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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93화 (9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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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알겠어.”

“그럼 이거 드실래요?”

나는 그녀의 등에 갖다 댔던 걸 내밀었다. 베이커리 같은 곳에서 화이트데이 기념으로 파는 사탕이었다. 기가 막힌지 수석은 헛웃음을 뱉고는 내 앞에서 그걸 까 아주 아작아작 씹어 사라지게 했다.

“너희 둘이 같이 지내는 거야, 그럼?”

“네.”

“헌터청 최고로 잘생긴 두 명끼리 붙어먹을 줄은……. 채원우야 악명 높았지만, 너는 그래도 목표를 이루면 망설임 없이 떠서 평범하게 살 줄 알았는데.”

“평범하게 사는 거예요. 이것도.”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듣기에도 조금 뼈가 있는 말투였다. 수석은 유감이라는 기색을 조금 보였지만, 그래도 미안하다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몰라도, 그래도 나는 과학자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던 일을 한 거야. 헌터청이 수립되기 전까진 던전이 터졌을 시 휘말릴 민간인의 생존 수치는 아무리 계산해도 10퍼센트 이하였어. 몬스터의 공격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 있었단 이유만으로도, 갑자기 생길 지반 변화나 공기 변화로도 죽는 사람들이 수십이었고. 헌터청이 만들어지고 헌터가 활동한 이후로 얼마나 올랐는지, 아무도 모르겠지. 아무도.”

“알아요.”

“…….”

“그냥 그 와중에도 소소한 행복을 욕심낼 뿐이에요, 우리도. 남들처럼. 평범하죠?”

“만약 채원우가 다시 폭주할 것 같다면?”

차가운 시선이 안경 너머로 나를 쏘아봤다. 나도 그 걱정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곧 해결됐다. 해결 방안이 생각보다 더 쉽고 단순했거든.

“제가 죽일 거예요.”

제가 같이 죽을 거예요.

아마 수석은 내가 말을 교묘하게 바꿨다는 것도 눈치챘을 거다.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다.

곧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한테 반했다는 애들을 말리느라 개고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 진짜 잘한 짓이었어.”

“어? 그랬어요?”

“그래. 다들 껍데기에 속아서는. 겉으론 정중해도 원래 그런 놈들이 더 또라이라고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 말렸다. 그러니까 봐, 알아서 대형 사고 쳐주잖아? 어떻게 둘이 붙어먹을 수가 있어. 누가 알았겠니.”

“왜 모르셨지. 혈기 왕성한 선남선남 둘이 허구한 날 붙어 있는데 그런 사심이 안 생길 리가 있……진 않죠?”

나를 노려보는 시선에 조금 뻘쭘해졌다. 수석이 내 기록을 모를 리가 없지……. 그전에 만났던 파트너들도 채원우 정도는 아니어도 분명 선남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어떻게 했더라……. 사심이 생기기는커녕, 웃으며 엿 먹이다가 쌈박질하기 일쑤였지. 나도 참 철이 없었네.

먼 과거의 남 일처럼 모르는 척하고 웃고만 있으니 수석은 날 한 대 때리고 싶은 모양이다. 이를 꽉 깨물었다가 어휴, 어휴 소릴 내며 고갤 저었다.

곧 수석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방화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돌렸다가 잠깐 멈춘 그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윗선에는 말해 볼 거야. 아마 처음에는 반신반의해서 완전히 너흴 믿지는 않을 테고. 보내주는 정보의 퀄리티와 꾸준함에 따라 네가 말하는 그 평범함이 유지될지 아닐지 알 수 있겠지.”

“고맙습니다.”

“그리고…… 강 팀장은 바로 잘렸어. 그 이후로는 행방을 몰라. 새 신분증을 얻어 외국으로 떠난다는 이야긴 들었어. 중국이었던가.”

문이 살짝 열렸다. 반 바퀴를 돌아 내 쪽으로 고갤 돌린 채 뒷걸음질 치는 얼굴에서 피곤함이 묻어났다.

“그러니까 나 이제 수석이 아니라 팀장이다.”

강 팀장이 했던 말과 같은 말인데도 듣는 기분이 사뭇 달랐다. 나는 축하합니다, 했고 수석, 아니, 팀장님은 코웃음을 치고 곧 사라졌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란 걸 모르는 건 아니다. 거기서 욕심을 더 부린 사람과 욕심을 덜 부린 사람이 있는 것도 당연하지.

원래 자기 분야에 매몰되고 거기에 신념이 있으면 남은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내가 저지른 일도 남이 보면 이기심의 끝일 테니까. 악플을 몇 개나 봤는지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세계를 구하라고 하는데 내 세계는 채원우에게 있었거든.

그토록 꿈꾸던 마이홈이 생겼는데도 달갑지 않고 외롭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던전에서 자든 노숙을 하든 그저 좋다. 그린존에서 홀로 집을 구해 살았다면 그건 동화처럼 허무했을 거다. 억지로 종료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문구처럼.

* * *

백겸과 다르게 채원우는 모자를 쓰고 호텔로 들어갔다. 하루에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그린존의 공항 급행 철도 근처에 있는 비즈니스호텔이었다. 호텔 입구에서 모자챙을 살짝 올려 제대로 왔나 확인했다. 원우의 눈에는 이 주변에 있는 호텔은 다 그게 그것처럼 생겼다.

호수만 중얼거리고 로비를 통과했다. 요즘에는 카드키를 대야만 숙박 층으로 올라갈 수 있어서, 원우는 현금을 내고 방을 빌렸다. 이래저래 백겸의 인맥으로 만든 신분증에는 채원우가 아니라 강원우라고 적혀 있었다. 우연이라면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헌터청 안에서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고작 그 담장을 넘고 나니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 펼쳐졌다. 둘 다 그렇게 즐겁진 않았다.

키즈락을 걸어야겠다고 백겸이 벼르고 벼르던 동영상 플랫폼도 원우에게는 그저 백겸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의 장이지 그다지 재밌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았다. 백화점이나 유명한 맛집도 백겸과 함께가 아니면 지루하기만 했다.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재미를 찾는 걸까? 모든 이들이 백겸과 함께하는 것도 아닌데. 원우는 일반인의 기준에서는 안쓰러움과 분노를 느낄 법한 성장 과정을 가졌으면서 오히려 일반 사람들을―정확히는 1가구 1백겸이 아니라서 백겸을 소유하지 못한 백겸 비소유자들을― 안쓰러워했다.

그러니 때때로 괴로움을 느낀 적이 있긴 했어도 그다지 구김살이 있는 편이 아닌 채원우는, 지금부터 벌일 행위가 꽤 나쁜 짓이란 자각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돈을 조금 더 내고 욕조 있는 룸으로 빌렸다. 욕조 마개를 막고 물을 세게 틀어놨다. 냉수인지 온수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물을 모두 튼 뒤에는 13층으로 올라갔다.

채원우는 13층에 위치한 세탁실에 서서 핸드폰을 살폈다. 백겸과 찍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다 보면 시간이 잘 갔다. 사진 한 장을 두 시간 동안 보라고 해도 볼 수 있었다. 심심하면 가져온 초콜릿 좀 먹었다.

그러다가 곧, 아주 미세하게 오른쪽 발을 조금 끄는 듯한 발소리가 귀에 걸렸다.

이능력자라서도 있지만, 아주 오래도록 지긋지긋하도록 들은 발걸음 소리라서 원우는 어렵지 않게 누구의 것인지 알았다. 강윤엽이었다.

강윤엽은 던전이 터졌을 때 휘말렸으면서도 거의 다친 곳이 없었던 운 좋은 놈이었다. 그래도 아예 무사할 수는 없었는지 발목이 부러졌었다. 가족을 잃고 헬리오스에 입사해서 미친놈처럼 굴기 시작하며 재활을 성실히 하지 않았기에, 오른쪽 발목을 종종 끌며 걷곤 했다.

채원우는 챙겨 온 손거울로 외부를 비추며 강윤엽이 등을 보이길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갔다. 귀여운 분홍색의 키티 손거울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강윤엽이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기 직전에 뒤에서 그를 덮쳤다.

사람은 아주 정교하면서도 연약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채원우는 강윤엽을 손쉽게 기절시킬 수 있었다. 기절시키지 않아도 강윤엽이 어떤 반항을 하든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지만, 굳이 기절시킨 이유는…… 그냥 귀찮아서? 소란 피우면 시끄러우니까.

품에 푹 쓰러지는 강윤엽을 팔로 받은 원우는 강윤엽이 문을 열자마자 살짝 대고 있던 발을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에 깔린 두툼한 카펫 덕분에 성인 남성 한 명이 끌려가는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 * *

강 팀장, 그전에는 채 치프, 그전에는 채윤엽이라 불렸던 강윤엽은 지진이라도 난 듯한 진동에 깨어났다. 그리고 깨어난 뒤에는 그 진동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단 걸 자각했다.

“너무 안 깨서 걱정했어요.”

채원우가 아몬드의 얇은 갈색 껍질을 벗기며 말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나긋하고 부드러운지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는 줄 알았다.

강윤엽은 눈앞에 있는 존재에 지금 이 순간이 꿈인 줄 알았다. 하지만 꿈이라기에는 몸의 통증이 너무 선명했다. 특히 사지가 너무너무 욱신거렸다. 독한 항생제 주사를 양허벅지와 양팔뚝에 맞은 것 같았다.

“깼으면 대답 좀 해요. 심심해 죽는 줄 알았는데.”

“……네가 왜 여기 있어. 이게 무슨 일이야.”

“중국 가신다면서요. 러시아인가? 에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에요. 저요, 배웅하러 온 거예요.”

동그란 간이 테이블에서 몸을 돌려 다리를 꼰 채원우는 강윤엽이 보아온 그 어느 모습보다 좋아 보였다. 눈빛은 촉촉했고 피부에선 윤이 났다.

“근데 말도 없이 가시면 어떡해요. 우리 사이에.”

“복수하러 온 거냐?”

“복수요? 아니요. 저 화 안 났는데요.”

진짜로 그렇게 보였다. 자칫하면 믿게 될 것 같았다. 채원우는 발목을 까딱이며 견과류를 씹고 있었다. 위협적인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백겸이 형이 그러는데 제가 D급 수준으로 능력이 저하되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세요~”

“네가……?”

“아, 그런데 좀 걱정되어서요. 요즘 시국이 시국이잖아요. 시국 맞나? 시류라고 하나? 저 요즘 어휘력이 좀 늘었어요. 그런데 어려운 말이 너무 많더라고요. 연패가 제일 어려워요.”

채원우는 이게 무슨 상담소라도 되는 것처럼 제 마음대로 떠들었다. 강윤엽은 욱신거리는 팔을 더듬거리며 베개 밑에 있는 총을 떠올렸다. 여차하면 쏘기 위해 구한 것이었다. 돈만 있다면 못 구하는 게 없다. 그건 던전이 터진 뒤에도 통하는 상식이었다.

마침 또 잘됐다. D급 수준으로 처참하게 망가졌다면, 총 한 발에도 죽을 거다. 불량품을 회수하는 건 제작자의 책임이었다.

“제가 잊고 있었는데 제 삼촌이셨다면서요.”

슬금슬금 베개 밑으로 가던 손이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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