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106화 (107/121)

(6)============================================================

외전 07

둘의 키가 평균을 웃도는 것도 있겠고, 체격도 뭐…….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기가 정말 힘들다는 건 알아서 백겸은 그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음식은 채원우가 들었다. 채원우는 뚱한 얼굴로 고갤 까딱이고 말았다.

채원우는 자신이 욕먹는 건 괜찮아 하면서 별로 기분 나쁘지도 않은 한마디를 백겸이 들으면 금세 예민해졌다. 치와와 같은 녀석……. 승규가 들으면 ‘치와와? 치와와아? 도사견도 아니고?!’ 하고 지랄했을 거 같지만 백겸의 눈엔 치와와 정도였다.

“조심히 가세요.”

원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회성이 많이 늘었다. 그런데 마을 입구 쪽에 겨우 하나 켜진 가로등 때문에, 요모조모 입체적인 채원우의 얼굴에 그림자가 또렷하게 드리워져서 오히려 협박처럼 들렸나 보다. 배달원이 갑자기 90도로 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그러더니 전속력으로 시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좀 웃어주지. 이제 배달은 누가 해주냐.”

소문나서 여기는 이제 아무도 배달 안 해주겠다. 결국 남은 건 테이크아웃밖에 없구나. 어쩔 수 없지 뭐. 백겸은 산뜻하게 포기했다.

오토바이에 올라타니 군침 도는 기름 냄새가 났다. 얼른 돌아가야겠다.

* * *

백겸이 헤어샵에 가야겠단 생각이 든 건 다음날이었다.

애초에 충동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일어나서 던전으로 돌아가려는데 눈에 잔뜩 뻗치고 눌린 머리가 보인 거다.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아서 제멋대로 자란 길이도 문제였다.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고무줄로 대충 묶고 다니던 기간도 꽤 되었다. 어제도 보쌈과 족발 용기를 고정하는 데 쓰인 노란색 고무줄로 머리를 묶고 기절하듯 잠든 차였다.

고무줄을 빼내니 노란 고무줄답게 머리카락을 몇 가닥씩 뽑고 나서야 풀렸다. 자국이 남은 머리카락을 구깃구깃 만지다가 반쯤 감긴 눈으로 과자 봉지부터 뜯고 있는 채원우에게 외쳤다.

“머리 좀 자르러 가자!”

뭘 해도 백겸이 말한 거면 어지간해선 네, 좋아요, 그래요, 하는 채원우는 이번에도 고갤 느리게 끄덕였다. 볼은 과자로 한껏 부풀었고 앞머리가 눈을 찌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채원우도 약간의 손질이 필요해 보였다. 눈이 찔리는 건 좀 그렇잖아.

* * *

“지루해요.”

채원우가 불퉁한 목소리로 백겸을 독촉했다. 그래도 이미 머리에 전선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상태라 그만두고 갈 수도 없다.

헤어샵에 오자고 했던 백겸은 정작 한참 전에 커트를 다 하고 잡지를 보고 있었고, 애먼 채원우만 붙잡혀서 파마를 하는 중이었다.

그냥 얘도 머리만 좀 자르겠다고 하는 걸 눈을 빛내며 이것도 괜찮겠다, 저것도 괜찮겠다, 믿고 맡겨달라 한 건 이곳의 원장이었다. 그러며 보여준 사진 여러 장 중에서 느슨하게 펌을 해서 곱슬곱슬하게 내려온 스타일에 눈이 꽂혔다.

안 그래도 예쁜 내 채원우가 이런 머리를 하면 진짜 사랑스러울 것 같다며, 백겸은 아주 팔불출다운 생각을 했다.

‘원우야. 형 믿지?’

손만 잡고 잘게, 따위 소리를 하는 쓰레기 남자친구처럼 능글맞게 웃으며, 슬슬 빠지려는 원우의 어깰 잡은 게 한 시간 반 전이었다.

그사이 채원우는 억지로 머리가 감겨지고 커트를 하고 파마약을 뿌린 다음 이젠 전깃줄을 대롱대롱 달고 있는 꼴이었다.

백겸의 속내는 억지로 시켜 미안한 마음 30퍼센트와 그래도 기대되기도 하고 웃기고 귀엽기도 한 마음 70퍼센트였다. 이번만 내가 쓰레기 하지 뭐. 기대되는 마음이 너무 큰 백겸은 조금 얄밉게 빠졌다.

그러는 동안에 자신에게도 이런저런 아쉬움이 느껴지는 소리가 들리긴 했다. 염색 안 하실래요? 손님도 조금 볶으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 너무 아쉽다. 사진 찍게 해주시면 조금 싸게 해드릴게요……. 하지만 백겸은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정작 헤어샵 가자고 한 당사자는 머리만 얌전히 잘랐으니 오늘은 자신이 정말 잘못한 거긴 했다.

그래도 크게 싫다고 하지 않고 중간 중간 건네주는 과자를 받아먹는 채원우의 사진을 몇 장 더 찍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백겸은 핸드폰을 켰다.

영상 플랫폼에서 박선행 씨가 운영하던 계정을 검색해서 들어갔다. 형민이에게 들은 대로 더는 활동은 하지 않는 것 같을뿐더러, 올려놨던 영상들도 모두 삭제한 상태였다.

박선행에겐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심지어 원우의 기사가 점점 잠잠해질 시기를 그가 정확하게 맞추기도 했고. 백겸은 생각난 김에 메시지를 보내봤다.

<잘 지내시죠?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읽음 표시가 뜨고 핸드폰이 울렸다. 백겸은 원우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눈짓을 하고 바깥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어어! 백겸 씨!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에요, 기자님. 아니. 이제는 작가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 소식 들었구나? 혹시라도 잘린 거라고 생각하진 말아줘. 작가가 오랜 꿈이라 그만둔 거였어. 옆에서 양백겸 씨가 물불 안 가리고 몸을 던진 거에 영향을 받기도 했고.

“하하. 그 소리 칭찬 맞죠?”

―그러엄! 맞다. 책 나오면 좀 보내줘도 될까?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보내주시면 감사히 받죠. 취미 생활이 부족해요, 저희가.”

―그……. 사인도 해서 보내줘도 될까.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넉살 좋게 웃는 사이 대화가 좀 길어졌다. 역시 박선행은 던전 안의 모습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백겸은 말을 끌었다.

채원우와 함께 주로 지내는 던전은 오가기가 힘들고, 발생할 당시에도 비교적 유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사실은 국가에서 통제 중인 특수 시설에 속했다. 애초에 정신 멀쩡한 사람이라면 던전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아서 허울뿐인 통제고 둘이 관리하는 상황이지만…….

백겸은 고민 끝에 다음에 헌터청에 방문할 때 출입 허가증 발급이 가능한지 물어보겠다고 했다. 대신 바깥에 발설하지 말라는 걸 조건으로 걸었다. 있지도 않은 허가증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만큼 기밀이라는 말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물론이지! 나 이제 기자 아니야. 구경만 하려는 거야. 나 믿어, 백겸 씨.

“그럼요. 믿죠.”

백겸은 쓰게 웃고는 말았다. 승규나 승규의 할머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채원우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가족을 잃은 뒤로 백겸에게는 아무도 없었고, 드디어 생긴 게 자신처럼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원우뿐이었다.

그러니 설령 박선행이 어딘가에 말을 흘려도 실망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흘린다면 헌터청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헌터청은 자신과 채원우에게 뭐라고 해도 자신들을 영영 손절할 순 없다. 손대지 않고, 통제하려 들지 않겠다는 조건 하나만으로 자신들에게서 던전의 데이터를 엄청나게 가져가고 있으니까.

마지막으론 채원우의 근황을 간략하게 이야기하는 거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 애는 잘 지내냐는 질문에, 백겸은 에두른 말로 사람 속마음이야 잘 모르지만 일단 예전보다 잠을 잘 잔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선행은 특유의 끊어지는 호쾌한 웃음을 뱉으며 잘 자면 된 일이라고 대답했다.

백겸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채원우만이 아니라 백겸 자신도 11년차에 접어든 시간을 모두 통틀어 가장 잘 자고 있고.

통화가 마무리된 후 헤어샵 내부로 돌아오자 채원우가 있던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백겸이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모습에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던 직원이 동행분께서는 지금 샴푸실에 갔다고 했다.

백겸은 그제야 안도하고 자리에 앉았다. 출입구 앞에서 통화를 했으니 달리 나갈 길도 없고 자신을 두고 어디 갈 애도 아닌데다가 상식적으로 사라졌을 리도 없는데, 일단 눈에서 보이지 않으니 이렇게 놀라고 만다. 이런 걸 보면 채원우만 분리 불안을 느끼는 건 확실히 아니었다.

“형.”

백겸이 잠시 자신의 불안증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려는 차에 타이밍에 맞춰 채원우가 돌아왔다. 이상한 전기줄에서 떨어진 게 기쁜지 표정이 밝았다. 백겸이 얼굴에서 불안함을 싹 지워내고 손을 흔들었다.

채원우는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한껏 가벼워진 머리 스타일에, 드디어 끝나간단 후련함까지 섞였는지 원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고 상쾌했다. 짜식. 귀엽다. 백겸 역시 배시시 웃었다.

“어때요?”

“당연히 멋있죠! 최고예요!”

백겸이 대답하기도 전에 디자이너가 양쪽 손의 엄지를 들면서 극찬했다.

“최고예요. 혹시 사진 찍어도 될까요? 50퍼센트 할인해 드릴게요. 저희 SNS 계정에 올려도 될까요……?”

제발요, 라는 말이 들리는 것만 같다. 하지만 아무리 채원우가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해도 노출되는 건 환영할 일이 아니었다. 채원우도 이미 알고 있을 거다. 채원우가 고갤 저었고 백겸은 거울을 통해 죄송해요, 하고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아이, 정말 잘 나왔는데…….”

아쉬움이 뚝뚝 떨어져도 어쩔 수 없다. 백겸이 보기에도 이건 길이길이 사진으로 남겨야 마땅하지만 SNS 계정에 업로드라니, 절대 안 될 일이었다.

“혹시 끝나고 어디 가세요? 제가 더 예쁘게 세팅해 드릴게요.”

“형. 우리 어디 가요?”

딱히 계획은 없었지만 머리도 가벼워졌고 채원우도 태어나 처음으로 저런 머리를 한 걸 테니 바로 던전으로 돌아가는 건 정말 아쉽긴 했다.

그리고 좀 충동적으로 굴어도 괜찮을 거다. 이전이야 충동적으로 굴다간 목숨이 날아가는 상황이었지만, 이젠 아니니까. 백겸이 충동적으로 뱉었다.

“어. 놀이공원 갈 거야.”

“어머. 좋겠다. 오늘 날씨도 정말 좋던데.”

붙임성 좋은 디자이너가 유쾌하게 자신의 추억을 풀며 원우의 머리카락 끝에 오일 같은 걸 발라주었다.

백겸은 마치 본인이 낳은 것처럼 흐뭇한 얼굴로 채원우를 바라봤다. 원우는 처음으로 해보는 세팅이 어색한지 머리를 자꾸 갸웃거렸는데 그게 본인의 매력을 가중시키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