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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94화 (9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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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우는 남 이야기를 하듯이 말했다. 어차피 채원우의 기억은 온전치 못했다. 특히 헌터청으로 오기 전 기억은 유독 누더기 꼴이었다. 이런저런 혹독한 실험과 훈련으로 인해 채원우의 과거는 재만 남았다시피 망가졌다.

“근데 저희 너무 안 닮지 않았어요? 백겸이 형은 팀장님 싫어하던데. 저랑 닮았으면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겠죠.”

“그래……. 안 닮았지. 당연히. 너는 형이 입양한 애니까. 형은 하여튼 투자에는 괄목할 만한 귀재라고 할 수 있었어. 본인이 죽은 이후에도 너같이 쓸모 있게 사용될 애를 데려왔다니……!”

강윤엽은 베개 밑에서 총을 꺼내 단번에 쏘았다.

그러나, 순식간에 끝났어야 할 일은 그러나 끝나지 못했다.

“너, 너……. 분명 D급이라고…….”

“그랬죠. 나 말고 백겸이 형이.”

채원우는 오랜만에 전투에서만 느끼는 흥분감이 들어 송곳니를 보이며 웃었다. 총은 물방울에 포근히 싸여 있었다. 몇 번을 쏘든 마찬가지가 될 거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실드를 만들어낸 모습에 강윤엽은 처음에는 경악했다가 곧 절망했다. 울기 직전의 일그러진 얼굴이 되어선 진짜 어린애처럼 훌쩍이기 시작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누구든 그 상황이었다면 그랬을 거야……. 너도 군말 없이 잘 쫓아왔잖아…….”

“누가 뭐래요? 나 복수하러 온 거 아니라니까?”

채원우가 제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떨어뜨린 총알을 허공에 던졌다 받으며 놀았다. 강윤엽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긴 다리에 질색하여 바들바들 떨었다. 채원우는 강윤엽의 옆에 앉아서는 한창 아플 팔을 지그시 눌렀다. 강윤엽이 볼썽사납게 소릴 질렀다.

“위치추적칩을 넣었는데, 어디에 넣었게요?”

채원우는 이 모든 게 정말 게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강윤엽은 왜인지 알아듣기 힘든 소리만 질러댔다. 채원우는 그가 왜 이렇게 과민하고 성가시게 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유독 무섭게 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는 강윤엽이 했던 것들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강윤엽 말에 따르자면, ‘이 아픈 일들을 재치 있고 발랄하게 만들어주는 분위기 메이커’처럼 말이다.

근데 왜 자꾸 질질 짜지? 성가시게.

슬슬 귀도 아프고 지겹기도 해서 채원우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 쉬이, 소리를 내고는 강윤엽의 입을 커다란 물방울로 덮었다. 코까지 막으려다가 참았다.

강윤엽이 소리를 치려고 입을 열 때마다 물만 한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게다가 마셔서 없애려 하면 어디서 가져오는 건지 모를 물이 자꾸만 생겨났다.

이 공포스러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채원우의 주변은 비눗방울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이 가득 떠 있었다. 채원우의 예쁜 얼굴과 화사한 미소까지 어우러져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강윤엽의 상황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소리를 지르려는 노력이 멍청한 헛수고라는 걸 깨닫고서야 강윤엽은 입을 꾹 닫았다. 한 바가지는 마신 듯한 물 때문에 속이 더부룩하기만 했다.

강윤엽은 그제야 물소리를 들었다. 채원우가 자신의 방에서 했던 것처럼 강윤엽의 욕조에 물을 콸콸 틀고 있었던 거다.

그 물소리가, 그 끊이지 않는 소리가, 하루에 몇 번씩도 듣던 물소리가 이렇게 무섭게 느껴진 적은 단연코 처음일 거다. 강윤엽은 눈에 띄게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왜 떨지. 아픈 것도 안 했는데.”

채원우가 고갤 갸웃거렸다. 양백겸이었다면 이 모습을 보고 입술을 꾹 깨물고 참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귀여운 짓 한다며 키스를 갈겼겠지만, 전 채윤엽 현 강윤엽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채원우가 자기 몸처럼 다룰 수 있고 언제든지 무기로 삼을 수 있는 물이 저렇게 철철 흐른다는 게 끔찍했다.

슬슬 혼자만 떠드는 것도 심심한지 채원우가 강윤엽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물방울을 떼어냈다. 정말 말 그대로, 물방울이 스티커라도 되는 것처럼 뜯어내선 옆에 떠다니는 방울 아무 곳에나 붙였다.

두 배로 부푼 물방울이 당장에라도 자신의 머리통을 내려칠 것 같아 강윤엽은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너, 너……. 양 가이드도 네 이런 모습 알아……? 속이고 그럼 안 돼……!”

“음……. 충고는 고마운데 연인 사이에는 적당한 내숭이 필요한 거잖아요. 누구나 그렇지 않나?”

누구나 적당히 내숭은 부리지. 하지만 그게 S급으로도 가늠하지 못할 능력을 지닌 이능력자가 자신의 능력을 D급 수준이라고 후려치고 약한 척하는 수준은 아니란 게 중요했다. 하지만 채원우에게 이 말이 먹힐 리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시간만 끄는 꼴이지, 채원우가 양백겸을 속이고 있단 사실이 자신의 생존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걸 강윤엽(전 채윤엽)은 알았다.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면 양백겸에게 네가 지금 가증을 떨고 있단 사실을 밝히겠다고 해봤자, 그럼 그런 말 못 하게 지금 죽여버리겠다고 할 놈이었다.

잘 알았다. 당연히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라도록 환경을 구성한 게 자신이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는 늘, 자신의 가족을 살리지 못한 헌터들을 소모품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이제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강윤엽을 보던 채원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더는 재미없었다. 그리고 백겸이 형이 언제 올지도 몰랐고. 오늘은 돌아가는 길에 형이 좋아하는 아주 매운 맛의 떡볶이나 사가야겠다, 어느 브랜드에서 사고 사이드는 뭘 시키지, 하는 채원우에게 강윤엽이 체념에 찌든 목소리를 토했다.

“나는…… 네 삼촌이잖냐……. 용서해 다오…….”

만약 이 자리에 양백겸이 있었다면 길길이 날뛰다가 강윤엽이 산 총으로 강윤엽을 쏘진…… 않고 총신으로 머리를 후려쳤을 거다(총알 아까우니까). 하지만 채원우는 양백겸이 아니었다. 그는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근데 저 입양되었다면서요.”

이제 지루해진 채원우가 손을 까딱였다. 어디선가 불길한 끼릭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저 용서나 복수하러 온 거 아니라니까요. 말했잖아요. 작별 인사 하러 왔다고.”

“그, 그럼……?”

“어딜 가든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서 양팔, 양다리에 위치추적기 좀 박으러 왔어요. 그리고 음…….”

채원우가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케이블 타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강윤엽의 발목과 손목을 결박했다.

“수영할 줄 아세요?”

돌연 강윤엽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채원우는 고작 이 정도로 그가 죽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강윤엽에게는 그의 악독하게 뛰어난 머리 말고도 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건 바로 어떻게든 살아남는 생존력이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는 살아남을 거고, 채원우는 부디 그러길 바랐다. 심심할 때마다 찾아가고 싶으니까. 뭐, 그의 말대로 유일한 가족 사이니까?

추석이나 설날에 갑자기 찾아가서 강윤엽의 얼굴이 똥색이 되는 상상을 하며 킥킥 웃은 채원우가 그를 구속한 채로 두고는 방을 가로질렀다.

허공에 지휘를 하듯 손을 움직일 때마다 불길하게 시작된 끼릭 소리가 점점 커졌다. 채원우는 최근 양백겸이 흥얼거리던 노래를 따라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강윤엽의 룸을 나와 로비로 내려왔다.

“저기, 욕조가 이상해요. 수도관에 문제가 생겼는지, 아니면 밸브 문제인지 안 잠기네요.”

“네?! 몇 호실에 숙박 중이십니까, 손님?”

채원우는 503호라고 중얼거렸다가 씩 웃고 정정했다.

“모든.”

“……?”

“모든 수도관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묵직한 폭발음이 들렸다. 그 소린 미세하고 작아서 채원우의 귀에나 들렸다. 아, 13층 강윤엽도 들었겠다. 그의 방에서 터지는 소리니까.

곧 로비의 전화가 터지도록 울리기 시작했다. 채원우는 조용히 카드키를 반납하고 망설이지 않고 로비를 떠났다.

호텔 입장에선 곤란하겠지만, 정의로운 행동이기도 했다. 그가 알기로 이 호텔 체인점 대표는 던전으로 망가진 마을 사람들의 보상금을 사기 친 전적이 있으니까.

“아, 오늘도 또 착한 일 해버렸네.”

해가 쨍쨍한 하늘 아래에 서서 채원우가 투덜거렸다. 오늘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고 쾌청했다.

이렇게 지루할 정도로 느리고 유야무야하면서 세상은 서서히 종말로 향할 거다. 운이 좋다면, 그 전에 멈출 수도 있고! 채원우가 무채색의 삶을 살다 양백겸을 만나 반짝거리고 온기까지 있는 삶을 얻게 된 것처럼.

* * *

<어디야?>

나는 볼일을 다 본 뒤 헌터청을 나오면서 문자를 보냈다. 사실 도박이었는데 상당히 성과를 거두었다. 그냥 잘된 수준이 아니었다. 나오면서 기념품으로 탕비실도 털었다. 양손이 두둑하고 입에도 아이스크림이 물려 있었다. 아주 뿌듯한 상태로 한 번 더 문자를 보냈다.

<놀고 있으면 데이트할래?>

아직 추적이 끊기진 않았겠지만, 추적이 있다 하더라도 섣부르게 끌고 가거나 하진 못할 거다. 이제부터 우리는 집행유예 상태라고 볼 수 있겠다. 완전히 외주 협력인으로 인정받기 전까지, 그 심사기간 동안은 반쯤 자유라고 할 수 있겠지.

아니어도 어쩌겠어. 아니라면 던전 안으로 도망쳐야지 뭐.

태평스러운 생각을 하며 이리저리 꼬인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다가 반쯤 먹었을 쯤 답장이 왔다. 내게 연락하는 사람이라곤 사실 박선행 씨, 승규, 형민이, 그리고 채원우 정도라서 후보가 뻔했다.

<저도 밖이에요! 해요, 데이트!>

역시 원우였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닌데 애가 잔뜩 신난 게 느껴졌다. 사실 나도 신났다. 혹시 밖에서 놀 수도 있으니까 아이스크림은 내 것만 털어 오길 잘했다.

뽀스락대는 비닐들에 채원우가 좋아하겠다, 하면서 약속 장소를 정했다. 약속 장소는 남산이었다. 왜 갑자기 남산이냐 하면 남산 타워라는 데이트 명소가 있어서……는 아니고 거기서 쭉 내려오면 있는 서울역과 남산 사이에 던전이 터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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