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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114화 (11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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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5

“맞아.”

채원우가 목이 멘 채로 대답했다.

“우린 판타지 세계로 들어온 거야.”

확 개인 시야 끝에 있던 건 그의 진짜 양백겸과 어린애였다.

그 어린애는 자신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 모습을 흉내 내서 양백겸을 흔들어놓았겠지. 그러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테이블 위에 둘 다 쓰러져서 잠들어 있었고.

그러니 당장 가야 하는데, 언제 백겸이 형이 깨어나서 내가 힘이 약해지지 않았단 걸 눈치챌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런 상황인데도 채원우는 양옆으로 밀친 얇은 물을 천천히 허공에 흩뿌렸다. 순식간에 온통 흰 스튜디오 같은 이 던전 안에 수많은 무지개가 떠올랐다.

“너는 재미있는 꿈을 꾸는 거고.”

“우와…….”

“나는 네가 상상한 마법사니까.”

이제야 백겸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어린 백겸에게 헌터청으로 오란 말 같은 걸 한 게…… 마음에 걸렸다.

“내가 했던 말은 모두 헛소리라 생각하고, 깨면 잊어버리는 거야.”

비록 네가 깨어나는 게 아니라 사라지는 거라 할지라도, 채원우는 진심으로 충고했다.

“잊어버려.”

설마 이게 정말 양백겸의 과거에서 빌려온 한순간이라도 괜찮다. 양백겸이 자신을 잊어도 찾아갈 거니까. 채원우는 양백겸을 잊지 않고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이제 백겸의 몸이 거의 투명해졌다. 이 던전은 한여름의 꿈과 같은 곳이었다. 환상을 보여주고, 깨기 싫은 낮잠처럼 천천히 녹여 먹는 질 나쁜 던전일 거다. 여기서 나가기 싫게, 말도 안 되는 추억을 만들어버리는.

“어떤 좆같은 일이 있어도 살아. 날 기다리면서.”

어린 백겸은 이해할 수 없는 소릴 듣는단 표정이었지만 고갤 끄덕였다. 그러고는 허공으로 시선을 들었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원우는 잡아채듯 손을 휘저었지만 허공밖엔 움켜쥘 게 없었다. 빛가루조차 남지 않은 허무한 손바닥을 보다가 더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채원우에게 중요한 건 추억보다 현재의 양백겸 이었다.

아마도 어린 백겸이 사라지는 순간에 어린 자신 역시 사라졌을 거다. 덩달아 정원에 어울릴 법한 테이블과 의자도 사라지고 있었다.

갑자기 기댈 곳이 모두 없어진 백겸이 그대로 아래로 훅 꺼지려는 타이밍에 맞게 채원우가 팔을 뻗어 받아냈다.

“흣……!”

아슬아슬하게 받아냈단 안도감에 원우가 그답지 않게 신음을 흘렸다. 그 소리와 추락하는 느낌에 백겸이 눈을 떴다.

“어어……?”

처음에는 잠에서 덜 깬 사람답게 상황 파악이 늦었다. 채원우의 팔에 무력하게 기대 있다가 백겸은 그게 테이블이 아니란 걸 깨닫고 나서야 벌떡 일어났다.

“어?! 어어?!”

앉아 있던 의자도, 엎드려 있던 테이블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어린 채원우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백겸은 옆에 있는 채원우도 눈치채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며 ‘어어?! 어디 갔지?!’ 하고 외쳤다.

“뭐가요?”

아래로 털썩 주저앉은 채원우가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물었다. 그 인기척에야 잠이 진짜로 완전히 깬 백겸이 눈을 깜빡이며 원우를 한참 내려다봤다.

“뭐 찾아요?”

“너…….”

어린 백겸이었다면 이 순간 채원우의 볼을 감싸며 ‘너 대체 언제 이렇게 컸어?!’라고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고 공중전까지 겪은, 구르고 구른 양백겸은 상황 파악에 그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금세 머리에서 팔을 툭 떨어트리고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가짜였구나.”

“응.”

“이 던전, 아주 몹쓸 던전이네.”

“저도 어린 형을 봤는데.”

“너도?”

“너무 귀여웠어요. 그래도 진짜만 못했지만.”

진짜만 못했단 부분이 말의 본론인데, 너무 귀여웠어까지만 들은 백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이 던전이 왜 호평을 들었는지 이해하겠다고 투덜거렸다.

헌터청에 소속된 이능력자들은 강한 신체와 이능력을 얻는 대신 중요한 뭔가를 하나씩 잃은 사람들이 많았다. 결핍이 있는 이능력자들에게 이곳은 아련한 추억 상자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만약 급이 A급 정도 되는 던전이었다면 굶어 죽든 말든 개의치 않고 여기서 나가지 않고 살겠단 사람들이 속출했을 거다.

여러모로 질 나쁘고 달콤한 불량식품 같은 던전이었다. 급이 높았다면 치명적인 마약이었을 테고.

“하. 그래도…… 진짜 귀여웠는데.”

이렇게 사라질 줄 알았다면 더 오래 볼 걸. 앨리스의 내용처럼 준비된 음식을 입에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들어 많이 볼 수 없었다. 깨어나서도 계속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현장하고 너무 거리를 두었나, 감이 확 떨어졌네, 양백겸.

“던전 파악은 된 거 같죠?”

반면에 제대로 된 이별을 해서 그런지 미련이 없는 채원우가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여긴 그냥 폐쇄하고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막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좀 개발해서 관광명소로 쓰든가요. 출입료 좀 세게 받아도 쏠쏠할 거 같은데.”

자신의 어깨에 팔을 툭 걸치고 관광명소니 출입료니 하는 채원우가 너무 낯설었다……. 백겸은 당황해서 원우를 보며 ‘너 의외로 자본주의에 특화되었네’ 하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자본주의에 특화될 필요 없이도, 자기 목숨 걸고 번 돈이 꽤 많은 채원우는 그보다 다른 게 중요했다. 백겸이 보이지 않게 허리 뒤에서 손을 흔들어 천천히 안개를 채우기 시작하며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조금 전 안개를 모두 치웠을 때 길을 눈여겨 봐뒀다. 던전 자체는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서, 또 길을 잃어버릴 일 없이 바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형. 어린 제 모습이 그렇게 귀여웠어요?”

“어. 진짜 그냥 껴안고 살고 싶더라.”

“너무하네. 그 완성형이 여기 있는데. 지금 제가 더 좋지 않아요?”

“좋긴 한데…….”

말끝이 흐려지자 원우의 미간이 단번에 좁아졌다. 얼른 대답하라는 그 노골적인 눈빛에 백겸은 아쉬움을 삼키며 솔직하게 말해 줬다.

“넌 좀 너무 다 컸지.”

백겸의 시선이 채원우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훑고, 그리고 다리 사이도…… 들렀다가 왔다.

“어린 원우 진짜 키우고 싶더라. 너 2세 가질 생각 없…….”

“제가 형 아니고 누구랑 2세를 가져요.”

앗, 농담이라고 하려 했는데.

농담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원우가 백겸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살벌하게 웃었다.

“아, 잘됐다. 아예 오늘 시도해 보자. 혹시 모르잖아요, 형. 이 던전이 기적을 가져다줄지.”

“하하……. 너 어디서 또 이상한 거 보고 왔니?”

“아뇨. 하지만 상상엔 한계가 없죠.”

어라. 말이 늘었는데. 이러려고 요즘 얘가 책을 읽었나?

“형.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우리 사는 세계 자체가 판타지인데.”

“으응?”

“아예 나가자마자 한번 해보자고요. 될 때까지.”

오싹함에 백겸이 슬슬 옆으로 빠지려고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채원우는 팔에 힘을 단단히 줘서 백겸을 제 곁에 붙였다. 그리고 딱 맞춰 도착한 던전 입구에서 막을 한 손으로 무참히 찢었다.

벌어진 경계 사이로 들어오는 핏빛 저녁놀에 얼굴이 젖어, 화사한 미소가 더더욱 살벌해졌다.

“기대된다. 판타지 세계. 그렇죠, 형.”

아, 아니. 나는 기대 안 되는데.

백겸은 고갤 저으려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왜인지 이 판타지 세계라는 말이 참 익숙하게 들려서.

* * *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어서 피곤함에 절은 양백겸과 채원우는 중간에 모텔 하나를 잡았다. 무인 모텔이었고, 새로 지었긴 하지만 뭔가 싸구려 느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찜질방을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피곤한 와중에도 몸은 착실히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객실에 들어왔지만 씻지도 못했다. 신발을 벗기 무섭게 백겸이 원우에게 달려들었다.

백겸이 양손으로 채원우의 볼과 머리를 강하게 감쌌다. 머리는 거의 쥐어뜯는 정도였다.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이 손에 부드럽게 엉켰다.

백겸은 입술 사이로 흐흐 웃으며, 이로 채원우의 아랫입술을 따끔하게 씹었다.

“너무 아파요.”

채원우가 울망한 눈으로 조금 살살해 달라며 택도 없는 아양을 떨었다. 백겸은 이게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티 나는 애교인 걸 알면서도 짜릿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가이드가 헌터보다 약한 건 정설이었다. 약한 존재라고 규정된 가이드가 헌터를 아프게 한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네가 나를 변태로 만드는 것 같아.”

“그것도 별로 싫은 건 아니잖아요.”

“맞긴 해. 다른 변태들 대신 나 하나 꼬이는 게 낫지 뭐.”

채원우의 성격이 어떻든 신체 능력이 어떻든 예쁜 얼굴은 오해를 부르고 벌레가 꼬이기 쉬웠다. 그러니까 양백겸이라는 변태가 옆에 찰싹 붙어서 다른 벌레들을 모두 내쫓는 게 차라리 낫지.

백겸의 이론은 억지스러운 게 채원우와 똑같았다.

“원우야.”

백겸이 원우의 볼을 꽉 잡고 한껏 축축해진 눈빛으로 그윽하게 불렀다. 원우는 벌써부터 재밌어서 킥킥대고 웃기 시작했다.

“너 어렸을 때 진짜 예쁘더라.”

“몇 번이나 말하는 거예요. 그래도 지금이 더 좋죠?”

“나야 옆에 있는 채원우가 좋지.”

“내가 지금 그 나이였으면…….”

“그럼 이런 일 절대 못 하니까 안 돼. 아니지, 아예 그럴 마음이 안 들었을 거야. 난 도덕적인 사람이거든.”

“아, 그래요? 근데 안됐다. 난 그런 거 별로 없는데. 나는 하루하루 날짜만 손꼽았을걸요. 얼른 커서 형 잡아먹을 생각만 했을 거야.”

“지금 내 나이랑 조금 전 만났던 어린 채원우랑 붙으면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는데. 너 다 자라면 나 중년이야.”

“뭐 어때서요. 나이가 중요한가?”

벽에 기댄 채 앞은 백겸에게 갇혀 있던 원우가 손을 뻗어서 백겸의 엉덩이를 잡았다. 갇힌 게 아니라 자진해서 벽과 백겸의 사이에 낀 것만 같았다.

“나이는 좆도 중요하지 않아요,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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