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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102화 (10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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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03

백겸이 생각하기에도 꼴이 좀 웃겼다. 승규는 자신의 뒤에서 허리춤을 잡고 있고 채원우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당기고 있고.

‘내가 걱정된대.’

‘제가 있는데요?’

‘채원우 헌터 이제 능력도 거의 잃었다면서요.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그런데 또 들어가서 보자니 무섭고…….’

‘…….’

갑자기 묘한 침묵이 흘렀다. 백겸은 원우가 자신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껴서 우울해 하는 줄 알고 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괜히 웃어 보였다.

‘무서우면 가라니까.’

뭐, 말 내용까지 그럴 수는 없었고…….

‘야아. 안 된다니까!’

‘그럼 쉬운 방법이 있어요.’

갑자기 채원우가 백겸의 손목을 놓더니 저벅저벅 승규를 향해 걸었다. 승규나 백겸이나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다가오는 원우를 삐걱거리는 목으로 쳐다봤다. 원우는 싱긋 웃더니 승규의 뒷목을 턱 쳤다.

‘으악!’

백겸은 자신도 모르게 소릴 질렀다. 승규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승규를 팔로 받은 채원우는 가뿐하게, 쌀가마를 어깨에 지는 듬직한 돌쇠처럼, 하지만 돌쇠라기에는 아주 예쁜 미소를 지으며 고갯짓을 했다.

‘들어갈까요?’

백겸은 얼떨결에 고갤 끄덕이고 던전 안으로 들어왔다.

승규는 30분 후에 깨어났다. 뒷목이 뻐근하다고 우는 소리부터 내다가 손을 할짝대는 감촉에 눈을 떴다. 귀여운 강아지를 생각했는지 목이 두 개, 얼굴도 두 개인 조랑말처럼 생긴 몬스터를 보고 다시 기절했다.

그다음에는 한 시간 후에 깨어났고, 채원우와 백겸이 얘네는 순하다고 말해도 듣지 않다가 결국 네 발로 기어서 던전을 나갔다.

그리고 다음에 들어와서는 맨정신으로 30분 있었고, 다음에는 한 시간…….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캠핑이라도 온 것처럼 삼겹살을 나눠 먹고 있다.

할머니는 오히려 승규보다 훨씬 대담하셨다. 손주가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곳도 보고 ‘우리 잘생긴 백겸이 이사 간 곳’도 봐야겠다며 대담하게 걸어 들어오시더니, 괴물들도 생김새 따라간다며 양을 닮은 몬스터를 한참 쓰다듬다 가셨다.

형민이는 던전에 들어오기까지는 쉬웠다. 하지만 오히려 승규와 할머니보다 몬스터에 대한 적대감이 컸다. 여전히 몬스터들을 곁에 오지 못하게 하는 건 형민이밖에 없었다.

“형. 저 맥주 마셔도 돼요?”

형민이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아이스박스를 밀어주자 입맛을 다시며 맥주를 꺼내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가, 슬슬 다가오는 몬스터를 보고는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아이스박스를 거칠게 밀어냈다.

백겸은 간발의 차로 발끝을 내밀어 아이스박스가 몬스터와 부딪히는 걸 막았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초식계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의 몬스터들은 먼저 자극하지 않으면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위험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게 이곳에 살고 있는 채원우와 백겸의 의견이었다.

“저도 술 마셔도 돼요?”

술을 잘 못 마시는 채원우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백겸은 안 된다고 하려다가 캔 하나를 꺼내서 나눠 마시기로 했다.

“기자님은 어떠셔?”

채원우가 먼저 맥주를 마시는 동안 형민에게 박선행의 근황을 물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그 괴랄하고 서툰 편집을 자랑하는 동영상이 올라오는 채널은 삭제되어 있었다. 따로 연락은 했으나 뭘 물어보든 애매한 대답만 왔다. ^^라거나 ^^@~ 같은…….

할머니가 가져오신 잘 익은 김장 김치를 삼겹살 옆에 올리며 형민이가 대꾸했다.

“퇴사하시고 글 쓰신다고 하세요.”

“뭐?! 고발 르포 같은 거?”

설마하니 헬리오스를 직접 들이받는 건가 싶던 백겸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한국에서 헬리오스를 소재로 펴낸 책이 관심을 끌려면 헌터청 얘기를 반드시 언급해야 할 텐데, 헌터청과 척지는 건 여전히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행히도 형민이는 고갤 저었다.

“아뇨. 소설 쓰신대요. 보니까 헬리오스 얘기는 이미 레드오션이라고 하던데요? 미국에서 하도 많이 써서.”

“아하……. 소설이라니 의외다.”

“책 나오면 사인 받아서 갖다드릴게요.”

사인까지는 필요 없는데……. 그래도 백겸은 일단 고맙다고 고갤 끄덕였다. 다음에는 한 번 초대하고 싶은데, 던전 안의 사정을 글로 쓰실까 봐 망설이게 된다. 승규나 형민이야 글을 쓸 거란 의심도 들지 않았고.

이곳은 미개발 지역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아직 아무도 감히 손을 댈 생각을 못 하는 미지의 영역이란 뜻이었다.

채원우와 백겸은 뉴스에 나올 정도로 미친 짓을 저지른 미친놈들인 덕분에 운이 좋아서 멀쩡하게 잘, 심지어 꽤나 즐겁게 지내고 있지만 사람들 인식 속의 던전은 여전히 끔찍한 블랙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냥 둘 수 없는 골칫덩어리이기도 했다. 규모는 점점 커지고 발생했다가 사라지지 않는 토끼굴 같은 던전도 늘어나는데…….

“그나저나 채원우 헌터 기사 다 내려갔더라고요. 언젠가부터는 사진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가 없어요.”

형민이가 버섯을 뒤집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떠보는 거다. 단순해서 한 번에 한 생각밖에 못 하긴 해도 여기서 구른 짬밥이 있는데, 헌터청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겠지.

그리고 그건 조금은 맞았다.

“어. 일 좀 같이 하기로 했어.”

백겸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내심 승규가 미쳤냐고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는데 반응이 없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백겸이 더 쫄렸다.

“언제까지 백수로 지낼 수도 없고. 우린 어차피 여기에 살고 있는데 이왕이면 겸사겸사 사회에 도움되는 일도 하고 싶고…….”

승규가 ‘네가 사회를 운운해?’ 하는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백겸을 쳐다보고는, 화룡점정으로 코웃음까지 쳤다.

“……아무튼 우리가 샘플 채취하고 데이터 좀 쌓아서 주기로 했어. 대신 수배하지 말라고 했고.”

“어엉.”

“언제까지 쫓겨 다닐 순 없잖아.”

“으응.”

“뭔데, 그 반응.”

“아니. 알았다고.”

생각 이상으로 반응은 심심했다. 특히 형민이나 할머니에게서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당황한 건 백겸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초조하게 집게를 짤각거리니 채원우가 가만히 백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잘 생각했어.”

한참 뒤에 승규가 말했다.

“잘 생각했어요, 형.”

형민이도 한마디 보탰다.

“네 말대로 평생 도망 다닐 수는 없는 거야. 영리하게 굴어야지.”

“…….”

“너 요즘 행복해?”

그 질문에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어.”

“그럼 그걸 지켜야지. 어쩌겠냐.”

지킨다는 행위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예전의 백겸은 개인 생활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고 지금은 채원우와의 일상을 위해서 자신들의 신변을 노출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훨씬 이득 보는 장사였다.

“그건 그래.”

백겸은 픽 웃으며 수긍했다. 그들이 이해해 줘서 다행이었다. 쥐고 있는 게 너무 없어서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여기 정말 날씨 하나는 끝내준다.”

“가끔 보라색 비가 와.”

“진짜?!”

“엄청 예뻐.”

라일락색 물안개까지 생겨서 한층 더 아름다운 비 오는 날의 던전을 떠올리면 저절로 웃음이 났다. 백겸에게는 그 색이 채원우가 자신에게 주었던 꽃다발의 색과 같아서 더더욱 특별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안락한 생활, 평화롭고 외롭지 않은 삶이 가장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던 위험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니.

그린존에서 내 집 마련이라는 꿈과는 정반대로 왔는데 결국 바라는 삶을 가지고 말았다. 게다가 토끼같이 예쁜 애인까지.

좀 아슬아슬하긴 한데 어떠나 싶었다. 원래 적당한 자극이 권태기도 막아준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 사이에 권태기 같은 건 안 올 것 같긴 하지만.

거의 도시 하나를, 어쩌면 나라를 날려버릴 수도 있었던 걸어 다니는 핵폭탄하고 연애하는데 어떻게 권태기가 오겠어. 도파민 팡팡 터진다.

“그나저나 우리 원우 학생은 어쩜 이렇게 예뻐.”

승규의 할머님이 기름이 묻은 손바닥을 닦아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원우는 배시시 웃으며 고갤 내밀어 할머님이 제 볼을 쓰다듬게 했다. 채원우는 요즘 여우 짓이 좀 늘었다. 그게 백겸과 할머님 한정일 뿐이다.

“하이고, 곱다. 고와.”

“할머니. 저는요?”

백겸이 능청을 떨며 괜히 고갤 내밀었다. 할머니는 너그럽게 백겸의 볼도 쓰다듬어 주었다.

“백겸이 넌 잘생겼지.”

“어렸을 땐 예쁘단 소리 좀 들었는데.”

“어릴 때 예쁜 놈이 나중에 잘생겨지지, 그럼 어릴 때 못난 놈이 나중에 잘생겨지는 줄 아냐? 우리 손주를 봐라. 한결같지.”

“그거 욕이지, 할머니.”

승규는 툴툴대면서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채원우에 대해 무섭기도 하고 좀 걱정되기도 하는 복잡한 감정이 남아서일 거다. 하지만 그거랑 또 별개로 채원우가 예쁘긴 정말 예쁘다고 했던 놈이었다.

형민이는 우리 하는 꼴을 히히거리며 보더니 갑자기 전화를 받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걸음 걸어가더니 꿀이 떨어져서 좀 느끼하기까지 한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한다. 신입생 생활도 만끽 중이라고 했다.

“하이고. 온 주변이 다 봄이구나~ 날씨도 봄, 주변에 이놈들도 다 봄. 나만 가을이야.”

눌어붙으려는 김치를 뗀 승규가 칙칙한 얼굴로 커다랗게 쌈을 쌌다. 멀뚱멀뚱 승규를 보던 채원우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채원우의 능력은 이제 D급 정도로 추정된다. 백겸은 그렇게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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