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110화 (111/121)

(10)============================================================

외전 11

“……다행이다.”

손에 축축한 게 만져지진 않고, 혹으로 이어질 것처럼 부풀어서 욱씬거리는 정도만 느껴졌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에 천천히 주머니를 뒤적였다.

“진짜 이걸 쓰게 될 줄 몰랐는데.”

머쓱하게 꺼낸 건 손바닥끼리 부딪치는 장난감이었다. 버튼을 눌러서 짝! 짝! 소리를 내자 그 소리가 공허하게 퍼졌다가 돌아왔다. 마치 인테리어를 하기 전의, 커다란 돔형 쇼핑몰 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짝! 짝! 짝!

그렇게 세 번을 더 반복해서 쳤다. 돌아오는 답은 여전히 없었다. 벽에 부딪혀서 돌아오는 소리만 공허하게 날 뿐이었다.

“미치겠네.”

백겸은 자신의 몸 상태보다 채원우에 대한 걱정이 압도적으로 몰려왔다.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거나,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단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채원우. 자신과 비등하게 약해져 버린 채원우만 생각이 났다.

“미치겠다, 진짜로.”

백겸은 얼굴을 마구 문지르다가 아예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픈 머리와 바닥에 떨어지며 저도 모르게 쓸렸는지 따끔거리는 손바닥까지……. 상황은 최악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초조함과 긴장은 사실 이성적 생각에 좋지 못했다. 진정해야만 했다. 진정을 해야만…… 방법이……. 원우가…….

입술을 마구 씹고 있는데 자신의 심장 박동만 크게 울리던 귀로 아주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백겸은 고갤 번쩍 들고 아픔을 잊은 채 무릎으로 섰다.

“…….”

생 침까지 삼켜가며 긴장에 휩싸여 저쪽을 보고 있는데, 천천히 누군가의 인영이 나타났다. 채원우일까? 하지만 실루엣이…… 너무…….

“거기 누구세요?”

너무 작고,

“누구 있어요?”

너무 어린…….

“채원우?”

백겸은 그만 입을 떡 벌린 채 중얼거렸다.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자신의 허리에 겨우 닿을까 싶은, 작고 아주 예쁜…… 어린 채원우였다.

백겸과 백겸의 허리쯤 오는 어린 채원우는 잠시 서로를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어린 채원우는 긴 속눈썹에 커다란 눈,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커다란 검은자위와 오밀조밀 촉촉한 붉은 입술, 그리고 우윳빛깔이 도는 뽀얀 뺨을 지닌, 말 그대로 천사 같은 얼굴이었다.

백겸은 당황해서 입을 떡 벌리고 내가 보고 있는 게 환상이 아닌가 팔뚝 안쪽을 열심히 꼬집어봐야만 했다. 엄청나게 아팠다. 다음으로는 저기 선 게 인형이나 몬스터가 아닌가 확인해야만 했다.

그런데 너무……. 사진으로 봤던 어린 채원우보다 더 어려 보이는 애잖아…….

“헉. 설마.”

조용히 비명을 삼켰다. 설마 이 안개로 인해 채원우가 갑자기 어려졌다거나 한 게 아닐까 싶어서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바닥을 짚고 넘어질 것처럼 일어나선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게 몬스터인지 아닌지 확인하기도 전에 손을 갖다 대는 무모한 짓을 해버렸다.

“……채원우. 원우야?”

아이의 볼은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말랑거렸다. 몬스터들은 기본적으로 체온이 아주 낮거나 아주 높았다. 그러나 어린 채원우의 체온은 백겸의 손에 딱 맞았다.

“형은…… 누구세요? 누구신데 제 이름을 아세요?”

“너 정말 채원우 맞아? 몬스터나…… 환각 그런 거 아니지?”

“몬스터요? 환각이요?”

채원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혹시? 혹시나? 치솟는 물음표에 정색하고 조용히 물었다.

“너 지금 몇 살이야?”

“저요? 열한 살이요…….”

세상에. 열한 살이라면 던전이 터지기 전이었다. 던전이 터지지 않았고, 당연히 채원우도 능력이 발휘되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헌터청에서의 고통스러운 과거 같은 것도 지금 앞에 있는 채원우에게는 없는 이야기일 거다.

인생의 구김이라곤 없던 시기의 채원우,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데…….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세상이 지금 백겸의 눈앞에 펼쳐졌다.

“너 왜 여기에 있어……?”

백겸은 동생에게도 건네본 적 없는 목소리로, 아주 조용히 물었다. 최대한 다정하게 목소리를 내보려고 했다. 소용이 있었을까?

헌터청에 들어온 이후의 채원우는 감정에 두꺼운 가죽이 하나 덮여진 것처럼 무던했지만, 백겸은 이전의 채원우는 어떤지 알지 못했다. 울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앞섰다.

“혹시 길을 잃어버렸어?”

아, 왜 울음이 날 것 같냐. 운다면 쪽팔릴 일이었고 애기 채원우를 겁먹게 하는 일밖엔 안 되었다.

백겸이 눈에 힘을 바짝 주고 채원우에게 소곤거리는 한편, 언제고 가짜 채원우가 정체를 드러내고 옆구리나 등을 공격할지 모른단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가짜일지 진짜 아기일지 모를 채원우가 대답했다.

“그냥 이곳에 오면 될 것 같았어요. 눈 떠보니 이런 곳이라 무서운데 이 방향으로 오면 다 괜찮아질 것 같아서……. 그랬더니 형이 있었어요.”

곧 채원우는 눈치를 보며 한마디를 덧붙이는데 그 모습이 여간 사랑스러운 게 아니었다.

“안 되나요?”

안 되긴. 다 돼. 세상도 줄게.

백겸은 아주 발칙한 생각을 하면서 채원우의 손을 꽉 쥐었다. 이게 채원우가 어려진 거든, 아니면 또 하나의 어린 채원우든 상관없다. 고통스러운 일이라곤 겪어본 적 없는 채원우. 지켜주고 싶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얘를 데리고 우리의 토끼굴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린 채원우는 느릿느릿 걸었다. 역시 어린애의 보폭은 좁았고, 까마득한 옛날이다 못해 전생 같이만 느껴지던 과거에 동생을 데리고 다니던 경험은,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동안 백겸은 남과 보폭을 맞춰 걷는 것보다 혼자 앞서가던 것에만 익숙해진 거다.

“내가 안아줘도 돼?”

결국 채원우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어린 채원우는 볼이 통통해서 그런지 입술이 병아리 부리처럼 톡 나와 있었는데 고민에 빠지니 그 입술이 더욱 뾰족하게 나왔다.

미치겠다. 너무 귀엽다. 처음으로 채원우의 2세가 궁금해졌고 갖고 싶어졌다. 물론 그러려면 채원우가 다른 사람을 만나야겠지. 그건 또 절대 용납 못 하니까 지금 이 모습이 눈에 박히도록 보는 수밖에 없겠다……. 백겸의 주접이 자꾸만 길어졌다.

잠깐 고민을 하던 채원우는 백겸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어린아이치고는 긴 팔을 쭉 내밀었다. 감동이 밀려왔다.

“잠깐만. 형이 좀 주책이라.”

백겸이 눈을 가리고 숨을 골랐다. 진짜 귀엽다. 정말로 사랑스럽다. 마음이 저릿저릿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에 채원우의 팔 아래에 손을 넣고 껴안아 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볼에 뽀뽀를 마구마구 하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지금 말하는 걸로 보아서는 이 어린 채원우는 나를 모른다. 모르는 사람이 다짜고짜 볼에 뽀뽀? 당장 경찰서 앞으로 가야만 했다.

“형, 그런데요…….”

“네. 그런데요?”

절로 웃음이 났다. 형이라니, 흐흐, 아저씨처럼 웃으면서 대답했다.

“손도 잡아주면 안 돼요?”

원우야. 다 된다니까. 너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내 손은 네 거야.

백겸은 원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헌터보다는 못하지만, 이능력자에겐 보통 사람과 다른 힘이란 게 있어서 채원우를 한 팔로 받쳐 안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채원우에게 다른 손을 내주기도 껌이란 말이었다.

백겸이 내민 손을 한참 보던 어린 채원우는 분내가 날 거 같은 흰 피부에 어린아이치고 길쭉길쭉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백겸의 손에 올렸다.

원래 채원우는 백겸과 키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것에 비해서 손만은 눈에 띄게 컸다. 원래는 반 마디는 크던 손이, 반대로 한마디 이상 작은 손으로 돌아오니까 가슴이 찌릿했다.

미치겠다. 미니 채원우가 세상에 더 많아지면 좋겠다…….

하지만 그보다는, 백겸은 지금은 품에 있는 채원우에게, 보호받아야 마땅한 어린아이에게 다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원우야. 사실은 형이 너를 좀 알아.”

“저를요?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어요? 저는 기억이 없는데…….”

“어어. 네가 기억하는 순간에 만난 적은 없어.”

“그럼요?”

“근데 내가 널 아는 게 중요하지, 원우야. 그리고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고작 이 한마디 했다고 왜 입술이 마르냐. 백겸은 혀로 입술을 싹싹 핥았다. 너무 과몰입하고 싶지 않은데 쉽지 않다.

사실 채원우가 한 경험과 자신이 한 경험은 농도만 다르지 비슷했다. 던전 브레이크는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겼고, 채원우는 아주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상처를 받아 왔었다.

“앞으로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어. 그건 무섭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거야. 그런 와중에 너는 특별해질 텐데, 네가…… 물을 네 마음대로 다룰 수도 있어.”

“제가요?! 우와! 그거 좋은 거 아니에요? 저 물 위를 걸을 수도 있겠네요?!”

헛웃음이 났다. 어려도 채원우는 채원우였다. 엉뚱하고 골 때리는 소리에 백겸은 허허 웃고 말았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면서, 어린 채원우의 말대로 이대로 가면 모든 일이 괜찮아질 것 같다는 느낌이 오는 방향으로만 걸었다. 백겸은 원우를 고쳐 안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중요한 건 그 능력을 너만 알아야 한다는 거야.”

사실 채원우의 특별함이 어떻게 들통나게 되는지 그 과정은 모른다. 그런 시시콜콜한 개인사는 헌터청에서 기록하지 않는다. 채원우에 대한 헌터청의 기록은 오로지 그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데이터로 치환할 수 있는 것뿐이었고 채원우는 개인사를 말해 주지 않으며 강 팀장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이제는 채원우가 말하지 않는 이상 결코 열리지 않을 판도라의 상자가 된 거다.

“혹시라도 누가 너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면 도망치고. 널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더라도 속지 마. 알았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