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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0 - 3. Rabbit Hole
토끼굴 no. 17은 지금까지 생긴 던전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던전 세 개를 거쳐서 가야만 했다. 처음 발생했을 때는 C등급으로 공략이 무척 쉬울 예정이었고 실제로 쉬웠다.
문제는 해당 던전이 아래로 푹 꺼진 반지하처럼, 가라앉은 채로 사라지지 않게 된 거다. 이걸 없앴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공략에 실패했다고 해야 할까. 공격성은 없어졌지만, 그렇다도 그 존재가 사라지지도 않은 휴화산과 같은 던전을 두고 온갖 조사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결국 한 달이 지나고 공식적으로, 완전히 파훼할 수 없는 던전으로 결론 내어졌다. 그리고 우리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특이한 던전이었다. 지금까지 나타난 토끼굴 중에서 가장 많이 파악되었고 몬스터도 가장 적은데도 불구하고, 최초 측정 C등급이었는데 지금은 미지수 등급으로 판정 났다는 점이 그랬다.
“미지수?”
백겸은 마치 사람 이름처럼 들리는 그 등급을 보며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그럴 만한 게, 미지수라는 단어는 절대로 신비롭거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런 류가 아니었다. 백겸이 처음으로 만난 미지수인 던전은 가족과 집을 한 번에 날아가게 했고, 다음으로 만난 미지수인 채원우는 백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찝찝한데.”
“특이사항에 ‘거주 몬스터는 초소형 개체로 던전 밖으로 나가 민간인을 공격하지 않으며 심지어 침입자인 헌터와 에스퍼 및 가이드도 공격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네요.”
채원우가 백겸의 뒤에서 앞으로 팔과 다리를 뻗어 백겸의 몸을 감싸 안은 채 웅얼거렸다. 발음이 뭉개지는 이유는 채원우가 백겸의 어깨에 턱을 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미지수가 아니라 D나 F등급 정도 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백겸은 채원우가 보고 있던 보고서를 성급하게 넘겼다. 뒷페이지에 바로 특이사항이 나왔다.
<특이사항: 투입되었던 헌터청 소속 이능력자들의 던전에 대한 반응이 모두 우호적임>
“뭔 소리야, 이게.”
백겸 역시 헌터청 소속이었던 적이 있기에 잘 안다. 헌터청에 소속된 이능력자들은 던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혐오한다.
심지어 던전에 살고 있는 자신조차 여전히 그 마음을 버리지는 않았다. 못 버린 게 아니라, 안 버린 거다. 살고는 있다만 그게 전부였다. 생각보다 특이하고 괜찮은 곳이란 생각도 하지만, 은근히 괜찮은 곳은 ‘토끼굴’이지 던전 자체는 끔찍하고 없애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헌터청 소속 이능력자들이 대다수도 아니고 모두? 모두 우호적이라고?
“이거 가짜로 만든 보고서 아니야?”
뿌리 깊은 불신이 보고서를 내던지게 했다. 철퍼덕 엎어지며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졌다. 판단 후 보고 부탁드린단 말이 공손하게, 그러나 딱딱하게 적혀 있었다.
“던전이 어떻게 우호적으로 느껴져?”
“난 좋은데.”
“넌 원래 호불호가 강하지 않잖아.”
“내가 얼마나 강한데요. 양백겸을 좋아한다, 양백겸 빼고 다른 사람들은 싫다, 승규 형네 할머니는 좀 좋다, 형이랑 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다. 그러니까 던전도 좋은 건데요.”
백겸은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채원우의 애정 공세는 여전히 불도저였다. 우회전도 없고 회전교차로도 없이 오로지 직진뿐이었다. 심지어 하나 있던 신호등마저 폭주 이후 완전히 박살 난 모양이었다.
근데 이렇게까지 말한다니 뭐……. 결국 백겸은 바보처럼 웃고는,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같은 어디서 조잡하게 광고 문구를 카피한 듯한 소리나 지껄였다.
그러나 백겸은 곧 다시 정신을 차리고 둘이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사실 그곳에 가기로 한 날짜도 정하지 않았으니 아직 집중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일단 정신계 쪽 던전 같아. 이능력자들이 모두 세뇌를 당했거나 개조당한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거지. 이 임무 거절하자.”
“저는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만약 그랬다면 보고서에 이미 적혔겠죠. 비정상적 행동 발생, 뭐 이런 식으로. 그리고 헌터청은 소속 헌터들이 자기들 입맛대로 쓰기 좋은 상태인지 아닌지는 기가 막히게 알거든요.”
“그건 맞지.”
하나 실패해서 뒤통수 맞은 건 채원우와 내 페어고. 백겸과 원우는 공범자답게 서로 보며 실실 웃었다.
“궁금한데 한번 가볼까요?”
“갔다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럴 뻔한 시기가 한두 번도 아니고. 우리 정도면 어지간해서는 안 죽는 거 같아요, 형.”
채원우는 백겸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배와 복사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안 그래도 요즘 좀 편히 지냈더니 딴딴했던 그 부분이 조금 말랑해진 것 같아서 신경 쓰이던 백겸이었다. 몸을 옆으로 비키려 할 때마다 더 바짝 붙어와, 이젠 채원우의 무릎, 장골과 자신의 골반뼈가 눌릴 지경이라 가만히 있었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집요한 어린 애인이 흐흥, 하고 웃었다.
* * *
토끼굴 세 번 점프, 걸어서 네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 중간중간 쉴 수 있게 침낭 같은 것도 챙기다 보니 짐이 많아졌다. 짐이 많으니까 걸음도 느려지고 피곤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겨우 도착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바로 들어가서 내부 상황을 확인한 뒤 우리의 스윗홈과 토끼굴 본진으로 돌아가려다가, ……잠깐 발을 들였다가 바로 뒤로 빠졌다.
“……안개가 너무 심한데.”
혹시 몰라서 허리에 끈을 묶고 그 끄트머리를 잡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채원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시야 확보가 힘들다니. 성가셨다. 게다가 안개 하면 백겸은 여전히 그놈의 시청역 던전이 생각났다. 그 던전 자체도 더럽고 까다로웠지만, 나와서 있던 일은 더 기분이 더러웠으니 좋은 기억일 리 만무했다.
역시, 보고서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모름지기 헌터라면 던전을 좋아할 수 없다.
“가시거리가 아예 답 없는 수준은 아닌데.”
“GPS랑 열감지 고글 가져갈까요?”
“……우리한테 열감지 고글 같은 게 어디 있어.”
“아, 맞다.”
“얘가 아직도 헌터청에서 일하던 습관 못 버렸네. 우리 이제 개털이야, 원우야.”
“맞다……. 그럼 GPS랑 신호탄만 들고 갈까요?”
“신호탄이 어디 있어.”
연속으로 나오는 배부른 소리에 헛웃음을 뱉자, 채원우가 비장하게 가방을 열었다. 가방에서는 버튼을 누르면 위에 있는 손바닥 모형끼리 부딪쳐서 짝짝 소리가 나는 장난감이 나왔다.
“…….”
노란색과 빨간색으로 알록달록한 장난감을 받아 들어 버튼을 몇 번 누르니 짝! 짝! 소리가 연달아 났다.
“……소리가 크긴 크네. 어디서 샀어, 이런 건?”
“저번에 승규 형네 할머니 모셔다 드리면서 문구점이 있길래.”
“별걸 다 한다.”
“달고나도 했어요. 저 잘한다고 하던데.”
“그래……. 나랑도 해, 다음에.”
채원우는 대답을 뽀뽀로 대신했다.
둘은 안쪽 지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목이 높게 올라오는 군화를 신었다. 거의 훔쳐 오다시피 한 출동복을 걸치고 나니 빈약한 장비를 제외하면 그냥 헌터청 소속처럼 보일 정도였다.
“같이 들어갈 거죠?”
“당연하지.”
채원우가 당연한 걸 묻는 이유는, 아무래도 본인의 등급이 떨어진 이후로 백겸이 자신을 과보호하는 걸 느끼기 때문일 거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던전 입구 막을 찢는 건 가이드보다 상성이 더 잘 맞는 헌터의 몫이었다. 채원우가 어깨 너머로 자신을 흘끔 보고는 배시시 웃기에 백겸도 웃어줬다. 왜 웃지?
갑자기 채원우의 던전 막 찢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저번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백겸은 가볍게 충격을 받고 속상해졌다.
물론, 채원우의 입장에서는 가증스러운 엄살이었다. 이걸 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백겸에게 행운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원래 연애에는 좀 앙큼한 내숭이 필요하긴 하다.
“형은…… 제가 약해져서 귀엽죠.”
눈웃음 살살 치며 하는 말에 백겸이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억울하지만, 백겸은 자신이 채원우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게 좋긴 했다. 내가 이렇게 마초꼰대였다니.
백겸이 입을 꾹 다물고 손이나 잡았다. 채원우는 능력을 거의 쓰지 않게 된 이후로 장갑을 끼지 않았다. 맨손끼리 잡은 감각이 좋았다.
안개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짙어졌다. 점점 더 아득해지는 모습에다가 장애물은 물론이고 몬스터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에 백겸은 서서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묘하게 주변이 따뜻해서 땀도 나기 시작했다. 몸은 축축 늘어져서 불안해졌다. 독성은 없는 대신 HP를 서서히 까먹는 효과가 있나?
“원우야.”
일단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자고 말하려는데, 대답이 없었다. 백겸은 그만 놀라서 움찔 손을 떨었다. 분명 잡고 있던 손인데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원우야?”
돌아보니까 손까지만 겨우 보였다. 그런데 그 손이 작아 보인다. 이상한데……. 백겸은 불안함에 눈을 거칠게 비볐다. 난시가 온 것처럼 부옇게 흐려 보였다.
“채원우!”
손을 뻗어서 허우적대는 순간 실루엣이 만져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멀어졌다.
“어어……?”
바보 같은 외마디 소리와 함께 백겸이 뒤로 천천히 넘어갔다. 무릎이 허물어지는 게 아니라 뻣뻣하게 굳어 뒤로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채원우의 손은 그런 백겸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분명 도화지 위를 걷는 것처럼 평평한 땅 위를 걷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확신도 있었다.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없는 아주 심심한 길이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옆으로 쓰러진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옆으로 굴러떨어졌단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자신은 어떤 대각선으로 된 지형에 등을 기댄 채 눈을 떴고, 머리는 엄청 아팠으니까.
“아으으…….”
백겸은 지끈지끈대는 머리를 싸매고 앓는 소리를 냈다. 얼굴을 포함한 머리 쪽은 작은 상처에도 크게 피가 나기 때문에 혹여라도 찢어지기라도 했다면 곤란해진다. 서둘러 손바닥으로 얼굴과 머리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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