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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3
한 번 시작되니 꼬릴 잡고 연이어지는 잊고 있던 기억에 백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지간해서는 당황하지 않는 백겸만 알던 채원우는 그 모습이 묘해서 흥미롭게 바라봤다.
곧 백겸이 들었던 손도 툭 떨어졌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을 물끄러미 보던 원우가 가만히 혀끝으로 볼 안쪽을 핥았다. 연약한 양백겸이라니. 낯설면서도 꼴렸다. 채원우의 정제되지 않은 모럴리티가 여기서 또 빛을 발했다.
“학교가 부서졌어? 갑자기 먼지가 났고? 혹시 반짝이는 공기는 못 봤어?”
“어어……?”
어린 백겸이 당황해선 더듬거렸다. 원우는 화사하게 웃었다.
“그게 던전이야. 그리고 형은 그날 이후로…….”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되어 살다가 가이드가 되어 나를 만나지.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다.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채원우가 이 순간 갑자기 입을 꽉 다문 이유는, 혹시라도 이 백겸이 정말로 과거의 백겸이라서, 다시 원래의 타임라인에 돌아간 순간 채원우라는 존재에 안 좋은 인식이 생길까 봐서였다.
양백겸은 보호해 주고 싶은 채원우를 좋아한다. 그걸 위해서 원우는 자신이 아직도 괴물인 데다가, 사실은 이전보다 더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꽁꽁 숨기고 있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여기서 둘의 관계를 망칠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로도 잘 살아갈 수 있지?”
“…….”
“오늘 있는 일 같은 건 모두 잊고…….”
“형도 잊어야 해요?”
형. 형이라니!
채원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싸맸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듣기 좋은 소리였다. 원우가 싱글벙글해서 사방에 꽃을 흩뿌리는 것 같은 얼굴로 다시 부탁했다.
“형이라고 한 번 더 불러주면 안 돼? 형이 나를 잊을 수도 있으니까.”
“……형이 저를 형이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아, 맞다. 미안. 그럼.”
원우는 잠깐 망설였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을 깨물며 웃는 행동이 무슨 아이돌 같아서 백겸은 멍하니 바라만 봤다. 원우의 생각에, 어느 나이고 백겸은 채원우의 얼굴에 약한 게 분명했다. 원우는 생전 관심 한번 없던 자신의 얼굴에 감사하며, 돌아가면 다시 팩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백겸아.”
참고 참았던 이름을 뱉은 순간 원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양심의 가책 없이 너의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너는 가이드로 살아가야 하며,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다 말하려던 천하의 개새끼는 어디로 가고 오로지 순정에 빠진 악당만 남아 있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백겸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원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형도 저랑 같은 일을 겪은 거죠? 그 지진 이후로 우리가 여기 안으로 끌려 들어온 거죠?”
자진해서 들어왔고 지진 같은 건 없었다. 채원우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걸 어린 백겸은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럼 저랑 같이 나가요. 나가서 저희 부모님도 찾고 해요. 제 도, 동생도 있거든요. 걔도 찾아야 해요.”
이미 없는 사람들을 찾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러면서도 울지 않고 걷는 게 자신이 아는 양백겸다웠다. 이게 백겸일 리 없는데도 백겸이라면 딱 이랬을 것 같다.
원우는 오히려 본인이 끌려가는 꼴이 되어도 묵묵히 쫓아갔다. 대신 그는 안개를 조금 거두고 응집한 물방울을 천천히 흩뿌렸다.
“어……. 무지개다.”
백겸이 조용히 감탄했다. 빛이 물방울에 산란하며 생긴 환상에 불과한데도 사람들은 이런 걸 보면 꼭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예를 들어서 행운의 징조라거나 일이 잘 풀릴 것 같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채원우는 그런 소릴 하는 사람들이 모조리 멍청이 천치라고 생각했지만,
“왠지 우리 곧 나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자신을 향해 돌아보는 백겸까지 그렇게 보일 리는 없었다. 게다가 저런 반응을 기대하며 만든 무지개이기도 했다. 백겸은 의외로 목가적인 삶을 사랑했으니까.
희망찬 말과 태도는 지금 그가 알고 있는 백겸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래도 원우는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혹시라도 길을 잃어버릴까 봐.”
엄청나게 태연하게 말한 덕에 어린 백겸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눈을 끔뻑이며 보다가 원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요즘엔 부모님 손도 이렇게 안 잡는데.”
“난 부모님이 아니잖아.”
싱긋 웃으며 하는 소리가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억지인 것 같기도 했다. 잘생기긴 했지만 어쩐지 이상한 사람 같아서 백겸이 손을 빼려는데, 원우가 그걸 꽉 움켜쥐어서 빼내지 못하게 했다.
백겸이 가이드로 발현된 게 던전 브레이크와 동시였으니, 본인은 몰라도 지금 백겸은 가이드였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보다 더 강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망정이지, 만약 18살의 백겸이었다면 원우의 악력에 손이 부풀었을 거다.
“형, 아니, 백겸아.”
이름을 부르는 것에 조용히 짜릿함을 느끼며 원우가 속삭였다. 꿀을 바른 뱀의 소리처럼 달콤했다.
“넌 특별해.”
“……뭐야. 사이비였어요, 형?”
원우가 사이비? 하고 되물었다. 그 목소리가 맹하니 공허해서 백겸은 진짜 사이비인가 싶어 손을 뺐다. 시도만 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원우가 강하게 잡고 있어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이빈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종교는 없어. 그런데 사이비에서 이런 말을 해? 넌 특별하다고?”
“네……. 관상이 좋다고도 하고 기가 좋다고도 하죠.”
“그래? 걔네도 헌터청에서 나왔나?”
“형,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혹시 오타쿠예요?”
“그건 또 뭔데?”
백겸과 원우의 대화가 통하는 건 아무래도 둘 중 하나라도 많은 성숙기를 겪은 후에 가능할 모양이었다. 어쩐지 낯설지 않게, 이번에도 백겸이 고갤 젓고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니에요. 우리 서로 다른 이야기 하는 것 같아요…….”
“그래? 난 같은 이야기인데.”
“…….”
“네가 특별해서 나중에 헌터청이란 곳과 일하게 될지도 몰라.”
놀랍게도 이 순간 다른 곳에 있던 양백겸과 어린 채원우 역시 이런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백겸은 원우에게 너의 특별함을 어떻게든 숨기라고 하고 있었고, 이곳의 원우는…….
“그럼 쫓아가.”
속눈썹 덕분에 특히 더 화려해 보이는 눈웃음을 치며 속살거렸다.
“너와 적성이 잘 맞을 거야. 그곳으로 가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살아남기만 하면 다 돼.”
“살아남는단 말은 죽을 수도 있단 거 아니에요?”
“우리 백겸이 형은 똑똑하네, 역시.”
“그럼 안 좋은 곳 아닌가요? 왜 저를 그곳으로 보내려는…….”
“거기서 네가 누군가를 만나거든. 그게 중요해.”
채원우는 미래를 망칠 수도 있단 가능성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망칠 리 없다. 그의 사고방식은 아주 간단했다. 둘 중 하나라도 죽지만 않으면 된다.
게다가 중간에 한 번 백겸을 놓아줘도 봤지 않나.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양백겸이 없어 자신은 폭주 끝에 죽을 뻔했고 양백겸도 그다지 즐거운 삶을 산 것 같지도 않으니까.
채원우는 논리를 배운 적이 없는 괴짜답게, 크게 비약을 해서 결국 우리는 만날 운명이란 결론을 내려버렸다.
“만나지 못한다면요……?”
백겸은 묘하게 확신에 찬 원우에게 조심스럽게 꼬아 물었다. 양백겸은 현실적인 사람이었고 채원우의 확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 하나만 잘못해도 인생은 바뀔 수 있다. 아주 약간만 틀어서 그려도 완전히 멀어져서 영영 닿을 수 없게 되는 평행선처럼 말이다.
“내가 찾을 거야.”
하지만 채원우는 낭만이 없는 운명론자였다. 낭만이 없는데도 운명론자가 될 수 있었다. 본인이 해내면 되니까.
채원우는 예쁘장한 생김새와 다르게 커다랗고 남자다운 손으로 백겸의 볼을 감쌌다.
“형을 찾는 건 쉬워. 난 항상 형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자신보다 큰 데다가 분명 나이도 더 많아 보이는데, 자꾸만 형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예쁜 남자의 눈은 묘하게 반짝거렸다. 그게 안개 속에서 나타난 독특한 현상이라는 것도 모른 채 양백겸은 고갤 끄덕였다.
홀리고 만 거다. 현실적이지만 낭만이 있는 바람에.
* * *
한편 양백겸과 어린 원우 팀.
백겸이 어린 원우를 안고 아무리 걸어도 바다 위를 걷는 것처럼 끝이 없었다.
‘아오. 배고파. 목도 마르고.’
백겸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팔이 아픈 건 아닌데 목이 마르긴 했다. 애초에 일찍 끝날 줄 알고 쉬지 않고 들어온 게 문제였다.
‘지금 탄산음료랑 초코바 하나만 먹어도 좋을 텐데.’
신진대사가 왕성한 가이드는 쉽게 배가 고파진다. 머릿속에 온갖 고열량 음식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입맛을 다시는데, 그 순간 갑자기 안개 속에서 신기루처럼 테이블이 나타났다.
“어?”
처음에는 환상을 보는 줄 알았다. 혹은 사물형 몬스터일 수도 있단 생각을 했다. 빠르게 원우를 내려 자신의 뒤에 세우고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원형 상판에 덩굴 모양의 고상한 받침을 가진 흰색 정원용 테이블은 움직이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지, 진짜인가?”
“왜요? 뭔데요?”
“잠깐만 원우야. 이거 가지고 있어.”
“어? 이거 지, 진짜예요?”
와. 우리 원우가 고작 총 가지고 말을 다 더듬네……. 백겸은 상황에 안 맞게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에 빠졌다. 잠깐 촉촉한 눈을 하고는 원우의 보드라운 머리를 쓸어 넘겨주곤 테이블로 향했다.
백겸이 든 것은 진압봉이었다. 근접전투를 할 경우에는 총보다 타격을 줄 수 있는 무기나 검을 드는 것이 나았다. 백겸은 테이블 옆으로 다가가 봉 끝으로 건드렸다. 초조함에 식은땀이 찔끔 났다.
“…….”
주의를 기울여서 세 번째로 건드린 끝에도 테이블은 미동도 없었다. 미동도 없이 딱딱하기만 했다. 아예 이곳에는 몬스터 자체가 없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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