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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113화 (11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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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4

뒤돌아보니 아주 어색하게 총을 쥐고 있는 어린 채원우가 보였다. 내가 아는 원우는 손으로 몬스터를 찢는데……. 귀엽다. 게다가 안전장치도 풀지 않은 채였다. 차라리 저게 낫긴 했다. 실수가 생기는 것보다야.

“원우야.”

“네, 네?”

“이리 와.”

백겸이 손으로 원우를 불렀다. 테이블 위에는 이런저런 음식들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가 원했던 음료수와 간식들이었다. 채원우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백겸은 어린 원우가 사고를 치기 전에 총을 받아서 허리에 찼다.

“……저거 비비탄 총이었죠?”

“그런 걸 왜 들고 다니겠니.”

혀를 쯧쯧 차고는 채원우를 앞세웠다. 손으로 초코바 껍질을 까서 내밀자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도 잡았다. 원우가 먹기 전에 백겸이 먼저 입으로 물었다.

고갤 숙이며 초코바를 물고 눈을 치켜뜨자 원우의 동그랗게 뜬 눈과 마주쳤다. 웃어주니 채원우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눈웃음이 별로였나 보다.

다 큰 너는 이거 좋아해. 백겸이 속으로 비밀을 삼켰다.

“먹어도 되겠다.”

우물거리며 내린 판단이었다. 그간 토끼굴을 다니면서 체득한 게 있다. 던전이 모양새만 흉내 낸 경우에는 맛이 없었다.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먹는 건 혀가 살살 녹는 단맛이 진하게 났다. 진짜 초코바였다.

“괜찮아. 먹을 수 있어.”

역시 어린 채원우도 배가 고팠는지 곧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지금 이 나이대의 채원우는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마냥 여유롭진 않은 것 같다. 자세히 보니 옷도 사실 좀 낡았고 머리도 더벅머리였다.

대체 어떤 게 채원우에게 좋은 선택이 될지 모르겠다. 헌터청에 가는 게 나은 건지, 아니면 혼자 살아가는 게 좋은 건지. 어느 방향이든 우리가 만나는 현실까지 무사히 오기만 해라. 백겸이 아직도 걸고 있는 다양한 종교의 팔찌에 대고 할 수 있는 기도는 이 정도뿐이었다.

“형도 더 드세요.”

착한 원우가 눈을 똘망 똘망 뜨고는 컵을 밀었다. 컵에 탄산음료가 가득 따라져 있는 센스까지. 정말로 이상한 던전이었다.

앉을 의자까지 있으면 좋겠는데.

백겸이 그 생각을 하자마자 갑자기 의자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어린 원우와 백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봤다가 의자를 보기를 반복했다. 의자의 앉는 부분에 ‘SIT ME’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맞는 영어야?”

투덜거리기 무섭게 갑자기 다섯 개의 알파벳이 사라졌다.

“…….”

“던전치고는 소심하네.”

중얼거리고는 원우를 자리에 앉혔다. 뒤이어 백겸도 앉다가 뭐가 이상한지 깨달았다. 이거 완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네. 앨리스 따라 한 거 아냐? 웃다가 컵을 보니 양각으로 ‘DRINK ME’라고 적혀 있었다.

“이 정도로 따라 한다고?”

어이가 없었다. 그 때 원우가 갑자기 길게 하품을 했다.

“졸려, 원우야?”

눈을 비비며 끄덕이는 모습이 아주아주 귀여웠다. 절로 웃음이 났다.

“좀 더 가야 할 것 같은데.”

“조금만 쉬었다가 가면 안 돼요?”

“그건 상관없는데, 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졸아?”

“형……이 저한테 나쁜 일을 할 리가 없을 것 같아요.”

“…….”

“형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래?”

“형 좋은 사람이에요……. 좋아요…….”

어린애는 어린애인지 원우는 웅얼거린 끝에 고갤 꾸벅거리면서 아예 마음먹고 졸기 시작했다.

조금 전처럼 안아서 이동해도 상관없었지만, 마음 놓고 저렇게 조는 모습을 보니까 깨우고 싶지 않았다. 채원우가 백겸의 앞에서 깊게 잠들기 시작한 지 조금 되긴 했다. 하지만 원우의 자는 모습은 보아도 보아도 부족했다.

게다가 헌터청에서의 경험들을 겪지 않은 상태에서 조는 건 더 평화로워 보여, 조금도 부수고 싶지 않았다.

손깍지를 끼고 원우를 보고 있던 백겸도 느리게 하품을 했다. 졸음은 전염성이라더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이마를 괴고 새근새근 소리가 나도록 조는 원우를 보다가 백겸 역시 천천히 눈이 감겼다.

* * *

교복을 입은 백겸과 채원우 팀은 그사이 오로지 원우의 감으로 걷고 있었다.

“형.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어요?”

“모르는데.”

대답 한번 당당했다. 백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원우를 보았지만, 원우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확신인지 계속 걷고 있었다. 백겸은 조용히 한숨을 쉬며 속으로만 생각했다.

‘겉은 화려한데 속은 꼴통이구나.’

이상하게도 여기 오기 직전의 지진과 학교가 무너지던 풍경은 확실히 기억이 나는데, 그전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심지어 또렷하게 기억나던 직전의 기억마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백겸은 불안함에 고갤 떨궜다. 그러자 갑자기 원우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더니 양손으로 백겸의 얼굴을 감싸 들어 올렸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꼴통에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이상할 만큼 자신에게만은 신경 쓰는 형이었다. 신경 써주는 방식이 좀 직접적이라서 그렇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형, 뭐 해요?”

“열 재는데.”

우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랫입술과 턱으로 백겸의 이마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입술로 열을 잰다고? 백겸은 조금 기겁했다. 엄마나 쓰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도 아니고 오늘, 지금 막 만난 형이 이런다고? 게다가 거침이 없었다.

“이렇게요?”

“왜? 이상해?”

바로 이 이상한 방법을 양백겸에게 배운 채원우가 멀뚱히 물었다.

“아, 아니, 이상한 건 아닌데……. 좀 너무 붙은 느낌이라…….”

“괜찮아. 적응해.”

‘내가 안 괜찮다고…….’

백겸이 속으로 난처해 하든 말든 제 볼일을 다 본 원우는 흡족한 표정으로 얼굴을 뗐다.

“열은 없네. 가자. 어쩐지 점점 다 와가는 거 같아.”

“어디로요? 출구로요?”

“아니. 너에게로.”

“…….”

대체 무슨 소리지? 백겸은 물으려다가 말았다. 이 사람은 정말로 독특하고 괴상하지만, 그렇다고 아직까진 틀린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자신감 있게 걷다가 갑자기 원우가 발을 뚝 멈췄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어린 백겸이 몸을 웅크리며 눈치를 보니 뚱한 표정의 원우가 잡고 있던 손을 도로 내밀었다.

“잘 잡아. 놓지 말고. 세게 꽉.”

“…….”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예쁜데 미쳤네, 안타깝다.

어린 백겸은 백겸이 원우에게 가졌던 첫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을 남기며 손을 옷에 문질렀다. 땀도 안 났지만 자꾸 미끄러지는 게 싫은 모양이니 흉내라도 내준 거다. 어린 백겸의 추측대로 원우는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한 채로 다시 가던 길을 떠났다.

원우는 어린 백겸에게는 설명하지도 않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안개를 조금씩 거둬냈다. 혹시라도 코앞에 돌부리가 있다면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만 치웠기 때문에 백겸은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이 깨끗한 스튜디오 같은 공간에 돌부리가 있을 리도 없지만, 또 있어서도 안 된단 채원우 식의 과보호는 어린 백겸이기 때문에 유독 잘 통하는 거기도 했다. 만약 원래의 백겸이라면 이미 앞서 나갔을 거다.

연인 생각에 웃음이 나는 원우를 보던 어린 백겸이 조용히 물었다.

“뭐 재밌는 생각 하셨어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내가 우스운 행동을 한 건 아니겠지, 하는 사춘기 소년다운 자의식 넘치는 걱정이었다. 그런 섬세함 따위 모르는 원우는 백겸을 돌아보며 정답을 말했다.

“네 생각 했어.”

작업 멘트도 아니고 둘러대는 말도 아니어서 그 무게는 사춘기 소년에게 무척 무겁게 다가왔다.

“혀, 형은 성인이고 저는 미성년잔데요.”

“……? 아는데.”

채원우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어린 백겸은 아주 귀엽지만, 그래도 역시 던전의 부산물이라는 확신만 커지고 있던 참이다.

진짜 양백겸과는 확실히 달랐다. 외모는 똑같은데도 이 어린 백겸과 진짜 양백겸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나 마음에서부터 그 차이점이 생겼다.

‘백겸이 형이 잘못되는 일이 생기면 난 따라 죽는 수밖에 없겠다. 대체품으론 절대 안 되겠어.’

이 비뚤어진 사랑을 눈치챌 사람이 없다는 게 양백겸의 행운이자 불행이란 걸 누가 알까.

그 때 채원우의 시야에 이물질이 들어왔다. 세 개의 덩어리였는데 모양이 불분명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실루엣이 미동을 하는지 안 하는지 지켜보는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몬스터인가?”

“네? 뭐요? 몬스터?”

원우는 당황한 백겸을 자기 뒤에 세우고 손등끼리 맞닿도록 팔을 모았다가 양옆으로 확 벌렸다. 커튼을 한꺼번에 젖히는 듯한 제스처와 함께 안개들이 순식간에 옆으로 떠밀려 얇은 물벽이 되었다.

“와……. 이게 어떻게…….”

어린 백겸이 놀람 반 감탄 반으로 탄성을 뱉는 사이에 채원우는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뛰쳐나갔을 거다, 백겸이 갑자기 자신을 잡지 않았더라면.

“저, 저기요. 형!”

원우가 약간의 짜증을 담아 돌아봤을 때, 어린 백겸은 천천히 흐려지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한 거예요?”

자기가 흐려지고 있단 사실조차 모르는 순진무구한 표정에 원우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리 가짜란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꼭 닮은 것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걸 보는 게 괜찮을 리 없었다.

채원우는 창백해진 얼굴로 어린 백겸의 어깰 꽉 움켜쥐었다. 소름 끼치게도, 사람이 아니라 단단한 젤리를 잡은 것처럼 손에서 물컹거렸다.

“형은 마법사 같은 거예요? 우리 세상이 판타지처럼 바뀐 거예요?”

바보 같은 소릴 하는데도 전혀 짜증 나지 않는 건 아무리 그래도 어린 백겸이기 때문일 거다. 아무리 한때의 신기루여도 그게 양백겸의 모습이니까……. 채원우는 그답지 않게 눈앞의 존재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어린 백겸이었다. 본인은 몰라도 가족을 막 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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