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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92화 (9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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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를 잡을 때 수맥도 보고 풍수지리도 보고 헬리오스의 최첨단 장비도 사용했고 어쩌고저쩌고. 하여튼 고대의 방법과 현대의 방법을 모두 총동원해서 끝내 찍자! 해서 고른 장소인데 그게 어쩌다 보니 제대로 먹혔던 거다. 바로…… 지난주까지는.

    우뚝 서서 돌아보자 뒤에는 두더지가 지나간 것처럼 올라온 언덕들이 보였다. 다시 보니 두더지의 흔적보다 꿈동산을 닮았다.

    공략 레벨이 낮은 소규모 던전이 다중으로 시차를 두고 발생하는 걸 지진형 던전이라고 불렀다. 땅이 흔들리거나 그래서는 아니고, 여진처럼 계속 생긴다고.

    던전 주변에 격리 표시가 되어 있었고, 자기장이 흐르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질기고 튼튼한 자기장이었다. 저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보라색인 것만 봐도 두께가 상당하단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자기장을 톡 건드렸다. 그 파동에 따라서 왜곡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가볼까!”

    씩씩하게 외쳤다. 아무리 두꺼운 자기장이라도 넘을 수 있다.

    내가 괜히 헌터청에서 몇 년을 계약 갱신하며 버텨간 게 아니다. 장기 계약이 아니라 단기 계약이라 남들보다 계약금은 적게 올랐지만, 대신 다양한 파트너를 만나오며 온갖 던전을 섭렵해 봤다 이거야.

    그리고 끝내 숙원이던 ‘한탕 벌어서 이 바닥 뜬다’를 이루며 내 집 마련에다 토끼 같은 안사람까지 생겼잖아? 웃음이 절로 나와서 좀 음침한 사람처럼 으흐흐 웃으면서 잠금을 풀었다.

    던전 결계는 일종의 브레인 퍼즐 같은 거다. 금속 고리 여러 개를 엉키게 해놓고 푸는 퍼즐처럼, 허공에 있는 자기장 균열을 조금씩 맞추면 아주 잠깐이지만 출입구가 생긴다.

    자기장의 설치와 해체는 공병들의 역할인데 가이드와 헌터도 풀 수 있게 틈을 만들어뒀다. 에스퍼야 말할 것도 없이 이걸 자기가 만든 것처럼 풀 수 있지만.

    아무튼 3X3 큐브 퍼즐처럼 이것도 규칙이 있어서 몇 개 규칙을 돌아가며 적용하다 보면 풀리게 되어 있다. 사실 내가 퍼즐에는 약하지만 근 10년을 구르면 모를 수가 없게 된다.

    “됐다!”

    세 번이나 재수강을 해야만 했던 ‘던전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 훈련법’을 들은 보람이 톡톡히 나타났다.

    뿌듯하게 던전 밖으로 나와서 헌터청으로 향했다. 주머니에 딱딱한 게 만져졌다. 승규한테서 얻어낸 방문증이었다.

    헌터청에 다시 간단 소리에 나를 미친놈 보듯 하던 승규는 끝내 내 손바닥의 손금을 확인한 뒤에야 방문증을 내줬다. 생명선이 두툼하니 뭔 손목까지 가 있는 걸 보니 죽여도 살겠다 하던 말은 사실 핑계고, 이젠 내가 지긋지긋해서 준 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도움이 되니 땡큐였다.

    얼굴은 일부러 가리지 않았다. 그간 머리가 자라서 좀 덥수룩했는데 그것도 작게 꽁지를 내서 묶었다. 공항도 아니고, 헌터청을 오가는 사람들 수천 명 중 꽁꽁 싸매는 비율이 0퍼센트에 가까운 상황에서 얼굴을 싸매는 건 오히려 수상쩍어 눈길을 끌 뿐이다.

    “수고하십니다~”

    애초에 경비를 서고 있는 사람들도 눈에 빛이 없었다. 적당히 입구를 통과했다. ‘집에 가고 싶다. 당장’의 마음이 가장 강렬하게 드는 오후 2시 반에서 3시 반. 나는 3시를 기점으로 잡았다. 느지막이 던전에서 출발해 토끼굴과 같은 통로를 나와 자기장 해독에 시간 좀 끄니 딱 맞아 다행이었다.

    방문증을 찍자 ‘뉴 가이드 에이전시’라는 소속명이 떴다. 새로 생긴 에이전시인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아니면 페이퍼 컴퍼니인가? 알 게 뭐람. 나는 허공에 방문증을 던졌다가 딱 받고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다들 피곤한 얼굴이었고, 당장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해서 들이켜고 싶다와 그냥 우리 집 침대에 가서 드러눕고 싶다는 마음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나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나만 괜히 엘리베이터의 거울을 보며 얼굴을 확인했다.

    머리가 덥수룩하게 자라서 조금 추레해 보이는 게 딱 좋았다. 아예 면도도 하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아쉽게도 수염은 잘 안 나는 타입이라.

    그리고 휴게소 및, 가장 많은 공무원들이 근무하고 있는 3층에 도착했다. 나도 사람들에 섞여 내려서는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내린 뒤 비상구로 자연스럽게 빠져나가 4층으로 올라갔다.

    어찌나 기밀 층인지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통로에 CCTV는 없었다. 덕분에 걸릴 것도 없고. 고맙습니다, 헬리오스의 유물일지 유산일지.

    도착해서 바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계단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바깥 분위기를 살폈다. 두꺼운 방화문으로 분리되어 있어도 상관없었다. 헌터가 아니라 가이드라도 이 정도 너머 소리는 훔쳐 들을 수 있었다.

    얼음까지 모두 녹아 결국 찬 맹물까지 마실 쯤이 되어서야 기다리던 인기척이 났다.

    “이거 데이터 분류해.”

    “네.”

    “새로운 심사 대상 목록 인벨롭해서 올리고.”

    “넵.”

    “쓸 만한 사람이 영 보이지 않네. 점점 질이 떨어지는 것 같아.”

    푸념조의 목소리 다음에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멋쩍은 웃음만 겨우 들려왔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 하나는 멀어지고 하나는 가까워지다 종내에 하나로 줄었다.

    이제 남은 건 모 아니면 도,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다만, 한 번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사람으로서 감히 장담하는데, 난 운이 좋은 편일 거다.

    셋을 세고 문을 열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잡힌 팔을 훅 당겼다. 문이 쾅쾅 닫힐 일이 없게 잘 정비한 방화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나는 끌고 온 사람의 등 뒤에 챙겨 온 걸 지그시 댔다.

    “오랜만이에요, 수석님.”

    “……오랜만이다. 양 가이드, 아니, 백겸아.”

    그녀는 채원우와 나의 매칭도를 담당하는 팀의 수석이었다. 나는 손에 쥔 걸 빙그르르 돌렸다.

    “소리 안 지르실 거죠?”

    “네가 하는 행동에 달려 있지.”

    “별거 아니에요. 이것도 사실 선물이고요.”

    “선물인지 아닌지도 네 행동에 달려 있지 않겠니?”

    나는 하하, 웃고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이곳에 CCTV도 없고 오가는 인원도 드물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누가 지나가다 보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채원우와 저에 대한 추적을 이만 끝내주실래요?”

    “헌터청 역대 최악의 탈주범 둘을 포기하라고?”

    “탈주범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면 되죠.”

    “너라면 그럴 수 있겠니?”

    “외근 보낸 파견 인력은 어때요?”

    나는 조용히 그녀의 어깰 쥐고 있던 손을 돌렸다. 시선만 내린 수석이 내 손에 쥔 걸 보고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내가 쥐고 있는 건 던전 안에서만 구할 수 있고, 내 목숨을 살린 적이 있고, 또 가장 희귀해서 1년에 몇 개 추출되지 않는 회복석과 흡사한 치료석이었다.

    물론 퀄리티는 날 살렸던 것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졌다. 보급형에 가깝단 뜻이었다. 하지만 말만 보급형이지 마찬가지로 희귀하고 상당히 비쌌다.

    내가 들고 있는 것 역시 좀 민망할 정도로 작긴 했다. 아마 퀄리티 검사를 해도 A급은 되지 못할 거다. 그래도 충분히 혹할 재료긴 했다.

    “최근 들어 던전과 공존하고 살아야 한다는 의견이 강해졌다면서요? 데이터상으로도 그렇고……. 이왕이면 이웃으로 살아야 할 게 불발폭탄인지, 아니면 시한폭탄인지 정도는 아는 게 좋지 않겠어요?”

    “……이게 그 증거라고?”

    “채원우와 제가 던전을 조사해서 데이터들을 보낼게요. 생성된 던전 말고 앞으로 생성될 던전들에 대해서도 전부. 그리고 필요하다면 외국도 다녀올 수 있고요. 공식적으로는 헌터청 소속이 아니니, 그런 궂은일이지만 공조가 필요한 일에 손해 없이 생색낼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래도 공식적으로 추적을 멈춘다고 하면 앞으로도 이렇게 탈주하는 능력자들이 생길 거야.”

    “굳이 공식적일 필요 없어요. 그냥 멈추면 돼요. 뉴스를 낼 필요도 없고 성명서를 낼 필요도 없고요. 아, 근데 반대로, 성명서를 내고 우릴 쫓아다니면…… 다시는 나와 채원우를 못 볼 겁니다.”

    “그 도피 생활이 얼마나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글쎄요. 적어도 괜히 들쑤셔서, 진짜 시한폭탄인 채원우가 다시 터지지 않는 이상 꽤 오래?”

    나는 D급 수준이 된 채원우를 떠올리며 실실 웃었다. 내 허풍이 먹힐 거란 확신이 있었다. 모두가 직접 목격한, 기상이 변할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면서도 폭주하지 않고, 폭주 전 단계에서 버티던 채원우 때문이었다.

    폭주하지 않았을 때도 그 능력을 측정할 수 없던 채원우를 데리고 있지도 않은 지금, 감히 어림짐작하는 도박은 하지 않는 게 좋을 테니까. 잘못 건드렸다가 짐작 못 할 피해를 입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미지수는 사라지지 않는 던전만이 아니었다. 채원우 자체도 미지수가 된 거다. 그리고 헌터청 사람들은 추측할 수 없는 것들을 싫어하지.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수석은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으로 어느 정도 협상이 성공했으리란 걸 눈치챘다. 일단 채원우에 대한 이슈가 한풀 꺾인 이 좋은 타이밍도 한몫했다. 만약 던전으로 도피한 바로 다음 주에 왔으면 이런 대화도 불가능했을 거다.

    “좋아. 내가 윗선에 이야기해 보지.”

    “고마워요.”

    “그래도 협상이 되었다는 표시는 해야 할 텐데, 어디로 남기면 되지?”

    “소리 안 지르실 거죠, 수석님?”

    “당연하지.”

    나는 그녀의 어깨 위에 있던 손을 옮겨서 주머니로 가져갔다. 미리 켜둔 화면을 보여주니 그녀가 대뜸 얼굴을 구겼다.

    “너 이런 거 보니?”

    “여기에 댓글 다시면 돼요. 내용은 뭐, 던전 안에 토끼가 산다는 걸 봤어요, 같은 거.”

    “던전을 통해 무장공비가 올 거라는 걸 믿는 사람들이 보는 채널인데?”

    “네. 그건 뭐…….”

    “이런 영상에 댓글 다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나라는 괴한에게 끌려왔을 땐 침착하던 수석이 댓글을 달라고 하니 사색이 되어선 질색했다.

    나도 이해했다. 처음 봤을 땐 나도 같은 반응이었으니까……. 박선행 씨의 처참한 영상 편집 기술은 도저히 나아지지 않아서, 여전히 딱 보자마자 흠칫하게 만들었다.

    “다른 방법도 상관없고요. 어차피 때 되면 알겠죠. 추적이 끝났는지 아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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