어떡해.”
“사람들이 뭐가 중요해요.”
“주, 중요하지……. 미친놈아.”
이런 식의 접근은 소용없다. 백겸은 눈을 굴리다가 침대 옆에 있는 쓰레기를 보고 빠르게 변명을 떠올렸다.
“그럼 우리가 모든 음식을 다 해먹어야 해…….”
“알았어요. 아무튼 헌터청이 문제인 건 아니란 얘기죠?”
“어어. 그리고 문제여도 네가 뭘 어떡하겠니…….”
너 이제 한 주먹거리인데…….
채원우가 상처를 받을까 봐 백겸이 말끝을 흐렸다. 채원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겸을 보다가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쎄, 쎄한데. 하지만 웃는 얼굴이 워낙 화려하게 예뻐서 백겸은 이번에도 유야무야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채원우가 약해졌어도 저 외모가 강력하다, 강력해. 그리고 심각한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다. 우리가 들고 있는 패도 크니까.
* * *
백겸과 채원우는 지급받은 방문증을 목에 걸었다. 기한이 적혀 있지 않고, 1년에 한 번 계약 상태에 따라 자동 갱신되는 방문증이었다.
익숙한 정문 대신 후문으로 들어가는 것도 이제는 적응이 되었다. 사실은 이게 더 편한 것 같다. 정문은 아무리 부서지고 엉망이 되어도 하루 정도면 다 정리가 되는, 신기하고 웅장하고 꽤 화려한 곳이지만 그래서 정이 안 갔다. 그리고 들어올 때마다 새로 시작되는 1년을 어떻게 버텨야 하나 싶기도 했고. 후문은 실근무자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라 그런지 조금 더 편안했다.
채원우와 백겸은 후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지친 표정의 흡연가 직원들에게 동정의 눈빛을 1초 발사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헌터청 특유의 향기가 났다. 유명 서점 체인점에서 나던 향기랑 비슷해서 강제로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뭐, 이것도 백겸이나 채원우처럼 하도 맡으면 아무런 감흥이 없게 마련이다.
“7층?”
“응.”
4층이 아니라 중진들이 있는 7층을 버튼을 눌렀다. 곧 직원들이 엘리베이터에 따라 탔다. 채원우와 백겸은 벽에 붙어서 가만히 기다리는데 들어오던 사람들 몇 명이 그들을 흘끗 보았다가 놀란 기색으로 다시 돌아봤다.
아무리 현실에서 묻혔다고는 해도 백겸과 채원우는 워낙 유명한 페어라서 그런지 이렇게 알아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헌터청 안에서 한정이고 알아보더라도 다시 못 본 척하긴 하지만.
못 본 척하려고 해도 벽에 비치는 모습을 계속 곁눈질로 보거나 온몸으로 신경 쓰인단 티를 내서 백겸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마침 껌을 씹고 있던 백겸이, 커다랗게 풍선을 불다가 탁 터뜨리면서 반짝거리는 벽을 통해 눈이 마주친 상대에게 한쪽 눈을 깜빡였다.
“헉.”
남자 직원이 묵직하게 놀라는 소리에, 그 옆에 서 있던 동료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퍽 치는 것까지 보였다. 다행히도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대부분 내린 덕에 백겸은 타이밍 좋게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둘만 남고 백겸이 크게 웃자 채원우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형. 그러지 마요.”
“어? 뭘?”
“사람들한테 막 그렇게 여지 주는 거요.”
“아니야. 아냐, 아냐. 놀리는 거지. 자꾸 쳐다보잖아. 그리고 남자였어.”
“저도 남잔데요. 저 남잔데 형한테 환장하잖아요.”
“너는 정말…… 돌려 말하질 않아서 큰일이다.”
“뭐 하러 돌려 말해요. 난 그냥 직접적으로 말할래. 형 좋다고.”
형 좋다고, 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마침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팀장이 휘파람을 길게 불며 박수를 쳤다.
“둘은 여전하네. 기다렸어. 얼른 와.”
“저희 늦었어요?”
“그런 모습을 들켜놓고 뻔뻔한 것도 여전하네. 안 민망하니? 나는 엄마가 애인 얘기만 해도 민망하던데.”
“이미 들킨 걸 뭐 하러 민망해 해요. 늦은 건 아니죠?”
“늦은 건 아닌데 기다리고는 있었어. 좋겠다, 양백겸. 완전히 네가 갑이야, 헌터청이 을이고. 헌터청이 배출한 최고의 배신자가 된 걸 축하해.”
“감사합니다. 최고의 칭찬이네요.”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최고의 칭찬이었다. 백겸은 씩 웃고는 껌을 뱉어서 휴지통에 넣었다.
곧 들어갈 회의실의 반투명한 벽 너머로 정장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에 반면 백겸과 채원우의 차림은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운동화라서 한껏 비교되었다.
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가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제 얼굴은 제법 눈에 익었는데 여전히 직분하고 이름은 낯선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봤다.
“자, 회의를 시작해 볼까요?”
뒤이어 들어온 팀장이 외쳤다.
잘 꾸며진 자료를 보며 프레젠테이션하거나 보기 좋은 보고서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닌 만큼, 전달 방법은 말솜씨밖에 없었다.
채원우는 솔직하고 직설적인 대신 많이 생략하고, 호불호에 따라 사람을 당황하게 할 정도로 달라지는 표현 때문에 탈락이니 남은 건 당연히 백겸밖에 없었다.
백겸은 우선 독 개구리가 있던 습지 던전에 대해 말하며 운을 뗐다.
“일단 습도가 엄청 놓고 대부분의 지반이 단단하지 못해요. 발이 푹푹 빠지고 갯벌보다 더 상황이 안 좋고요. 밀물 썰물 같은 조차의 영향도 받습니다. 밀물 때가 특히 곤란해서 기계도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다양한 생물군이 서식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그 말도 맞아요. 근데 문제는 그 생물군의 대부분이 독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죠. 개구리 하나를 봤는데요.”
백겸이 뽑아온 사진을 긴 테이블 가운데로 밀었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모으고 야박하게 한 장밖에 안 뽑아온 개구리를 들여다봤다.
“엄청 빨라요. 채원우가 피하게 해주지 않았다면 전 죽었을 거예요. 아, 타액에는 산성이 있어요. 제가 엄살 부리는 게 아닙니다.”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갯벌 자체가 생물학적, 자연학적 가치가 높아서 던전에도 거는 기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백겸에겐 알 바가 아니고 채원우는 더더욱 아니었다.
채원우는 백겸이 잘 보이는 곳 의자에 앉아서 종이를 팔락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메모도 하는데 낙서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둘도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나? 더 급이 높은 헌터들을 투입하면…….”
아직도 미련이 남는 말에 채원우가 갑자기 펜을 툭 떨어뜨렸다. 주변의 관심이 동시에 자신에게 쏠리자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안에 뭐 비자금이라도 숨기셨어요?”
채원우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물었다. 너무 순수하게 묻는 모양새라 무슨 소릴 그렇게 하냐는 대꾸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뭐, 뭐?”
한참 뒤에야 한마디 했지만 백겸은 이미 늦었단 걸 알았다.
“백겸이 형이 추천을 안 한다잖아요. 왜 굳이 자꾸 들어가려 하세요? 거기 진흙밖에 없어요. 생태계가 걱정되는 거예요? 뭐, 다양성 추구?”
우리 원우 똑똑해졌네. 백겸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다른 몬스터들도 다 키우지 그랬어요. 왜 죽이라고 했대. 힘들어 죽을 뻔했는데.”
힘들어 죽을 뻔하긴. 채원우가 지금껏 죽인 몬스터들이 들었다간 억장이 무너질, 빤한 거짓말이었다.
“자꾸 그렇게 자원 낭비하지 마세요. 이러다가 헌터 다양성부터 줄겠어요. 한때 온갖 던전에서 다 굴러본 사람으로, 나도 여기는 추천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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