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던전은 그냥 닫힌 상태로 불쑥 솟아올라서 수도관만 망가뜨리고 말았다. 구멍이 있긴 한데 나오는 몬스터는 없고 들어가는 사람도 당연히 없었다. 아마도 우리 빼고는!
그곳에 던전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채원우와 나는 그 던전이 바로 우리를 위해 뚫린 거라고 제멋대로 의미를 부여했다. 밤에 그 던전을 통해 밖으로 나와서 꼬불꼬불 돌아가는 도로를 오르다 보면 분위기가 살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사람들 잘 안 다니는 시간에, 큰 피해―특히 인명 피해―가 일어나지 않는, 조용하고 얌전한 혹 같은 던전이 생기면 출퇴근 시간의 지옥 같은 도로 사정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사실 그러려면 던전 내부로 사람들이 다녀야 하는데, 나 같아도 저 악마의 주둥아리―사실 악마의 똥꾸멍으로 더 많이 불린다―로 들어갈 생각은 쉽게 안 들 것 같다.
시장은 그래도 돌아갔다. 시장 쪽엔 점포가 꽤 많았는데 을지로의 장인들처럼 담대하신 분들이 많아서 던전이고 나발이고, 나는 평생 여기서 살았고 여기서 장사했으니 떠나지 않겠다는 분들이 꽤 됐다.
시장에서 국수 먹고 납작만두랑 떡볶이 사서 던전으로 돌아가야지. 우리 스윗홈으로.
그 때 승규에게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나보고 수배범 새끼라며 준법시민인 자기는 나랑 안 놀겠다더니, 녀석도 나처럼 친구가 어지간히 없는 터였다. 어쩔 수 없이 연락을 시작하더니만…… 이젠 하루라도 전화를 안 걸면 병이라도 나는 것처럼 귀찮게 굴었다.
“왜.”
―야야야야야야.
“한 번만 불러도 돼. 왜.”
―구강현태가 머물고 있던 호텔 난리 났다.
“구강현태가 뭐야. 보건소 슬로건이야?”
구강 관리를 철저히 해야 현재의 상태가 유지됩니다……? 같은 건가?
―구 강윤엽 현 태윤엽! ……이 아니구나. 바뀌었구나.
“멍청이.”
말하고 나서야 실수를 깨달은 승규가 바보같이 중얼거렸다. 나는 비웃으며 꽈배기의 달콤한 튀김 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튼 거기 호텔이 어떻게 됐다고?”
그러다가 나도 뒤늦게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강 팀장, 중국인지 러시아인지 간다더니 안 가고 한국에 있었던 거야? 하여튼 진짜 음흉한 인간.’
짧게 강 팀장을 씹다가 하마터면 바보 같은 소리에 휩쓸릴 뻔했다. 승규도 구태현강, 구현태강…… 등등 별 쓸데없고 게다가 반복할수록 틀리기만 하는 걸 계속 중얼거리다가 다시 주제로 돌아왔다.
―어어. 거기 수도관 터지고 난리 났다더라.
“수도관이?”
―응. 사람들 추측으로는 남산 쪽에 던전 솟으면서 수도관에 문제 생긴 거 때문 아니냐고 하더라고. 거기서 멀지 않으니까.
“공항 쪽 아니었어?”
―어.
“인천은 여기서 먼데?”
―바보야. 거기 말고 새로 생긴 데. 짧은 노선만 다니는 곳 만들었잖아.
그랬나.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잘 기억이 안 났다. 허구한 날 부서지는 공공 시설들 때문에 건설업은 건국 이래로 최대의 호황이라고 했다. 근데 건설업이 호황이 아니었던 적이 있냐고.
―터가 안 좋은 거야. 터가.
“너는 교회도 다니는 애가 터 같은 걸 믿냐.”
―상갓집 다녀오면 고춧가루랑 소금을 1대 2로 팍팍 말아서 나한테 뿌리시는 분이 우리 할머니다.
“어……. 그래. 나 끊는다.”
―잠깐, 야. 하여튼 그런데 그 난리 속에서도 그 팀장 놈 살았다더라. 명줄 한번 대단하지 않냐? 그런데 자기 팔이랑 다리 다 뜯어봐 달라고, 엑스레이라도 찍으라고 난리난리를 피운다더라.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던…….
“재수 없는 소리 너무 많이 들으면 재수 옴 붙어. 나 정말 끊는다. 전화 들어오고 있어.”
가차 없이 끊고 통화하고 있던 귀 반대쪽을 열심히 두드렸다. 귀를 씻으면 아예 더 좋겠지만, 물이 없어서. 소독용 물티슈라도 살까 하다가 그냥 들어오던 전화를 받았다. 채원우였다.
―형! 어디에요?
듣기 싫은 강 팀장 소식이나 듣다가 내 토끼 같은 애인 목소리 들으니까 살 것 같다. 나는 활짝 웃으며 한껏 느끼하게 지껄였다.
“네 마음속.”
―아! 엇갈렸잖아요! 저 지금 거기로 가는 길이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질색하고 연거푸 나를 돌아봐서 정신을 차렸다. 아, 그런데요. 제 애인 얼굴을 보시면 제가 이해가 될 거라니까요.
―저 거의 다 왔어요. 시장 입구 쪽으로 가면 되죠?
“벌써?”
―마침 근처였어요.
“뭘 했길래 근처였어?”
정말 그냥 궁금해서 물었는데 채원우는 음, 하고 말을 늘였다. 뭔가 숨기는 건가, 하며 미간을 찌푸리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와락 껴안았다.
지금까지 전투에서 굴렀던 몸의 기억 때문에 뒤에서부터 덮친 인영을 팔꿈치로 무심코 갈기려던 걸 겨우 억눌러 참았다. 처음에는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가, 곧 이럴 사람이 채원우밖에 안 남았다는 걸 겨우 떠올려서였다.
“뒤에서 안지 말라니까.”
“형이 절 떠올리고 참는 게 좋아서요.”
그 마음이 어떤지 이해가 됐다. 우리는 사실 사회화 측면에선 상당히 수준 떨어지는 놈들이었다. 1년도 아니고 10년에 가깝게, 혹은 넘게 헌터청과 던전에서만 굴렀으니까.
이렇게 바로 사회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활보하지 않는 게 나은데도 이렇게 대낮에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서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밖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진짜 내가 너 때리면 어쩌려고. 너 이제 예전 같지 않아. 아주 연약하다고.”
나는 폭주 때 채원우의 몸이 상하는 걸 아주 가까이서, 실시간으로 봤기 때문에 그날 이후로 채원우를 좀 과보호하는 성향이 생겼다. 게다가 채원우의 능력도 줄어들었다. 갑자기 능력이 축소되면 수명에도 영향이 가는 거 아닌가 싶어 전전긍긍하기 일쑤였다.
논문이라도 찾아보고 싶은데 관련해선 아직 아무런 사례 보고가 없었다. 애초에 폭주 단계에 접어든 헌터가 생존한 경우도 채원우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헌터청과의 타협이 필요했다. 이런 특이한 케이스를 다른 나라에서도 탐낼 수 있으니까. 적당히 헌터청과 휴전하고 서로 감시하고 연락하는 체계를 만들어두는 게 차라리 나았다.
“걸어왔어? 다음부턴 택시 타.”
“네. 그럴게요. 우리 국수 먹어요? 전에 먹은 거?”
“응. 그리고 납작만두도 사가자.”
“모둠전도.”
“그래. 그것도.”
채원우가 나를 뒤에서부터 감싸 안은 자세로 어기적어기적 쫓아왔고 나는 커다란 금붕어 똥을 단 채로 느긋하게 걸었다.
남들이 보고 꼴값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채원우를 잠깐 잃어봤고, 영영 잃을 뻔했다. 다시는 후회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미래 계획도 중요하지 않았다. 현재가 중요했지.
내 평생 세워온 계획이 이루어진 순간, 채원우가 없단 사실 하나로 모든 게 엉망이었던 걸 떠올리면 더더욱 확실했다. 현재가, 채원우와 함께 있는 순간이 최우선이었다.
“형.”
“응?”
“중국 가보고 싶지 않아요?”
“굳이? 난 별로 안 가고 싶은데. 너 가고 싶어?”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그럼 러시아는요?”
“러시아도 뭐 딱히……. 아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가보고 싶다. 그 테트리스 배경인 성당 있는 곳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인가?”
확인차 핸드폰을 켜서 검색을 시작했다. 이름은 성 바실리 대성당이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니라 모스크바에 있다고 했다.
추운 건 안 좋아하지만, 옛날에 재밌게 봤던 시리즈 액션 영화도 모스크바에서 찍었다고 하고, 막상 보니까 재미있을 것 같았다. 따뜻한 날에 가면 좋을 듯?
“재밌겠다.”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로 튀면 좋겠네…….”
“어?”
“아니에요.”
채원우가 방금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은데 듣지 못했다. 되묻는 말에 채원우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얼버무린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별거 아니겠거니 싶었다.
곧 우리의 대화 주제는 여행으로 이어졌다. 휴양지로 급부상한 나라 이름을 대는데 채원우나 나나 해외여행 경험이 전무했다. 비행기조차 타본 적이 없었다. 타본 거라곤 군용 헬기뿐이니, 참 얘나 나나 팍팍했다.
“나중에 여권 쓸 수 있게 되면 외국 다녀올까?”
나는 당연히 그런 미래가 오리라고 확신하고 물었다. 그러자 채원우도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우리는 수배자인데 그런 날이 오겠냐거나 헌터청은 어쩌냐는, 그런 분위기를 식히면서도 안타깝게도 현실적인 말은 없었다.
매일매일이 꿈으로만 가득 찼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이 너무 적어서 무엇을 하든 새롭고, 무엇을 하든 재미있었다. 위시리스트를 쓸 여유조차 없던 나와 위시리스트가 뭔지 감히 꿈도 꾸지 못하던 채원우와의 연애는 맞춤 블록처럼 잘 맞았다. 앞으로는 리스트를 채울 일밖엔 없단 사실이 즐거웠다.
* * *
여전히 영화계는 재개봉 열풍 속에 있었다. 물론 새로 개봉한 영화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재개봉한 영화 중에 고민했다. 어차피 원우한테는 다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봤던 히어로 시리즈물의 마지막 영화와 온갖 괴물들이 모두 쏟아져 나오는 오락성 호러 영화 중에 무엇을 볼지 고민했다. 나는 둘 다 봤고, 개인적으로는 호러 영화를 더 좋아했다.
정정하자. 좋아했었다.
과거형이 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그 영화는 각성 전에 본 거였는데, 각성을 하고 던전이 일상 속에 자리 잡은 재난이 된 이후에는 그곳에 나온 괴물들과 싸우는 게 직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헌터청에 들어간 뒤 쉬는 날이면 숙소에 히키코모리처럼 틀어박혀 던전 브레이크 이전의 영화나 냅다 보면서 현실 도피를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호러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는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의미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었다. 모든 괴물이 그냥 시각적인 충격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저 촉감과 피의 온도와 냄새까지 다 알았다. 이젠 경험담이 된 거다.
뭐……. 그렇게 떤 것도 한 3년이고 이후부터는 덤덤하게 살게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