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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90화 (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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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은 다시 뒤집혔다. 내내 엎치락뒤치락하던 전과는 달랐다. 헌터청의 정중하고 완벽한 사과문과 함께, 이후 헬리오스와의 인연을 완전히 청산한 뒤 헌터에 대한 처우 개선을 약속했던 것까지 다시 끌어올려졌다. 헌터청은 어쨌든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지 않냐, 우리가 헌터청 없이 어떻게 사냐, 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곧이어 전국민적 신드롬을 일으키게 된 자극적인 커플 매칭 프로그램과 지금까지의 아침 드라마의 뺨을 후려치는 저녁 드라마가 시작되며, 다른 이슈들은 비교적 재미없고 심심하고 지루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예상한 일이지 뭐.”

진짜로 예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헌터청 자체가 망했으면 했던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 말대로 헌터청은 필요한 존재였다. 지금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기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 당장 헌터들이 다시 풀려난다 하더라도 미래는 뻔했다. 기업들이 사적으로 기업만을 위해 이용하거나, 그들 사이에 파벌이 생겨 길거리에서 싸움이나 하겠지. 허구한 날 박살 나는 헌터청 로비 꼴이 될 것이다.

적어도 승규에게 듣기로는, 이제 3년에 한 번씩 재갱신을 하고 그때마다 협상 테이블이 열리게 되었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다만 하나 남은 건…….

“형. 무슨 생각 해요?”

원우가 마스크에 엄지를 걸어 슬쩍 내리며 물었다. 허어, 참 예쁘단 말이지. 모자와 마스크 때문에 이목구비가 한결 더 부각되어서 화려함이 강조되었다. 얘는 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변이 농도가 안정된 이후에도 마스크랑 모자 쓰고 다니라 해야겠다. 사람들 기억에 묻혀도, 눈에 너무 띌 외모라 곤란하다. 우리 한동안 숨어 다녀야 하는데, 도망자에는 맞지 않은 외모였다. 이 잘난 얼굴을 나만 보네. 미안합니다, 시민 여러분.

“어, 호두과자 사갈까 말까 하는 생각.”

“문 닫았잖아요. 가스 때문에 길거리 음식 금지됐는데.”

바로 눈을 반짝이면서 묻는다.

“제가 만들까요?”

“와. 아니. 절대 아니. 그러지 마.”

애가 참 예쁘고 몸도 좋고 그것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데 요리는 더럽게 못했다. 채원우에게 더럽게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은데 이것만큼 찰떡인 표현이 없어서 유감이었다.

금세 시무룩해지는 애를 달래며 변명을 지어냈다.

“아니……. 우리 틀도 없고. 틀을 던전으로 주문할 수는 없잖아.”

“집으로 하면 되죠.”

“거기 이제 배송 안 해.”

“아쉽다.”

“다음에. 언젠가는 되겠지.”

막 플랫폼에 도착했다. 나는 안전문 너머의 철로를 멍하니 응시했다. 멀쩡하게 존재하는 철로가 자꾸만 벌떡 일어나기 직전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이 플랫폼도 피냄새 나는 둥지와 겹쳐 보였다. 멍하니, 풀린 혀로 중얼거렸다.

“세상이 우리를 완전히 잊으면 그땐 되겠지.”

내가 이 세상을 잊을 것 같진 않지만.

곧 전철이 도착했다. 채원우가 차갑게 식은 내 손을 잡았다. 채원우는 내가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지 알고 있을 거다. 원우 역시 그 세상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나와 달리 무서워하지도 않고 악몽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게 신기했다. 나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을 테니, 기억 또한 그러할 텐데.

“저는 어느 세상이든 상관없어요. 형이 있고 없고만 중요해서.”

아픈 건 일상이었다는 채원우. 아픈 게 당연해서 안 아픈 게 이상하다는 채원우. 그래서 무서운 걸 느끼지 못하는 채원우가 안쓰러웠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내가 믿는 수많은 신들한테. 채원우가 세상을 조금만 더 무섭게 느끼게 해달라고. 아마 무서워질 쯤에는 그놈의 익숙함도 잊히지 않았겠어?

레드존은 어두컴컴했다. 밤눈이 밝은 우리라서 그나마 이 밤에도 돌아다닐 수 있는 거였다. 레드존은 이제 뜨문뜨문 켜진 가로등을 빼고는 빛 하나 보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던전 발생 횟수가 늘어나면서 레드존 민간인 철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로선 잘된 일이었다.

“별 잘 보인다.”

채원우와 손을 잡고 별이나 보며 밤 산책을 하는 생활이라니. 꿈만 같았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다. 이 끝내주는 데이트 뒤로 애써 외면하고 있는 암울한 현실 같은 게 현실감을 더해줬다.

사실 그다지 암울한 건 아닌데. 던전 발생은 늘었지만 몬스터의 공격성은 현저히 낮아졌고 공략도 쉬워졌다고 하는데. 원래 모르는 게 무섭다고, 사람들은 여전히 던전을 두렵고 기피해야 할 것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생활 근거지가 위협받고 있는 지역에서는 채원우와 나처럼 던전 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한다. 동굴에 거주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느 분야건 마니아가 생기게 마련이라 던전 내에서 먹을 수 있는 생물에 대해 분류하는 사이트도 생겼다. 정말 마이너하고 아직은 괴식에 미친 취미란 인식만 있기도 하고, 게다가 던전 내 생물에 대한 접근 방법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해서 사실 상상에 가까운 내용이 더 많지만……. 그 방법들이 의외로 도움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 정말 민간인들도 던전을 오가게 되면 그 사이트가 성지가 될지도 모른다.

유독 반짝이는 저 별이 북극성인지 금성인지 오리온자리인지, 아니면 인공위성인지 찍어보려 하는데 갑자기 채원우가 나를 뒤로 확 끌었다. 그리고 풀숲으로 손을 뻗어 허공으로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어! 아냐. 아냐, 아냐. 쟤는 몬스터 아니야.”

던전이 많아진 만큼, 그리고 규모가 엄청나게 다양해진 만큼 작은 던전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 빠져나오는 몬스터들이 생기게 되었다. 야생 동물처럼 흩어져 다니는 그것들의 특징은, 공격력이 낮고 겁이 많아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숨어 지낸다는 거다. 걔네를 생각해 보니까 레드존에서 사람들을 철수시킨 게 맞긴 하네.

하지만 채원우가 발견해서 들어 올린 건 몬스터가 아니라 그냥 동물이었다. 익히 아는 녀석이었다. 터줏대감처럼 이곳을 맘대로 다니던 앤데, 철수하면서 두고 간 모양이다.

채원우는 천천히 개를 내려놓았다. 강아지만큼 작은데 사실은 사람 나이로 치면 우리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을 노견이었다. 그런데도 잡기도 전에 재빠르게 도망쳤다.

개가 향하는 방향 끝에 자신이 살던 집이 나왔다. 아주 흐리게 빛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어쩌면 내내 가족을 기다렸는데 오늘 그 가족이 몰래 돌아온 걸지도 모르겠다.

“빠르네요.”

저 정도면 채원우가 금방 잡을 속도였다. 예전의 채원우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제 채원우는 그 정도로 빠르게 달릴 수도 없고, 예전처럼 쉽게 어떤 생명 활동을 꺼뜨릴 수도 없었다. 능력은 있으나 예전과 같지 않았다.

감히 S급으로 추정할 수 있는 수준의 이능력자가 아니라 D 수준에 머무를 정도로 떨어진 듯했다. 폭주의 부작용이었다. 우리는 비슷한 수준의 몸이 되어서는 서로를 지탱하며 살게 되었다.

나로서는 제법 그럴싸한 해피엔딩이라 느껴졌지만, 채원우는……? 혹시 자신의 능력이 망가진 것에 대해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까?

“왜 그렇게 봐요?”

허공에 손을 턴 채원우가 내려놓았던 장바구니를 들었다. 너 혹시 능력을 잃어서 상실감이나 후회를 느끼지 않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입술을 열 틈도 주지 않고 채원우가 내게 자기 입술을 갖다 댔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혀까지 넣는다. 욕심이 아니라 다정한 안부 인사와 비슷한 키스가 오갔다.

내 볼을 감쌌던 손을 떼며 채원우가 물었다.

“몇 점?”

“99점.”

“1점은 어디 갔어요. 진짜 형한테 100점 받기 힘들다.”

투덜거리는 모습이 존나 귀여워서 가산점 10점 추가. 100점, 아니, 천 점이야 이 자식아……. 근데 말하면 이제 시무룩해 하지 않겠지? 바로 저 모습이 보고 싶어서 만 점은 자꾸만 멀어졌다.

다시 손을 잡고 걸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내가 사뒀던 집이다. 레드존에서 사람을 철수한 타이밍이 아주 끝내준 덕에, 우리는 던전에서 잠시 몸을 은신했다가 나와서는 여기를 임시 처소로 쓰고 있었다. 승규가 가끔 쪽지도 두고 간다. 아주 옛날, 고릿적에 사용한 방법처럼 펜팔 친구가 된 거다.

담배를 끊고 있는 중이라 주머니에 넉넉하게 채우고 다니는 막대 사탕을 꺼내 물었다. 날이 풀리긴 했어도 밤엔 조금 쌀쌀해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전기 매트부터 켰다.

사람이 철수했어도 전기를 끊지 않다니. 언젠가 사람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야트막한 기대처럼 여겨져서 인류애가 느껴지기도 했다. 시설의 전기를 끊어서 마을이 폐허화되는 걸 막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어도, 뭐……. 유일, 아니, 유이한 주민으로 이 정도 감상적인 해석은 할 수 있잖아.

“혀엉.”

먼저 욕실에 들어갔던 채원우가 울상으로 고갤 쏙 뺐다.

“벌레 있어요. 잡아주면 안 돼요?”

“장난하니. 당연히 해주지 우리 원우 부탁인데.”

나는 실실 웃으며 욕실로 들어가다가 얼굴을 굳혔다. 생각보다 컸다. 커다란 거미가 천장에 붙어 있었다.

“제가 죽일까요.”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면서 허세는.

“그럴 수 있으면 일단 내 등 뒤에서 나오시죠.”

“근데 거미는 익충 아니에요?”

“어떻게든 살려볼게. 나가서 잠깐 기다려.”

비장하게 채원우를 내보내고 욕실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화장실 솔로 거미줄째로 둘둘 감아 아예 창밖으로 휙 던졌다.

“대단한 전투였다.”

욕실 문을 열자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채원우가 박수를 쳤다. 거미 하나도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저게, 얼마 전까진 손으로 몬스터 폐를 들고 다니던 그 애라고 누가 믿을 수 있겠어. 나도 못 믿겠는데. 픽 웃고는 물었다.

“같이 씻을까?”

“응. 씻자.”

이럴 때만 반말을 찍찍하는 채원우가 옷도 안 벗은 나를 밀고 들어왔다. 몸만은 여전히 크고 단단했다. 능력만 약해졌지 채원우는 여전히 내 귀여운 괴물이었다.

* * *

채원우는 깊게 잠든 백겸의 옆에 팔을 포개고 누워 백겸의 얼굴을 아예 대놓고 구경했다. 요즘 백겸은 아주 많이 잔다. 그간 못 잔 잠을 몰아서 자는 게 분명하다.

백겸은 그냥 그동안 구출 작전에 너무 많은 집중을 해서 짧게 불면증을 앓은 거라고 했지만, 오랜 시간 그를 지켜본 원우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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