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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2
“저를 왜 이용하려고 해요……?”
“네가 특별해서.”
특별함과 비범함은 포스트 던전 브레이크 시대에는 저주였다. 이전에는 재능이란 게 꽃피워야 하는 씨앗이었다면, 이제 재능은 평가되고 등급으로 나누어진 뒤 기관에 소속되어 수확되어야 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나이는 그 앞에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특별하니까.
어린 채원우는 가만히 고갤 끄덕이다가 다시 백겸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은 어떻게 아세요? 혹시 그 사람 중 한 명이 형이에요? 절 이용하려는 사람……?”
“…….”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기 때문이다. 백겸이 채원우를 이용하려던 건 맞다. 하지만 또 ‘채원우’를 이용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목표로 가는 길목에 네가 있었던 거다. 그리고 백겸은 그 돌부리에 제대로 걸려 넘어져서, 아예 길이 바뀌었을 뿐이다.
만약 그냥 채원우였다면 서로 패를 다 깐 사이에 뭘 더 숨기겠냐고 톡 까놓고 말했겠지만, 이 눈이 호수처럼 큰 어린 채원우 앞에서까지 그런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목이 바싹바싹 말랐다.
“……널 이용하던 사람들 속에서 너를 만났어.”
귀에 붙이면 귀걸이 코에 붙이면 코걸이가 될 소리였다. 어린 채원우가 백겸을 빤히 바라봤다. 정말로 빠안히. 자신을 보는 그 눈빛에 속이 뜨끔뜨끔했다.
곧 어린 채원우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한없이 길어졌다.
사실 시간이 많이 지난 건 아닌데, 찔리고 불편한 백겸이 시간이 길게 가는 것처럼 느낄 뿐이었다.
이제는 이 방향이 옳은 느낌을 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몹시 피곤하게 느껴져서 백겸이 우뚝 섰을 때, 어린 채원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럼 전 그냥 그 사람들한테 갈래요.”
“어, 어……?”
“그래야 형을 만난다면서요. 그러면 저는 그냥 가볼래요.”
“……내가 누군지 얼마나 안다고.”
“그건 모르지만 제 느낌은 알아요. 형은 나쁜 사람 아니에요.”
“…….”
“그리고 저는 형을 좋아할 거예요.”
아, 진짜. 울지 않기로 했는데. 솔직히 백겸은 눈물이 많은 성격도 아니었다. 가족을 잃고 처음으로 파트너를 잃은 뒤로는 배가 뚫려도 눈물은 흘리지 않고 참아 왔다. 최근에 울었던 건 모두 채원우 때문이었다. 어린 채원우도 마찬가지였다.
“넌 내가 뭐가 좋냐?”
백겸이 일부러 퉁명스럽게 물었다. 좀 너무한다 싶은 말투인데도 채원우는 무던하게 음, 하고 느릿느릿 대답했다. 어릴 때도 이런 건 똑같았구나.
“좋은 데 이유가 있어요? 그냥 형 옆에 있으면 안전하게 느껴져요. 그리고…….”
“……”
“지금은 제가 작지만 나중엔 형을 안아보고 싶어요. 언젠간 제가 더 커질 날이 올 수도 있잖아요.”
“까부네.”
비웃었지만, 뜨끔했다. 미래를 엿보기라도 했나? 채원우는 어쨌든 손도 키도 나보다 크긴 컸으니까. 거기…… 사정도 그랬고.
“넌 나보나 커질 일 없어.”
어린애한테 이 정도 거짓말은 괜찮겠지……? 하지만 채원우가 또 백겸을 빤히 봤다. 아, 정말. 눈이 너무 커서 쏟아질 거 같다. 내 양심을 막 벅벅 긁네.
“근데 형 이름은 뭐예요?”
괜히 시선을 피하다가 쿡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고갤 돌렸다. 혹시 채원우의 과거를 만나고 있는 거라면, 내 이름을 말하는 순간 미래가 잘못되는 거 아닌가?
백겸은 복잡한 시간여행의 공식을 떠올려 봤다. 근데 그럴 거면 애초에 특별한 능력 이야기 같은 건 말을 꺼내지도 말았어야 했다.
고작 이름 석 자였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정도로 채원우의 인생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자의식 과잉에 불과했다.
“양백겸.”
그래서 백겸은 자신에게조차 낯선 이름을 읊었다.
“난 양백겸이야, 원우야.”
기분이 새롭다. 우리의 첫 만남이 솔직히, 그다지 좋진 않았으니까. 마치 이게 우리의 첫 만남 같잖아.
내가 이런 특별한 순간을 누리고 있는데 내 채원우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런 걱정이 백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상하게 그가 크게 위험하거나 할 것 같진 않았다.
따끈따끈한 채원우를 안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서 찾아야지. 곧 만나자, 우리.
* * *
채원우는 이 던전이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백겸보다 이르게 알아차렸다. 백겸의 몸 어느 부분이든 익숙했기 때문이다. 약간의 위화감만으로도 차이점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안개가 장난질을 하며 잡고 있던 손을 바꿔치기 했다는 건 바로 눈치챘다. 문제는 대응 방법을 생각하기 전에 이미 백겸이 사라지고, 채원우가 잡고 있던 손도 사라졌다는 거다.
“짜증 나네.”
채원우는 곤란하지도 않았고 겁을 먹지도 않았다. 그냥 짜증이 났다. 채원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 모습을 채원우와 제법 친해진 토끼굴의 몬스터들이 봤더라면 슬금슬금 피했을 거다.
채원우는 백겸의 앞에선 절대 보여주지 않을 냉소를 지으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고갤 살짝 숙였다. 필드로 따지면 이곳은 물의 영역이었다. 사실 물이 없는 사막이어도 상관없지만…….
채원우는 주변에 백겸이 없는 걸 확신하고 손을 들었다. 항복 선언을 한 것 같은 자세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그를 중심으로 반경 100m가량까지 안개가 합쳐지며 물방울처럼 변했다. 시야가 확보되었으나 그 안에 백겸은 없었다.
“공간을 아예 갈라놓은 거 같은데.”
중얼거린 그가 다시 손을 내리자 물방울은 도로 안개로 바뀌었다. 안개로 바꾼 것도 그의 힘이었다. 헌터청에서 안다면 땅을 치고 안타까워할 진짜 미지수의 인재가 이곳에 있었다.
채원우가 폭주한 이후로 감정할 수 없는 능력과, 이전에는 없던 안정성까지 지니게 되었단 걸 알면 헌터청은 헌터들을 강제로 폭주하게 만드는 실험을 할 수도 있다. 한계라는 뚜껑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지니면서. 그러면 정말로 세상은 망하겠지.
사실 채원우는 세상이 망하든 말든 상관이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양백겸과 사는 삶이 너무 좋아서 이왕이면 꽤 오래 지속되었으면 했다. 백겸과 쇼핑을 하는 것도, 라면을 끓여 먹는 것도 좋으니까.
그 증거로 지금 채원우는 이곳이 지루해 죽겠다. 우중충하게 안개가 껴서 그런 게 아니다. 채원우는 날씨 같은 것으로 기분이 바뀌거나 하지 않는다. 그에게 영향을 주는 건 오로지 양백겸밖에 없었다.
양백겸이 곁에서 사라지니, 오랜만에 몸을 좀 움직인단 생각에 조금 설레기까지 했던 새로운 던전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채원우는 일단은 귀를 한껏 곤두세운 채 천천히 걸었다. 방향 감각을 잃기 쉬워서 조심해야 했다. 그러다가 우뚝 섰다. 양백겸의 인기척을 듣기 위해 한껏 집중했던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서였다.
이번에는 채원우가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도 주변 안개가 응집되어 물방울로 바뀌었다. 그리고 까드득 소리를 내면서 스크류 나사처럼 돌아가 앞이 뾰족하게 되었다. 수십, 아니, 어쩌면 수백 개의 물방울이 그렇게 한 방향을 가리켰다.
원우는 이번엔 주변 반경 1m의 안개만 이렇게 바꿨다. 혹시라도 앞에 있는 것이 백겸이라면 얼른 이것들을 치워버려야 하니까. 사실 자신을 가리기 위해 남겨둔 안개 너머로 아직 정체를 모를 존재를 응시했다.
체구는 백겸보다 왜소했고 키도 좀 더 작았다. 평균보다는 크지만 백겸과 채원우의 기준으로는 작았다. 다른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자마자 채원우가 고갤 까딱였다.
순간 안개가 뒤로 훅 밀려났다. 순식간에 깨끗해진 공간 속에 드러난 모습에 채원우는…….
“……백겸이 형?”
너무 놀라 그만 물방울들을 모두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우수수 떨어지는 무수한 물방울 속에 무지개가 맺혔다. 교복을 입고 있는 어린 양백겸이 환상처럼 어른거렸다.
어린 백겸과 채원우가 만난 건, 공교롭게도 백겸이 어린 채원우와 만난 것과 정확히 같은 때였다. 그러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백겸은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도 전에 채원우를 만지고 말았지만 채원우는 그러지 않았다.
처음에야 동요했지만 이후로는 아니었다. 일단 백겸이 아주 어린 게 아니라 교복을 입을 정도로 자란 버전이라는 점도 영향을 줬을 거다. 백겸부터가 원우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누구세요?”
어림짐작으로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백겸이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채원우는 이번에도 백겸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양백겸 애인.”
“……제가 양백겸인데요?”
“그래 보이네. 몬스터가 수작 부리는 것만 아니라면.”
“그런데 제 애인이라고요……?”
“어.”
“제가 남자랑…… 사귄다고요?”
아무래도 어렸을 때 백겸은 동성과의 연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생각도 안 해본 일을 하게 만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차올라서 채원우는 씩 웃었다. 그 미소가 그린 것처럼 아름다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교복을 입은 백겸은 저도 모르게 채원우를 멍하니 보고 말았다.
“이, 일단은…… 여긴 어디예요?”
“던전.”
“던전이요? 게임에 나오는 그거? 여기가요?”
“정말로 몰라? 정말 몰라?”
갑자기 채원우가 성큼 다가갔다. 보폭이 넓은 만큼 거리가 좁혀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백겸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어렸을 때 배운 태권도 겨루기 자세였다.
원우는 그런 백겸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같잖기도 해서 계속 픽픽 웃었다.
“왜 자꾸 웃으세요?”
“아니. 귀여워서.”
“저는 웃을 기분이 아닌데요…….”
중얼거리던 백겸이 갑자기 고갤 들었다. 까먹고 있던 일이 떠올랐는지 양눈도 커다랗게 뜬 상태였다.
“지, 지진이 났었어요. 가족들한테 전화를, 해, 해야 하는데……! 뒤에서 갑자기 먼지가 나고 하, 학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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