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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다루는 방식을 보고 채원우가 중력의 형태를 이용해서 물을 사용한다고 여겼던 연구원들이 대다수였다. 심지어 강윤엽도 그랬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인데, 채원우의 능력에 비밀은 없었다. 양백겸이 종종 느낀 표현대로, ‘자기 몸의 일부처럼 다룬다’는 게 진실 그 자체였다.
채원우는 물을 다룰 때마다 자신의 신체가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공격을 받을 때 대미지를 입진 않지만, 손끝처럼 섬세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폭주 직전까지 간 이후로 한층 더 나아갔다. 신경망을 멀리 펼친 것처럼 감지까지 가능해진 거다.
지금 그의 정신은 강윤엽에게 닿아 있었다. 강윤엽은 돈을 써서 공항에 숨어 있었다. 보수한다는 핑계를 대고 막아둔 라운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곳이라면 감쪽같이 숨을 수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하지만 사람은 물이 필요하고, 채원우를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로 겨우 탈수를 면할 정도로만 수분 섭취를 하는 강윤엽이라도 주변에는 언제나 물이 흘렀다.
강윤엽이 멀찍이 둔 컵에 담긴 물이 찰랑거리더니, 컵이 앞으로 넘어졌다. 강윤엽은 질겁하며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제는 3일에 한 번씩 하던 샤워도 더는 못 하게 될 거다. 채원우는 흩어지는 물에서 연결을 끊은 뒤 씩 웃었다.
연습 끝에 해낸 거다. 먼 거리에 있는 물과 연결하는 것을. 비록 대량의 물을 조종할 수 없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사람들은 물을 간과한다. 물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이 주변에 얼마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식하지 않는다. 채원우는 아니었다. 그에게 가장 쉬운 게 물인데도 그는 한 번도 물을 무시하지 않았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꽃이 수백, 수천 송이로 보였다. 초점이 잘 맞지 않고 세상이 핑핑 돌았다. 멍하니 열이 치솟는 이마를 짚고 있다가 손을 뻗어서 허우적대며 피어싱을 꽂았다.
백겸이 여러 개의 피어싱을 사준 이후로 그는 그걸 섞어 달았다. 모양이 다양한 덕에 백겸은 채원우가 헌터청에서 그대로 훔쳐 낸 가이딩 보조기구를 사용한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너 왜 이렇게 피곤해 해?’
남용하면 안 되는 기구를 빼도 상관은 없었다. 자신이 백겸에게 칭얼대며 매달리면 백겸은 걱정을 줄줄 흘리면서 꼭 껴안아 줬으니까.
‘능력도 안 쓰는데 상태가 왜 이러지?’
‘가끔 이래요. 폭주 부작용인가 봐.’
변명거리도 완벽했다. 채원우가 한껏 불쌍한 척하며 폭주 부작용 같다고, 그냥 꽉 안아달라고 하면 양백겸은 그냥 안아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키스도 해주고 열이 내린 이후에도 안은 팔을 풀지 않고, 그랬다.
백겸은 난처한 상황에도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항상 단단한 다정함을 보였다. 걱정을 해도 동시에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그게 채원우에게는 토끼 굴처럼 보였다. 평소에는 잘 가려뒀다가 갑자기 뿅 나타나선 전혀 다른 방향의 세계로 자신을 데려가는 거다.
그 세상은 안전하고 부드럽고 싸울 것도 없고 그냥…… 그냥 전부 좋았다. 무엇보다 양백겸이 있어서 좋았다.
그러니까 그가 토끼 같은 내 애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활짝 웃게 되는 거다.
“아무래도 내 얼굴에 반한 것 같아.”
인공적인 안정화가 진행될 때까지 누운 채로 채원우가 실실 웃었다. 사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외모 말고는 그렇게 내세울 게 없었다. 헌터청 바깥에서 생활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고 능력은 반 토막 이하로 떨어졌다고 사기를 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남은 건 외모뿐이다. 외모라도 곱게 가꾸는 수밖에 없다.
안정화가 끝난 게 느껴졌다. 사실 가장 빠르고 뒤끝 없고 효과적인 건 양백겸을 껴안고 있는 거지만, 요즘 그는 바빴다. 어딜 가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지만 참았다.
채원우의 윤리 강령은 모호했지만, 백겸에게만은 조금 또렷하게 정해졌다. 백겸을 대할 때, 채원우는 지키는 선이 있었다. 물론 그 기준은 양백겸이 싫어할까 좋아할까였고, 미행은 백겸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에 속했다.
“설마 헤어지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오늘도 백겸은 새벽같이 나가며 자신에게 일볼 게 있는데, 오늘이면 끝나니까 저녁에 만나서 맛있는 거 먹자고 했었다. 할 말이 있다고.
채원우는 그 말이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너 때문에 도망자 신세가 된 거 정말 후회스러우니, 지금부터라도 각자 자유롭게 살자는 말일까 봐 겁이 났다.
백겸이 없다면 자유롭게 사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더는 빛나는 것도 없고 재미도 없고 무엇을 먹어도 맛도 없었다. 아주 매운 라면을 먹어도 혀가 아프지도 않을 거다. 그러느니 다시 헌터청에 돌아가서 폭주해, 끝내 뻥 터져 별이 될 때까지 굴려지는 게 나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니 자연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원우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은 없으니까.
* * *
채원우가 고민하는 시각, 백겸은 모든 준비가 끝나기 전에 공원에 앉아 있었다.
날씨가 훅 더워져서 사람들은 거의 실내에 있었다. 백겸 역시 찌는 듯한 더위에 손으로 햇빛을 가린 채 오래도록 액정을 들여다봤다. 화면이 따끈따끈해질 때까지 보고, 몇 번이고 꺼지면 다시 켜서 보고 난 뒤에서야 확신했다.
<종의기원: 아무래도 던전에 대한 조사가 필요한 거 같아요 전문적으로 채취하고 그러다 보면 이 미지의 우주와 이 이야기의 진위도 밝혀지지 않겠습니까? 9시간 전
└낭만어부 : 진위는 무슨· · 이건 진. 짜다! 너야말로,.. 음모를 거두도록 · !>
헌터청에서 단 댓글이 분명했다. 한동안 멈춰 있던 댓글창에 새로 달린데다 내용도 맞아떨어졌다.
백겸은 씩 웃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는데 오히려 잘 됐다.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다. 마침 오늘, 하필 오늘 이렇게 동맹을 맺게 되다니!
앞으로 한동안은 지금 같은 여유를 느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귀찮은 떨거지들은 떨어뜨리게 됐다. 이 댓글을 확인하자마자 계속 신경 쓰이던 시선도 똑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최곤데.”
백겸이 허공으로 번쩍 들어 올린 핸드폰을 보며 씩 웃었다.
* * *
원우는 던전마다 돌았다. 딱히 사명 의식이나 세계를 구해야 한단 정의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심심하니까, 맛이 간 것처럼 공격성을 보이거나 던전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몬스터가 있으면 퇴치하거나 격리했다.
아직까지는 공격성을 보이는 패턴을 종잡기 힘들었다. 이쪽에서 공격할 때면 당연히 반응이 있는데, 이처럼 온순히 있다가 갑자기 공격성을 보이는 경우도 있어서다. 혹시 발정기가 따로 있나? 몬스터들의 발정기 같은 건 하나도 안 궁금한데…….
한참 몸을 움직이고 능력을 쓴 탓에 피어싱을 더 주렁주렁 단 원우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몸을 식혔다.
주변을 떠다니는 물방울들은 던전 내에서 어룽지는 햇빛에 따라서 비눗방울처럼 빛났다. 그런 풍경에는 감흥이 없어 시선을 주지도 않는 원우는 시간만 확인했다.
지금이 3시 반이니까, 돌아가서 씻고 팩도 좀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 백겸과 만날 시간이 될 것 같다.
이제는 해가 완전히 길어졌다. 백겸과 처음 만났던 계절도 얼마 안 남은 거다. 신기할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헌터청에 있었을 때보다 훨씬 느긋하게 지냈는데도, 일주일이 하루같이 흐르곤 했다.
원우는 밖을 나서기 전에 집을 둘러봤다. 백겸이 충동적으로 샀다는 집은 일찍이 던전이 터진, 지반이 불안정한 레드존에 있었고 주변에는 편의점 하나 없었다. 사람들은 한 번 떠난 뒤로 돌아오지 않았고 밤이 되면 아주 캄캄했다.
그래도 따뜻한 물이 나오고 난방도 잘되었고 여름에는 바람이 솔솔 불어서 시원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둘을 위한 집이란 게 분명했다.
처음에는 약간 허전했는데 자신의 몇 안 되는 짐을 들이자마자 그런 느낌은 없어졌다. 게다가 점점 늘어나는 옷가지도 막힘없이 들어갔다. 어떤 물건을 사든 그곳이 제자리인 양 딱 잘 어울렸다.
사실상 베이스캠프에 가까운데도 늘 정이 갔다. 마당에 캠핑 의자를 펼쳐 놓고 모닥불을 피우기도 했다.
사람들이 포기한 장소라서, 자신과 백겸에게는 완벽한 공간이 된 거다.
원우는 상상력이 바닥인데도 거실 한가운데에 서면 백겸의 뒷모습을 어렵지 않게 그려낼 수 있었다. 백겸이 이 가운데에 서서, 존재하지 않는 자신이 이 집을 돌아다니고 종종 실수로 사고를 치고 생활하는 환상을 좇는 모습을 말이다.
애틋하면서도 짜릿했다.
“세상이 끝나더라도…….”
조용히 중얼거렸다. 설령 세상이 끝나고 모든 세상이 이곳처럼 버려지더라도 원우는 이곳만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난생처음 가진 애착과 집착은 여간해선 사라지지 않을 거다.
강윤엽은 어린 원우에게 네가 세상을 지켜야지, 하고 사심 가득한 목소리로 세뇌해 왔다. 그 기억은 분명 원우의 머릿속에 나사못이 박힌 것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다. 다만 그 세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헌터청에서만 생활하던 채원우가,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에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이었다. 무성의하고 무심하게 관성적으로 지켜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 세상이 양백겸이 되니 달라졌다.
채원우의 세상은 아주 작게 축소되고 눌러 담아져서 양백겸 개인의 몸으로 변했다.
작아지고 뭉쳐진 만큼, 그 중력은 엄청나서 평생 그곳에 끌려갈 거다.
원우는 세상을 지킬 거다. 양백겸이라는 그의 세상을.
* * *
“어. 이제 괜찮은 거 같아.”
백겸이 꽃을 고르며 승규에게 더는 추격자나 미행하는 요원이 붙지 않을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 얼마나 믿어도 될지 아직 모를 일이라고는 해도 일단은 호신호였다.
앞으로 오히려 더 바빠지겠으나 잘된 일이다. 몇 달간 백수 노릇을 하고 깨달았는데, 자신은 의외로 계속 움직이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 채원우와 껴안고 있는 건 좋은데 그래도 좀 더 바쁘게 사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이 계속 들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