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게다가 원우는 이상하게도 몬스터들과 잘 통해서, 혹은 어떻게 서열 정리가 잘 되어서인지 던전을 활보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으니 자료 조사에 우리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을 거라며 백겸은 자신했다.
―그럼 이제 앞으로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거냐?
“그래도 한동안은 좀 지켜보고.”
―우리 할머니가 너 보고 싶어 해.
“최애 형민이로 바뀌신 거 아냐?”
―처음엔 그랬는데 역시 너만 한 애가 없다더라. 형민인 너무 말이 많대.
“음. 안타깝게도 그 말이 맞긴 하지.”
형민이는 학교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노동법을 공부하겠다고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애인이 생기더니, 풋풋한 연애에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한다. 좋은 이야기였다. 아주 평범해서, 심지어는 한심하다고 여기는 꼰대가 생길 정도라면 아주 잘 살고 있단 의미였다.
박선행 씨는 사표를 내고 1인 언론인으로 활동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책을 낼 건데 출간이 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라고 했다. 책의 내용은 헬리오스의 비리와 헬리오스가 헌터청에 남긴 유산. 강윤엽과 꼭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내용을 떠나서 그의 소재 자체가 파악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백겸은 더는 강윤엽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였다. 무엇보다 강윤엽에게 복수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강윤엽에게 가장 복수심이 불타고,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은 채원우였다. 그러나 원우는 아예 그 사람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았다. 마치 사라진 것처럼, 망각이 최고의 복수인 것처럼.
자신이 계속 강윤엽에 대한 원한을 불태운다면 채원우가 신경 쓰게 될 거다. 백겸은 원우가 그냥 모든 기억을 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저녁 약속을 잡은 거다. 백겸은 꽃집에서 고민하며 제일 예쁜 꽃들을 골랐다. 꽃집 주인은 최선을 다해서 예쁘게 꽃다발을 만들어주셨는데, 안타깝게도 백겸의 색 조합 센스는 박살 난 상태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거의 없는 모양인지 전체적인 느낌이 약간 애매했다.
역시 그가 본 것 중 가장 예쁜 꽃다발은 채원우가 줬던 그게 1순위였다. 그 연보라빛 들꽃다발을 떠올리며 실실 웃고 있는데 승규가 물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갑작스럽긴 하다. 여전히 적응이 안 돼. 내가 기억하는 양백겸은 좀 약아가지고 고생 같은 거 굳이 안 하는 애였는데. 사랑이 사람을 망친다, 망쳐.
마지막 연애 이후로 새로 만나는 사람도 없고 갑자기 안티 로맨스 주의자가 된 이승규의 매몰찬 한마디였다. 반면 완전히 반대로, 갑자기 세상 전체가 꽃밭으로 느껴지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구나 생각하는 양백겸의 의견은 달랐다.
―솔직히 내가 보기엔 네가 채원우를 더 좋아하는 거 같거든. 친구로서 솔직히 아깝다. 채원우 헌터가 잘생기고 어린 건 알지만…….
“돈도 많고 몸도 좋아.”
―어……. 그래…….
“그리고 내가 더 좋아하는 거 아니야.”
양백겸은 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가 더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채원우의 눈과 그가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심지어는 그렇게 눈치가 없는 박형민도 자신의 입장으로 한 달만 살아보면 알 거다.
백겸에게 원우는, 자신의 세상에 들어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주변에 스며든, 일상이 된 존재였다. 하지만 채원우에게 양백겸은 세상 그 자체였다. 중심이고 살아가는 질서이고 거의 종교이자 신처럼 사랑했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 눈빛 하나하나에 한숨 쉬고 웃는 애를 보고 있으면 애정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거대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부담스럽지 않냐고? 아무래도 자신은 지금까지 스스로를 평가해 온 것보다 그릇이 훨씬 큰지 오히려 환영이었다. 밑 빠진 독조차 채울 수 있는 게 채원우의 애정이었다.
“이런 연애를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지껄이고 낄낄대니 승규가 컥, 하고 숨 막히는 소리를 내더니 곧이어 욕을 남발하다가 뚝 끊어버렸다. 나중에 고기라도 사준다 하고 풀어주면 될 일이었다.
애초에 근처에서 꽃을 샀던 터라 곧 약속 장소였다. 백겸은 원우와 청계천 부근에서 보기로 했다.
오늘은 뭐든지 일이 잘 풀리려는 모양이다.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 근처에 던전 경보가 내려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머물던 사람들조차 백겸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혼자만 거슬러 올라가는 꼴이었다.
그리고 바로 반대편에서, 채원우 역시 그런 모양새로 약속 장소로 오고 있었다.
해가 지니 초여름 더위가 물러나고 선선한 바람만 불었다. 발걸음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딱히 로맨틱한 제스처나 서프라이즈를 계획한 건 아닌데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떨려 왔다.
백겸은 저 반대편에서 자신을 향해 오는 채원우를 어렵지 않게 알아봤다. 어느 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 있든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채원우도 마찬가지였다. 백겸이 그를 발견하기 전부터 채원우는 그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숨죽여 기다렸다. 백겸이 자신을 발견하기를. 자신을 발견한 후에는 마치 딱 맞는 타이밍에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활짝 웃었다.
그런 식이었다. 숨죽여 기다리고 기다렸으면서, 백겸이 알아본 순간 우리는 운명이란 것처럼 화색을 띠었다.
양백겸이 생각하는 모든 좋은 타이밍과 기가 막힌 우연들은, 원우가 오랜 인내심과 기다림 끝에 얻어낸 작품들이었다.
채원우와 양백겸을 제외하고 주변 인파들은 빠르게 빠지고 있었다. 던전 경보와 함께 공기 중에는 반짝이는 물질이 산란했다. 전압을 대폭 줄여 흐려진 가로등 불빛마저 분위기를 더해주는 요소가 되었지 반대는 절대 아니었다.
흐린 가로등 불빛에 연하게 반짝이는 공기가 가득 찬 도심 속의 개천이라니, 완벽했다. 설령 바로 자신들이 선 이 자리에서 던전이 솟구쳐도, 백겸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채원우 헌터.”
징검다리 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섰다. 원우는 백겸의 손을 보았다. 하나는 주머니에 꽂혀 있었고 하나는 바깥으로 나와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색은 좀 안 어울렸지만, 당연히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양백겸이 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꽃다발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이었다.
“네. 양백겸 가이드님.”
채원우는 느긋하게 대꾸했다. 사실은 심장이 엄청나게 뛰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너무 심하게 펄떡거려서 끝내 입 밖으로 튀어나오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러면 죽고 말 테니까. 백겸을 두고 죽을 수는 없었다. 채원우는 혀를 꾹 깨물었다. 아픔에 정신을 차리려고.
한편 백겸 역시 드물게 긴장한 상태였다. 수없이 머릿속으로 준비한 일인데도, 정작 상황이 닥치니 엄청 떨렸다.
가이드와 헌터로서 던전의 조짐을 감지하고 신체가 흥분 상태로 돌입했는데, 거기에 사랑이라는 화학적 반응까지 더해져서 걸어 다니는 폭죽과도 같았다. 눈앞이 더할 나위 없이 반짝였다.
백겸은 오늘 오전에 갓 받아 온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열고 원우의 앞에 내밀었다.
“영원히 나랑 파트너를 맺어줄 의향이 있습니까?”
“…….”
원우의 눈이 커다랗게 커졌다.
“너 솔직히 눈치 깠지?”
백겸이 멋쩍게 물었으나 전혀 아니었다. 원우는 이런 말을 듣게 될 걸 단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었다. 그건 너무 사치스러운 욕심이었으니까.
눈앞에 있는 반지가 혹시라도 환상일까 봐, 원우는 청계천 물을 들어 올려 제 뺨을 때렸다. 갑자기 물따귀를 맞은 원우는 촉촉하게 젖은 미인이 되어서, 입술을 벙긋거리며 울기 직전까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상황만 생각하면 웃음이 나야 하는데 그 모습이 말도 안 되게 예뻐서 백겸은 그냥 말을 잃었다.
“형이 후회하게 되면 어떡해요?”
“그러지 않게 만들어야지. 설마 그럴 자신이 없어?”
“아뇨. 아뇨, 없다는 게 아니라, 아니, 있는 것도 아닌데…….”
곧 우르릉 꽈릉 하는 소리가 났다. 던전이 올라오려는 모양이었다. 채원우는 진동에 반지를 잃어버릴까 봐 서둘러 꼈다. 그러자 씩 웃은 백겸이 주머니에서 다른 케이스를 꺼내서 내밀었다.
설령 원우가 폭주하여 온 세상이 물에 잠기는 순간이 오더라도, 잠깐의 거품을 만들어 그 속에서, 원우를 자기 손으로 끝내줄 수 있는 마법의 반지를.
채원우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가져가 기적 같은 순간을 맛보았다.
바로 백겸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며 영원을 약속하는 일.
“나 이제 비렁뱅이라 네가 먹여 살려야 해.”
반지 낀 손을 살랑거리면서 말하는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혔다. 기적을 목도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의 채원우였다.
“내가 정말 그래도 돼요?”
“어.”
“내가 정말 형을 먹여 살리고 형을…… 평생 독점해도 되는 거예요?”
“그래야지. 나 거지고 백수인데.”
“내가 정말…… 형 곁에 있어도 괜찮겠어요?”
채원우의 뒤로 꽈배기 같은 탑이 있었는데 그것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거기서부터 던전이 올라오고 있었다. 매립형에서 위로 솟는 건 고전적인 방식이었다. 이제 자신들도 어서 떠나야 했다.
백겸은 원우의 손을 꼭 잡고 그 손가락 마디에 입 맞추었다.
“영원한 파트너라고 했잖아. 내가 말한 게 바로 그런 거야.”
던전이 열렸다. 저기서 나올 게 꽃바람일지, 몬스터일지, 아무것도 없을지는 그 누구도 모르지만, 채원우와 양백겸으로서는 새로운 문이 열렸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계약직만 하다가 이 바닥을 뜨려 했는데, 계획이 꼬여서 정규직보다 힘들다는 종신 계약을 하게 되었으니 인생 진짜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뭐가 나올지 모르는 던전도 당연했다.
백겸은 원우의 손을 잡고, 원우가 선 쪽으로 크게 발을 내디뎠다.
“이제 집에 갈까?”
마주 보고 활짝 웃는 채원우의 뒤로 반짝거리는 바람이 부드럽게 흘러 둘을 감쌌다.
<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