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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97화 (9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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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으로 돌아왔다. 글램핑처럼 텐트를 치고 안에는 온갖 토퍼를 잔뜩 쌓아 여간한 호텔보다 푹신한 침대를 만들어놨다. 씻는 건 내가 산 우리 집에서 하고 잠은 던전으로 쏙 들어와서 여기서 잔다. 아직 추적이 끝났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채원우는 최근 던전 안의 유순한 몬스터들에게 괴랄 맞은 이름을 지어주는 것으로 바빴다. 그 이름 목록에는 김춘식, 박태기, 서꺽정 등등이 있다. 택배 수취인 이름으로 쓰면 적어도 누가 훔쳐 갈 우려는 전혀 없을 이름들이었다.

여전히 나는 몬스터들에게 정을 줄 수 없었다. 그건 평생 그럴 거다. 채원우도 저것들이 무슨 순한 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하고 있지만, 몬스터들이 공격성을 보이면 바로 상대할 게 뻔했다.

몸에 익은 공격성은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우리는 아직도 뒤에서 서로를 껴안을 때 상대가 누군지를 알면서도, 팔꿈치나 발로 후려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줘야만 했다.

그런 식으로 평생 고치지 못할 수도 있는 습관을 인정하며 서로 받아들이며 사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없어지지 않는 던전에 적응하며 출퇴근을 하고 등하교를 해야 하는 것처럼.

나는 게으르게 발을 까딱거리며 박선행 씨의 채널을 확인했다. 눈이 번쩍거리는 영상에는 시선 하나 주지 않고 댓글만 열심히 뒤졌다. 최근 댓글이라고 해봐야 죄다 빠르면 일주일, 늦으면 3년 전이었다. 허탕이었다.

“쯧. 빠릿빠릿하지 못하네.”

헌터청이 우리 제안을 받아들일 거란 확신이 있으니 남은 건 기다림뿐이었다. 나는 텐트 바깥으로 고갤 살짝 뺐다가, 원우가 저 멀리서 퍼덕거리는 날개가 달린 돼지처럼 생긴 몬스터를 쥐고 노는 걸 확인했다.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패드를 꺼냈다.

“형이 죽이는 거로 해줄게.”

몰래 중얼거리고 웃음을 참은 뒤 그리던 것을 마저 그리기 시작했다.

두 개의 동그라미였다. 하나는 초록색과 흰색의 보석이 박혀 있고 하나는 파란색과 흰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박을 재료를 떠올리면 내가 곧 파산할 거란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내 평생 한 번도 바라지 않은 일이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엎드린 채 발바닥끼리 비비적대며 나머지 디테일을 채우고는 다시 뒹굴 누워 내가 그린 것을 한참 보았다. 그러다가 씩 웃고 중얼거렸다.

“끝내주는데?”

* * *

을지로 3가. 장인들의 거리.[Hi]

나는 모자를 눌러 쓰고 선글라스를 낀 채 저번에 한 번 출동했던 그 장인 어르신들의 공방으로 향했다. 여기는 워낙 신분을 밝히지 않는 사람들이 오가 이 정도 변장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나라를 파는 일만 아니면 고객은 모두 평등하다. 을지로의 신념이었다.

여기는 헌터로 등록하지 않고 숨어 사는 미등록 헌터, 이미 가이딩 대체 약물에 중독되어 더 큰 다운계 안정 보조기구가 필요하나 헌터청에 알릴 수는 없는 헌터, 최근 들어 중요성이 새삼 인정받고 있는 지역 자치 영소 헌터 조합원들의 아지트였다.

가이드는 헌터청이 독점한다. 수요는 높은데 공급은 적으니 채원우가 했던 부담이 큰 가이딩 보조기구들도 뚝딱 만들어내는 이곳으로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만은 다른 이유로 온 거지만. 나는 아주 달콤하고 로맨틱한 음모를 꾸미러 온 거였다.

“사장님, 계세요?”

양철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선 끊임없이 화염이 나오고 있었다. 마스터 급에 해당하는 제조계 헌터들만이 다룰 수 있는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역시 저번에 왔을 때 제대로 봐두길 잘했다. 이곳이라면 내가 원하는 물건을 완벽하게, 완벽한 품질로 만들어 내 재산을 거덜 내줄 거다.

“누구여.”

한 손엔 망치, 다른 한 손에는 거대한 집게를 든 사장님이 나왔다. 세월 때문에 자연히 탄력을 잃은 피부는 쪼글쪼글했지만, 근육은 여전히 바짝 마른 피부 아래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커다란 망치와 집게 때문에 더 도드라졌다.

“저 혹시 기억하세요?”

나는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드렸다.

“전에 율무차 타주셨는데. 헌터청에서 오전에 출동했었고 당일 신고는 미수로 접수되었구요. 예쁘게 생긴 남자애가 저 좋다는 티를 못 숨겨서 막 질색팔색하시고 그랬잖아요.”

“지금 자랑하는 겨, 아님 인사를 하는 겨.”

“둘 다입니다, 어르신.”

“어르신이고 어린이고 나발이고. 나는 하여튼 기억 못 해. 내가 이 자리에서 율무차만 천 잔은 타줬을 거야. 헌터청 놈들도 천 명은 봤을 거고.”

뭐, 큰 기대는 안 했다. 헌터청 역시 나라를 파는 매국노 새끼들은 아니니 이곳의 소중한 고객이었을 테고 말이다.

나는 오래 끌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 개인적 의뢰를 드리러 왔거든요.”

“무슨 의뢰?”

물을 벌컥벌컥 드시는 모습이 참 와일드하시다며 박수를 치고 아부를 떨어댔다. 그러면서 내가 그린 걸 슬쩍 내밀었다.

“요 초록색은 회복석으로 박았으면 하는데요.”

“팔찌야?”

“아니요. 반지요. 사이즈는…… 이거면 됩니다.”

나는 채원우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꼭 맞았던 반지를 꺼내 내밀었다. 장인은 그걸 주머니에 날름 넣고는 내 디자인을 꼼꼼히 확인했다. 내가 중졸이라 그렇지, 재능이 좀 많다. 그림도 디자인도 꽤 하잖아?

“촌스러운디.”

“…….”

“자고로 반지라면 두툼한 금가락지에 커다란 다야 하나 딱 박고 말여.”

다야라면…… 다이아겠지……?

“요즘 다이아보다 귀한 게 던전석이잖아요.”

“내 말이. 다이아보다 귀한 던전석을 이렇게 가락지 둘러 만든다고? 돈은 있어?”

나는 보시는 앞에서 은행 어플에 로그인해 조용히 잔액을 보여드렸다. 사장님께서는 안경을 이마 위에 얹고 팔을 쭉 빼 멀리 한 뒤 숫자를 세 번이나 세셨다. 내 전 재산인데, 설마하니 부족할까 봐 염통이 쫄깃해졌다.

“……파란색은. 파란색은 뭐로 해주면 되는디.”

승낙이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고 말했다.

“바람이요.”

“이 정도 크기면 산들바람 정도밖에 안 될 텐데? 끽해야 공기방울 불 정도겠구먼.”

“네. 그거면 됩니다.”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물에 잠기더라도 숨 쉴 수 있는 공기방울을 만들 정도면 딱 좋아요.”

바람을 운용할 수 있는 희귀한 던전석을 박은 반지는 내 것이 될 거고, 회복석을 박은 반지는 채원우의 것이 될 거다. 내가 받은 만큼 돌려줄 생각이었다.

“연락하면 와. 연락처 남기고.”

와일드하게 이번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라이터 삼아서 담뱃불을 붙인 사장님 뒤로 연락처를 남겼다.

“선금은 얼마 드리면 될까요?”

이번에는 사장님이 억 소리가 나는 숫자를 휘갈겼다. 바가지가 절대 아니었다. 던전석은 저 조그마한 사이즈로도 더럽게 비쌌다. 심지어 개중 가장 비싸다는 5원소계와 회복석이었다. 사장님이 적어준 숫자를 이체하다가 궁금해서 충동적으로 물었다. 채원우가 내게 줬던 회복석 사이즈를 허공에 대강 가늠해 보였다.

“이 정도 크기의 회복석 시세는 요즘 어때요?”

“두세 배는 올랐지? 부르는 게 값인데 물량이 없고, 나오지도 않는데 몇 안 되는 원석 중 하나가 헌터청에서 깨졌거든.”

멋쩍은 웃음이 절로 났다. 박선행이 피우는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는 모습에서 진짜 장인의 기백이 느껴졌다. 속으로 감탄하며 보다가 홱 돌아보시는 얼굴에 눈이 마주쳤다.

“그 귀한 돌 냅다 던져 준 멍청한 놈은 잘 지내냐?”

멀뚱히 눈을 깜빡이다가 씩 웃었다. 이럴 줄 알았지. 기억하실 줄 알았다니까. 수기로 쓰는 장부 숫자도 틀리지 않는 분들이었다. 엑셀보다 정확했고 외상값에 대해선 핸드폰 알림보다 빨랐다.

“그럼요. 제가 잘 챙기고 먹이고 삽니다.”

“그래. 잘됐다. 사람 만드느라 고생 좀 하겠구나.”

“서로 배우며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지. 빨리 적응하는 놈이 오래 버티는 세상이야. 갈대처럼 살아야 해. 뻣뻣하면 태풍이 왔을 때 부러지기만 한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럼 연락하면 늦지 않게 재깍재깍 오고.”

“네.”

“다음엔 몇천억짜리 원석 덜렁 던져 준 멍청한 놈도 데려오고. 반지 구녕에 손가락이 맞나 안 맞나 끼워봐야 하니까.”

그러곤 아주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셨다. 더 오래 있을 필요도 없었고, 사실 내가 나온 사이에 원우가 깨어났을까 하는 걱정도 있어서 나도 서둘러 자리를 떴다.

돌아오는 길에 소문이 자자하다는 에스프레소 바에 들러 각설탕과 커피를 챙겼다. 이제 나한테는 지하철보다 편한 던전을 통해 깡충깡충 굴을 넘어 내 굴까지, 우리의 굴까지 도착했다.

채원우는 잠이 채 덜 깼는지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 앉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다들 어디 갔는지 몬스터들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뒤에서부터 다가갔다. 갑자기 채원우가 고갤 홱 돌리는데 그 예쁜 얼굴에 서린 기합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조금 쫄고 말았다. 자존심 상하게.

“악몽 꿨어? 인상 한번 더럽네.”

커피를 내밀며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자 채원우가 눈을 끔뻑이며 나를 봤다.

“형이……. 일어났는데 형이 없어서…….”

“커피 좀 사 오느라고.”

“……내가 내려주잖아요.”

“가끔은 사제 커피가 땡기니까. 마셔. 완전 진해.”

무심코 들이켰다가 얼굴을 오만상으로 구기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챙겨 온 각설탕을 모두 채원우에게 줬다. 채원우는 세 개는 커피에 녹이고 하나는 입에 물어 오래오래 녹여 먹었다. 불퉁한 그 옆모습이 어린애처럼 귀여웠다. 한때는 살인마 소릴 들었고, 인생 대부분은 괴물 소리를 들었을 내 짝.

종장

채원우는 겉으로 보기에는 잠든 것만 같았다. 그새 친해진―혹은 길들인― 몬스터들이 다가와서 던전에서만 자라는 꽃 따위를 채원우의 주변에 놓았다. 그래서 꽃으로 채운 관에 누운 백설공주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섬뜩할 정도로 차분한 풍경 속에서 채원우는 사실 잠든 게 아니었다. 그는 최근 새로운 취미에 빠졌다. 취미치고는 좀 살벌하게 쓰일 용도가 있긴 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채원우는 모럴에 대한 경계선이 흐렸고, 헌터청에서, 특히 강윤엽에 의해 주입된 윤리 강령은 애매모호해서 행동하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그의 정신은 아주 먼 곳까지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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