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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96화 (97/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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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볼래요.”

의외로 채원우가 고른 건 바로 그 오락성 괴수 호러 영화였다.

“히어로물 안 보고? 전에 본 거 다음 건데.”

“사실 봤어요.”

“뭐?! 언제!”

“제가 형보고 가라고 한 다음 혼자 남아서요……. 온갖 던전에 다 참여해도 시간이 남고 잠이 안 와서 영화라도 보는데, 아는 게 이거밖에 없었거든요. 제가 가장 마음 가던 캐릭터가 죽어서 아쉬웠어요.”

“아……. 인기 많았지. 그 사람.”

“사람? 아닌데. 전 외계인이요. 그, 피부 보라색에 턱이 마들렌처럼 생긴 거요.”

“오……. 그 악역?”

“네. 하는 짓이랑 결과물이 딱 던전이었잖아요. 갑자기 나타나선 사람들 반씩 죽이고.”

“근데 왜 좋았어?”

나는 내 토끼 같은 애인이 확 사람들의 반을 죽이고 싶다고 할까 봐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화는 영화로, 그 빌런이 내 애인이 되는 건 곤란하다.

그런데 채원우가 꺼낸 이유는 상당히 의외였다.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친숙해서요. 내가 잘 아는 게 던전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채원우는 영화를 고르기도 전에 미리 산 팝콘을 한 주먹 집어 하나씩 먹었다. 그 대답을 듣고 마음이 쓰였다. 아는 게 그런 거밖에 없다니. 나도 한 염세주의자였지만, 이젠 아닌데.

내 인생은 세 분기로 나눌 수 있었다. 곤충처럼 머리, 가슴, 배로 나눌 수 있단 말이었다. 일단은 던전 발발 전, 가족들과 평범하게 살 때. 그다음은 던전이 터진 이후 계약 가이드 양백겸의 삶, 그리고 지금. 채원우와 함께 사는 도망자 생활.

셋 다 완벽하진 않아도 그런대로 살 만했고 나름의 욕구도 있었다. 그 욕구는 언제나 살고자 하는 강렬한 생존 욕구였다. 더 잘 살고 싶다. 재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 평범한 사람들처럼 잘 살고 싶다는 건 채원우를 만난 이후 좀 변형된 욕구지만,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채원우가 남아 있었다. 채원우는 잘 산다는 게 뭔지도 모를 거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를 거다. 채원우를 가르쳐 주고 이끌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상당히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에휴. 내가 애인이 아니라 부모님 노릇을 해야 한다니. 그것도 이 나이에.”

과장스럽게 중얼거린 말에 채원우가 당황해서 나를 쳐다봤다.

“형, 그런 플레이 좋아해요? 하고 싶어요?”

처음에는 무슨 소리야 했다가 깨달았다. 와, 미친놈. 역시 상식이 없는 애한테 인터넷이라는 위험한 세계를 접하게 하는 건 옳지 않았다. 나는 채원우의 입에 팝콘을 처넣고 상냥하게 웃었다.

“말을 말자. 아무튼 영화 이거 본다고? 이거 무서운 영화인데 괜찮아?”

“괜찮아요. 근데 너무 무서우면 형 껴안는 척하면서 가슴이나 허벅지 좀 만질게요. 그럼 안 무서울 것 같은데요.”

“내가 무서울 거 같아졌어.”

투덜거리고는 예매하러 갔다. 우리는 주로 현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솔직히 여유 있게 쓸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둘 다 하이리턴 하이리스크의 쓰리디 직종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돈은 앞날을 걱정할 필요 없을 정도로 넉넉한데도, 자금 추적 때문에 내가 미리 인출해 둔 돈만 쓰는 중이었다. 그것만 아니라면 평생 일할 필요 없지. 특히 채원우는 내 재산보다 세 배는 더 많이 쌓아뒀을 게 분명한데.

빨리 추적이 끝나면 좋겠다. 그래도 던전에 걸친 생활을 해야 하지만 던전 조사를 핑계로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그러고 싶거든. 제주도여도 감지덕지 좋겠다.

“가자. 바로 입장하래.”

돌아와서 표를 내미니 채원우가 끄덕이다가 다시 나를 끌었다.

“우리 팝콘 더 사가요.”

아무래도 채원우는 아직도 성장기인지 왕성한 식욕을 보였다. 던전 공략을 할 때야 등급이 워낙 높아 그만큼 쓰이는 열량이 많아 대식가였던 게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이젠 등급도 바닥을 치는데 여전히 많이 먹는 걸 보면 성장기가 분명했다.

저기서 더 크면 키스할 때 불편한데. 그래도 먹고 싶다는 걸 정 없게 금지할 수는 없었다. 그건 한국인으로서 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짓이었다.

“그래. 반반 하자.”

“어니언이랑 오리지널?”

“어엉.”

채원우가 길쭉한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매점으로 향했다. 주문을 받는 앳된─내 기준이라 채원우하고는 또래일 거다─ 아르바이트생이 얼굴을 붉히는 게 보였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쟤는 제 거라서요.

채원우도 다양한 만남을 가져보는 게 인생을 위해 좋고, 그간 다양한 파트너를 만나온 나와 비교해서 공평성도 챙길 수 있는 걸 알지만, 그 꼴은 도저히 볼 수 없다. 차라리 내 눈을 뽑아라.

지금까지 파트너가 다른 사람이랑 자든 말든 관심 없을 때는 몰랐는데, 나는 독점욕이 상당히 센 것 같았다.

채원우가 다른 사람 거가 되는 거? 저 예쁜 눈이 다른 사람을 쫓아다니는 거? 그런 건 절대 못 본다.

그런 의미에서 원우의 능력치가 낮아졌다는 건 희소식이었다. 언제든지 내가 제압할 수 있단 뜻이니까.

개쓰레기 발언이라고요? 인정합니다. 하지만 쟤를 보세요.

나는 내 쪽으로 걸어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는 채원우를 보며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아니, 쟤를 좀 보라니까요. 그럼 나를 이해하게 될 테니까.

내 거.

나는 채원우를 갑자기 꽉 껴안았다. 공공장소라는 인식도 필요 없었다. 눈치를 보며 포기하거나 갇혀 지내기에는 삶은 너무 짧았다.

영화가 끝났다. 솔직히 졸까 봐 걱정했는데, 초반에는 원우의 반응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후에는 의외로 내가 더 즐기고 있었다. 오랜만에 봐서 재미있게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채원우랑 보기 때문에 재미있는 건지 모르겠다.

다행인 건 채원우가 중간중간 나를 껴안으며 무서운 척을 하는 게 분명한 태도로 내 옆구리나 허벅지를 만지작거렸다는 거다. 그 건 곧, 이 영화로 채원우의 어떠한 PTSD 요소도 눌리지 않았다는 거고.

그런 트라우마가 있긴 한가 싶지만……. 혹시 모른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없어도 나중에, 나와 살며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올바르지 않고 비정상적이었단 걸 완전히 깨달은 후에 그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요즘 심리상담에 대해 공부해 볼까 한다. 공부. 고등학교가 눈앞에서 무너진 이후로는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었던 적도 없는 그 활동.

이제 영화는 결말로 향해 가며 점점 더 피가 난무하고 뼈가 부러지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는데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애초에 무섭지도 징그럽지도 않아서 딴생각을 하기엔 딱 좋았다.

공부를 진짜 좀 해보는 게 좋겠다. 채원우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날개 달린 뱀이요. 저런 작은 날개로는 몸을 지탱하지 못할 텐데. 저런 몬스터 실제로 봤는데 날개는 사실상 초음파를 뿜어내는 기능이었어요. 눈이 퇴화한 상태였거든요.”

채원우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영화가 끝났음을 알았다. 나는 대충 고갤 끄덕였다. 어차피 무슨 말 하는 건지 안다. 영화에서 나오는 괴물들의 물리적 한계와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살상 효과 같은 거겠지. 나도 이미 생각했던 거라 딴생각을 했단 걸 들키지 않고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던전이 저런 식이면 차라리 더 쉬웠을 텐데.”

“그런가?”

던전의 완전한 공략이라는 게 애초에 가능하긴 할까. 어쩔 수 없이 던전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게 호모 사피엔스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멸종하지 않는 것에 감사합시다, 하고 네안데르탈인이 말할 듯.

어차피 던전도 우주의 부산물이고 우리는 모두 별에서 태어난 존재니까,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거나 그 시도가 안 먹히면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지 뭐.

그래도 확실한 건 어떤 결론이 나든 나는 채원우 곁에 있을 거란 사실이었다. 이 낯간지러운 결심은 매일매일 점점 더 공고해졌다. 이 결심을 눈에 띄게 드러내고 싶을 정도로 강해진 건 최근의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가판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통로 가운데에 선 가판들은 디퓨저, 액자, LP판과 꽃다발, 그리고 액세서리를 팔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온갖 큐빅 액세서리 중 유독 눈에 띈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반지였다.

반지! 그래! 왜 저 생각을 못 했지?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반지를 물끄러미 봤다.

“마음에 드는 거 있어요?”

채원우가 물었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이었다. 물론 여기서 사지는 않을 거다.

“너는 액세서리 관심 없…….”

여전히 시선은 매대에 둔 채로 무심코 물었다가 입술을 꾹 닫았다. 경솔한 질문이었다. 채원우의 눈썹이며 귀며 여전히 피어싱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제는 필요 없는 가이딩 보조 도구들을 모두 떼어냈다. 하지만, S급일 게 분명한 헌터의 자가 회복력을 막기 위해 무언가 특수한 효과를 부여했는지, 채원우의 몸을 뚫은 구멍들이 흉터로 존재했다.

나는 그것들을 속상한 눈으로 봤다. 채원우는 내 시선에서 그 마음을 읽었는지 씩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링 형태와 딱 붙는 형태의 피어싱들을 한가득 쥐었다.

“저 이것들 사주세요.”

“왜……?”

“구멍 아깝잖아요. 평생 막히지도 않을 건데. 기분에 따라 좀 끼고 그러지 뭐. 형, 얼굴에 반짝이는 게 있으면 그 사람이 세 배는 더 예뻐 보인대요.”

옛날 커뮤니티 같은 데서 떠돌아다녔을, 근거 없는 헛소리가 분명한데도 나는 넘어가 줬다. 채원우가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거 없는 헛소리인데도, 채원우 얼굴이 더 반짝이는 건 나도 찬성이었다.

“알러지 같은 거 없지?”

“손님. 걱정 마세요. 이건 코팅되어 있어서요, 알러지 안 생겨요!”

사실 생길 리가 없긴 했다. D급으로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신체 능력이 발달되어 있으니까. 나는 거금을 쓰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갖 생색을 다 내며 채원우가 잡아 올린 것들을 결제했다.

그리고 내가 관심이 있는 척, 슬쩍 채원우의 손가락에 맞는 반지를 찾았다. 왼쪽 네 번째 손가락. 그 반지 역시 샀다. 진짜 우리 것을 만들 때 사이즈를 참고할 게 필요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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