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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의도하지 않고 한 말이더라도 어쨌든 짧은 수면장애는 아니다. 본인은 인식하지 못했어도 헌터청의 기록에는 꾸준히 양백겸 가이드의 수면장애 이력이 기록되어 왔다.
백겸의 수면 문제는 고질적이었고 그건 최근에서야 해결될 기미가 보일 듯 말 듯…….
“이렇게 많이 자면 별로 해결된 게 아닌가?”
어떻게 해야 건강한 삶,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건지 전혀 모르는 사람과 그런 건 잊어버린 지 오래인 사람이 만났으니 둘의 일상은 건전과 불건전을 넘나들었다. 길이란 게 없는 곳에 똑 떨어진 방향치들처럼 마구마구 헤매는 중이란 뜻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원우는 어쨌든 밀린 잠을 다 자면 좋은 거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볼일이 있는데 백겸이 언제 깰지도 모르는 상황에 혼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따로 말로 한 약속은 아니지만, 둘이 암묵적으로 지키고 있는 건 잠에서 깰 때 혼자 있지 않게 하기였다. 그건 백겸이 계약한 두 사람만의 스윗홈에서만 지키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 이곳, 휴지기 화산처럼 위태롭게 평화로운 던전 낙원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폭주하려던 날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었던 던전은 휴지기 던전으로 바뀌었다. 휴지기 던전이란, 이런 류의 던전을 뜻하기 위해 백겸과 원우가 대충 정한 명칭이었다.
던전의 바깥쪽과 안쪽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안쪽의 몬스터들은 원우와 백겸이 공격할 태세만 갖추지 않으면 아주 얌전한 양과 같았다.
실제로 양이랑 비슷하게 생긴 애들도 더러 있었다. 백겸은 대부분이 염소같이 악마의 눈알을 가져서 좀 무섭다고 했지만…… 이젠 그것에도 적응이 된 듯했다.
원우는 핸드폰으로 던전 요리 사이트에 접속했다. 새로운 정보와 함께 댓글이 활발히 달렸다.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마니아들인지라 번역기를 사용해야만 했다.
오늘 뜬 건 마침 염소와 가장 비슷하게 생긴 몬스터였다. 가로 동공도 똑같은데 다만 눈이 네 쌍이었다. 그게 진짜 끔찍하다고 백겸이 치를 떨었던 기억이 나서 원우는 조용히 웃었다.
“와. 얘 우유가 맛있다고? 수컷 암컷 가리지 않고 나온다고?”
반면 원우는 역겨움이나 거부감이라곤 느끼지 않았다. 연인에게 나사 빠진 새끼라는 평을 듣는 채원우는 아무래도 이쪽 분야에서도 정상이라기엔 좀 나사가 빠져 있는지 이런 일에 도전하는 데도 거북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젠 예전과 같은 몸이 아니고, 너나(추정 D급 헌터) 나나(추정 A+급 가이드) 다를 것 없는 몸인데다 15억짜리 회복 아이템을 살 수도 없으니 무서운 몬스터들에게 깝치지 말고 그냥 시장에서 사 먹자는 백겸의 의견도 뭐, 맞는 말이긴 했다. 반쯤은……?
핸드폰을 든 채로 원우가 빈손을 어깨까지 들어 올렸다. 주변 몬스터들의 기척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자각몽에서 꿈속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주인공을 노려보는 장면처럼 모든 몬스터들의 수많은 눈알이 원우를 쳐다봤다.
“아, 안 되겠네.”
원우는 아쉬워하며 손을 내렸다. 손바닥에 조용히 모이고 있던 회오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냥 커피 마셔야겠다.”
라떼를 해볼까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채원우는 생명체를 다치지 않게 생포하는 방법 같은 건 몰랐다. 채원우가 가진 것 중에 다치지도, 망가지지도 않은 건 오로지 양백겸 하나밖에 없었다.
“채원우.”
해먹에서 부스스 일어난 백겸이 원우를 찾았다. 원우는 역시 포기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원우에게 냉큼 다가갔다.
“아아메? 따아메?”
배웠다고 써먹는 줄임말이 채원우랑 진짜 안 어울려서 백겸은 일어나자마자 실소를 터뜨렸다.
“얼음 동동으로 부탁드립니다.”
“다방 커피처럼 달게?”
“다방 커피를 마셔보긴 했고? 걍 쓰게 해주세요.”
“신맛 없이?”
“뭔 소리야. 우리 커피 믹스는 하나밖에 안 사 왔어. 그딴 커스텀 없어.”
게으르게 해먹에 도로 벌렁 누운 백겸이 대단한 균형 감각으로 허공에서 뒹굴거렸다. 해먹을 만든 건 원우였다. 처음에는 높이가 안 맞았고 다음에는 탄력이 부족했는데 이제는 탄력도 탱탱하고 높이도 완벽하게 만들 수 있게 됐다.
해먹은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 휴지기 던전에서 뷰가 괜찮고 고도가 좀 있다 싶은 언덕마다 매어놨다. 거기서 채원우와 백겸은 도통 태양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흐물텅거리는 빛덩어리라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를 던전 피막 너머의 흐릿한 석양을 즐겼다.
“원우야. 나 오늘 혼자 외출 좀 다녀오려고 하는데.”
해먹에서 뒹굴거리던 백겸이 등진 채로 오늘 일정을 보고했다. 원우에 비해 백겸의 얼굴은 거의 노출되지 않아서 가끔 저렇게 혼자 나가곤 했다. 도피 이후 초반에는 대부분 백겸만 나갔었기 때문에 별일은 아니었다.
‘홍보 사진 찍었었잖아요.’
‘아, 그거. 원판보다 못해.’
그래도 인터넷 뒤지면 나오는 게 형 얼굴이 아니냐고 하자마자 백겸이 열받아서 ‘그딴 것도 보정이라고 하냐. 하여튼 관공서는!’ 하고 외쳤었다.
몰래 찾아봤는데 확실히 실물이 훨씬 나았다. 아마도 모범적이고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외모로 약간 손을 본 것 같은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버전의 양극단이 나와버린 거다.
실제 양백겸은 잘생기긴 했는데, 까딱 잘못 웃으면 진하게 흘러나오는 어딘가 삐딱한 느낌 때문에 법이 있어도 안 지켜서 법 없이 살 인상이다.
그러나 홍보물 속 양백겸은 사진만으로도 상견례를 통과한 뒤 3선 정치인까지 무리 없이 해낼 것 같다, 라고 인터넷에서들 말하는 그런 인상이었다.
채원우는 그 사진을 저장해 놓고 백겸이 자신에게 좀 차갑게 굴어 섭섭할 때마다 보고 혼자 웃었다.
“올 때 아이스크림 사 올까?”
“냉동고도 없는데요?”
“집에 두지, 뭐.”
“아니에요. 사 와요. 그냥 다 먹자.”
“숟가락으로 그릇에 담아서 먹는 방법만 해당하는 거다.”
백겸이 먼저 가이드라인을 엄격하게 정했다. 전에 아이스크림을 사 왔을 때 시간이 좀 걸리는 바람에 반쯤 녹아버렸던 기억이 나서 그러는 모양이다.
어차피 줄줄 흐르는 아이스크림, 이왕이면 영광된 최후를 맞으라며 백겸의 몸에 좀 묻히고 자신이 먹은 것뿐인데 왜 저러지? 원우는 이해는 하나도 하지 못했으면서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백겸은 당연히 눈치챘다.
“만약 이번에도 녹아서 오면.”
음. 녹아서 올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고. 일정한 온도인 이 안쪽과 달리 바깥은 초봄답게 날씨가 아주 변덕스러웠다.
“이번엔 내가 네 몸에 쏟는다.”
“그건 되는 거예요? 내가 하는 건 안 되고?”
둘 다 어른들이 보면 먹을 것 가지고 장난친다고 엉덩이 맴매 좀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아야 할 놈들이었다. 중요한 문제는 생각도 하지 않고, 넌 되고 나만 안 되냐는 포인트에 꽂혀 삐쭉한 청년이 한때 헌터청의 원톱 헌터였다니, 이러니까 헌터청이…….
잘나가지. 아직도 잘나가지. 원톱은 없어도 열댓 명이 합쳐서 채원우 하나쯤은 하는데 그런 열댓 명이 두 팀은 있다고 하니까. 됐지 그럼. 우리 원우는 이제 예쁘게 웃는 일만 있으면 돼.
고갤 끄덕거린 백겸이 한껏 너그러워졌다.
“그래. 상체에만 묻히도록 허하노라.”
“감사합니다, 형님.”
“그럼 이제 커피를 가져오도록.”
“네.”
채원우의 전투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긴 했어도 생존에 관해서는 여전히 우수한 존재였다. 솔직히 이런 말 하기 조금 미안한데, 최대 수압으로 뽑아내던 소방차 관창에서 정수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왜인지 물맛은 끝내주게 변했다. 그 물로 끓이는 커피는 더 끝내주고. 백겸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커피를 받아 들었고, 원우는 이러기 위해서 자신이 물에 특화된 이능력자로 태어난 것 같다고, 신이 들으면 아주 통탄할 생각이나 해댔다.
* * *
토끼 같은 애인의 배웅을 들으며 바깥으로 나왔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는데, 토끼 같은 애인은 그냥 비유가 아니었다. 우리가 사는 곳이 바로 토끼굴과 비슷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던전의 안은 훨씬 더 넓었다. 공간 인지 능력이 바뀌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여러 문이 존재하고 그 문을 따라서 다른 던전으로 갈 수 있다는 건 진짜 아무도 몰랐을 거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쭙잖게 뭘 아는 것도 아니고 정말 쥐뿔도 모르는 중졸의 상상력이라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다.
하지만, 어쨌든 여러 던전이 생긴 채 없어지지 않았단 게 전제되었고, 다음으로는 공략이 실패했든 아니든 안에 들어와서 살게 된 사람이,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우리가 처음이란 점이 다른 점이었다(이미 살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랑 마찬가지로 그걸 어디에 대고 떠들진 못했겠지).
그래서 알게 된 건데 미공략 상태로 남은 휴지기 던전은 서로 연결되는 모양이다. 덕분에 우리는 도피 은거 생활을 훨씬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마워요, 따봉 던전!
어쨌든 어디가 어디로 통하는지 모르는 만큼 요즘 채원우와 나는 뜻밖에 재난 방송 애청자가 되었다. 몰래 나가보기도 하는데 그곳이 아예 처음 보는 곳이면 곤란하니까, 어디가 터졌고 어디가 공략 실패 지역인지 아는 것도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던전들이 새로 추가될 때마다 몰래 사 온―돈 두고 왔다. 그러니까 사 온 거다― 화이트보드에 하나씩 적고, 확실해진 출입구에는 나름 푯말도 세워뒀다.
‘몬스터의 숲 게임 같아요.’
힐링 귀농 생활을 지향하며 만들어진 게임이지만, 이름에서도 추측 가능하게 어딘가 좀 살벌하고, 밸런스가 잘못된 게 분명한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게임 이름이 채원우의 감상 소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중 하나라도 좀 명필이면 좋을 텐데 채원우나 나나 지독한 악필이었다. 아무리 꽃과 나비를 그려도 살인마가 어쭙잖게 꾸민 유인 간판처럼 보였다.
어쨌든 바로 그 ‘달아나요! 몬스터의 숲’ 같은 분위기와 별개로 온화한 날씨인 우리 주거지를 벗어나서 굴 같은 출입구를 엉금엉금 기어갔다. 이곳은 최근 발생한 곳으로, 특히 요주의 지역이며 특히! 민간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읏차.”
헌터청에서 1㎞ 떨어진 던전이었다.
헌터청은 일종의 성역이었다. 단군 할아버지도 실패한 위치 선정을 해내고 만 바로 그 장소. 지금까지 한 번도 던전이 터진 적이 없는 데다가 그린존처럼 존 근처에서 던전이 터졌다거나 하는 아슬아슬한 일도 없이 그저 고요한, 존재만으로도 그린존의 상징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