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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09
지금 채원우에겐 그럴 능력이 없는 걸 아는데도, 얘 목소리가 정말 그럴 수 있는 것처럼 들려서 순간 오싹했다. 어휴.
“일단 음료수 좀 사 올게. 나도 목마르다.”
“네.”
대답은 재깍재깍 하면서 채원우는 서 있던 백겸의 허릴 당겨서 옆구리에 얼굴을 비볐다. 백겸은 덩달아 삐뚤어진 원우의 안경을 고쳐 쓰게 한 뒤 어깰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을 스낵바를 찾아 걸었다.
원우를 두고 걸으니 백겸은 그제야 던전 같은 게 없던 세상에서의 추억이 떠올라 조금 서글퍼졌다. 마지막으로 왔을 때 백겸은 고등학생이었다. 가을이 되어서 후룸라이드를 비롯해 몇 가지 기구들이 잠기기 전에 시간을 내서 왔었다.
‘우리 이제 수험 준비해야 하니까, 대학 들어가서야 오겠다. 오늘 뽕 뽑고 가자!’
다들 그 말에 동의하고, 기구 하나하나를 탈 때마다 크게 웃으며 괜히 수험생이 되면 잃을 것들을 생각하며 너스레를 떨었었다. 수험생활 때문에 사소한 즐거움을 포기하게 될 게 아니라, 세상이 변해 가족, 친구, 일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될 줄도 모르고.
“그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내 탱자탱자 놀 걸.”
중졸이 된 백겸은 쓰게 웃었다. 나라에서 피해를 입은 백겸의 학교 출신 생존자들에게 검정고시 없이 졸업장을 주겠다고 했었으나, 형평성 문제를 들고 일어나는 여론과 그보다 중요하다고 외쳐대던 다른 문제로 인해 졸업장 이야기는 말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이젠 중요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졸업장 같은 건. 졸업식도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가족이 없는 졸업식 따위를 누가 원하겠어.
“콜라 하나요. 얼음 많이 넣어주세요.”
슬픈 상념을 끝내고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던 백겸이 눈에 보이는 입간판을 보고 충동적으로 추가 주문을 했다.
“저, 이것도 주세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이다.
한 손에는 콜라, 다른 한 손에는 유니콘인지 뭔지라며 시럽을 섞고 알록달록한 솜사탕을 올려 화려한 음료를 든 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백겸의 시야에 선글라스를 벗은 채원우와 그 앞에 선 여자 둘이 보였다.
갑자기 쿵 하며 속이 내려앉는 기분에 서둘러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채원우가 이쪽을 보며 ‘형!’ 하고 속없이 손을 흔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백겸을 보더니 자기들끼리 속닥대던 여자들은 한참 어려 보였다. 채원우 또래일 거다. 백겸은 남동생만 있어봤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더더욱 남자들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지내다 보니 여자들은 어려웠다. 특히 어린 사람들이. 백겸이 쭈뼛댔다. 그런 백겸을 보고 속삭이던 여자 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저흰 가볼게요. 재미있게 노세요~!”
발랄한 목소리에 걱정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백겸은 멍하니 멀어지는 가벼운 뒷모습을 보다가 채원우가 잡아끄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형. 나 여기 있는데.”
“어어. 무슨 일이시래?”
“번호 물어보던데요.”
“어?!”
아니, 아니……. 당연히! 충분히! 있을 일이지. 채원우는 잘생겼으니까. 그런데도 당연히 내 거라고 생각했던 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좋아 보이는 걸 들으니 당혹스러움을 거두기 힘들었다.
얼빠진 백겸을 당겨 옆에 앉힌 채원우가 고갤 기울여서 백겸의 손에 들린 콜라를 빨아 마셨다.
“나는 네가 선글라스도 벗고 있어서 혹시나…… 했지.”
“하하. 그렇구나. 아니에요, 그런 거. 혹시 번호 알려줄 수 있냐고 해서 핸드폰 없다고 했죠.”
거짓말은 아니었다. 채원우는 핸드폰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패드는 있는데 연락할 사람이 없고 백겸만 있으면 된다고 핸드폰은 들고 다니지 않았다. 아주 가끔, 둘이 일정이 따로 있을 때나 들고 다니는데 백겸은 안다. 그건 핸드폰이 없다고 말해야 하는 수준인 걸.
“거짓말인 줄 알았겠네.”
“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냐고, 애인이 있어서 그러는 거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어요.”
이번에는 솜사탕을 뜯어 입으로 가져가며 원우가 태연히 고갤 끄덕였다.
“타이밍 좋게 형이 오더라구요. 그래서 저 사람이라고 했죠.”
“와, 너는 진짜…….”
열린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채원우. 감탄하느라 슬쩍 벌어진 백겸의 입술 사이로 채원우의 손가락이 쏙 들어왔다. 손가락에 들려 있던 건 솜사탕 조각이었다. 입에 들어오자마자 살살 녹는 솜사탕에 당이 훅 올라가 눈앞이 뿅뿅 빛났다.
“그래서 생각했죠. 내가 여기 앉아 있길 잘했다. 형이 있었으면 여덟 명은 물어봤겠구나.”
“야……. 그건 아니야. 너 나 놀리냐?”
“진짠데. 형 인기 많아요.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쳐다봐. 특히 여자들이.”
“그럼 넌 뭐 남자한테 더 인기 많고?”
“인정하기 싫은데 좀 그런 거 같아요. 형 만나기 전까진 헌터청에서 몇 명 반쯤 죽여놨거든요.”
……어쩌면 헌터 살인마라는 별명은 헌터청에서 실시한 실험에서 터진 사건 때문이 아니라 이것 때문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당방위네, 뭐. 지금 여기가 헌터청이었으면 그 이름 다 알아내서 양백겸 역시 상대들을 반쯤 죽여놨을 거다. 그리고 미치광이 페어 소릴 들었겠지.
그리고 그 미치광이 페어는 지금 여기, 긴 다리를 구기고 앉아서 솜사탕을 뜯어먹고 콜라나 마시고 있다.
“어때?”
“맛있어요.”
“하, 거지가 되기 전에 추적이 끝나서 다행이지.”
“그러게요. 정승같이 벌어둔 돈 하나도 못 쓸 뻔했네요.”
“……개같이 번 돈이겠지.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
“아. 또 틀렸네.”
채원우는 여전히 상식 면에서 약했다. 이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애초에 옆에서 닦달하는 사람도 없고, 하나 있는 보호자 겸 가족 겸 애인이라는 양백겸은 채원우의 이런 실수를 좋아했으니까.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서 뭘 해도 귀여워 보인다. 귀여우면 큰일 난 건데, 양백겸의 실수는 어느 순간부터 채원우를 예쁘게가 아니라 귀엽게 보기 시작한 게 문제인 것 같다.
하지만 문제라고 생각해야 문제지.
“빨리 먹고 다음 거 타러 가자.”
“다음엔 뭐 탈 거예요?”
“지금 탄 거보다 더 길고 더 극적인 롤러코스터.”
“난 형이랑 잘 때 느끼는 길고 극적인 거로 충…….”
“공연음란죄라는 게 있어, 상식 없는 원우야…….”
백겸이 채원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원우는 눈을 끔뻑이고는 배시시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채원우 한정으로. 강 팀장이나 다른 헌터들의 웃는 낯에 얼마든지 침을 뱉을 수 있는 백겸이 평소라면 자신에게 해당하지도 않을 속담을 지껄였다. 채원우가 옆에 있어서 좀 부드러워진 거지, 양백겸도 어디 가서 빼면 서러운 성격 더러운 꼴통 중 하나였으니까.
두 사람은 순식간에 비어버린 음료 통을 쓰레기통에 넣고 걸었다. 백겸이 앞섰고 채원우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느릿느릿 백겸을 따랐다. 그러다가 흘끗 고갤 돌렸다.
인공적으로 조성해 둔 풀숲에 눈이 세 개, 꼬리가 두 개인 도마뱀형 몬스터가 있었다.
‘던전이 터졌을 때 수습을 덜 한 건가. 눈에 띌 정도로 강하지 않아서 묻혔나 보네.’
던전 브레이크 이후로 이 지역에는 크고 작은 산불이 자주 났다. 바로 그 원인인 몬스터였다. 혀를 날름거릴 때마다 작은 불꽃이 튀었다.
채원우는 그냥 둘까 하다가 눈을 가볍게 굴렸다. 혹시라도 데이트 중에 사고가 나면 귀찮아질 테니까.
“후.”
채원우가 고갤 아주 살짝만 기울이고 바람을 훅 불었다. 그러자 몬스터가 갑자기 뽀그르르 물방울 속에 갇혔다. 불 속성인 만큼 순식간에 녹기 시작해, 끈끈한 슬라임처럼 떨어지더니 동그랗게 깎은 관목에 치렁치렁 걸렸다. 누가 보더라도 그냥 갖고 놀던 슬라임을 떨어뜨렸나 보다 할 거다.
“채원우. 뭐 해?”
앞서가던 백겸이 뒤쫓아 오는 기색이 없어서 돌아보면서 외쳤다. 채원우는 싱긋 웃고는 백겸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냅다 끌어안았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뭔가 찝찝한데.”
“뭐가요?”
“너 나 몰래 뭐 했어.”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요.”
백겸의 뺨에 자신의 뺨을 마구 비비던 채원우가 더욱 진한 눈웃음을 쳤다. 그러나 얼굴이 붙어 있는 덕분에 백겸은 보지 못했다.
“제가 뭘 하겠어요. 전 형보다 약한 이능력자인 걸요.”
“…….”
“발악해 봤자 마술사 수준이라니까요.”
채원우는 동그랗고 예쁘게 빚은 물방울을 떠올렸다. 그 안에 백겸을 가두고 싶었다. 숨도 쉬게 해줄 거고 매일 만져 주고 노래도 불러줄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손도 못 잡을 테고 지금처럼 안지도 못하겠지.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있다면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자신과 백겸을 이토록 늦게 만나게 한 모양이다. 자신이 조금만 더 어려서 이런 속내를 감출 수도 없었다면, 이미 백겸은 어딘가 갇혀 있었을 거다.
“형. 형이 너무 좋아요. 우리는 어떻게 만나든 운명인 것 같아요. 형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어요.”
비록 내가 내 능력을 숨기고 있고 형을 가두고 싶은 마음도 숨기고 있어도 말이에요.
채원우는 당연히 뒷말을 숨겼다. 채원우를 구하고 헌터청까지 엿 먹인 뒤에도 이렇게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 양백겸은, 정작 옆에 있는 커다란 구덩이는 모른 채 채원우를 마주 껴안았다.
너무 일찍, 너무 오래 망가진 구멍은 영영 채워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모포로 덮어둘 수는 있다. 언젠가는 능력이 줄어들지 않은 걸 들킬 날이 올 수도 있지만, 그때는 또 다른 변명을 하면 된다.
채원우는 백겸과 다른 의미로 오늘 이 순간을 만끽했다. 날씨도 좋고 새로 한 머리도 형이 마음에 들어 하니까.
오늘도 채원우의 우주는 망가진 채로 순조롭게 돌았다. 양백겸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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