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제가 꺾어 왔어요.”
“날 두고? 여기 몬스터들 안에?”
“얌전하더라고요.”
기가 찼다. 그래도 꽃은 예뻤고 채원우는 꽃보다 예뻤다.
“저, 칼로 몬스터 죽이는 거 말고 다른 일 하는 건 처음이에요.”
무뚝뚝한 말이지만, 그 내면에 깔린 떨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안 해본 게 많아요. 형 만나고 알았어요. 저는 헌터청에서 길러진 물건이었단 걸.”
“…….”
“그래서 가끔 형을 만난 걸 후회했어요. 아예 안 만났다면 의문도 가지지 않고, 꼴사납게 스스로 망가지다가 폭주도 안 했을 텐데.”
“역사에 기록될걸요. 구름까지 모으던 전설의 헌터니 어쩌니 하면서. 쪽팔리긴 하겠다, 채원우 헌터.”
채원우는 대답 대신 웃었다. 나는 꽃다발을 이리저리 기울였다.
“갑자기 촉수 같은 게 나오는 건 아니겠죠? 진짜 풀 맞지?”
“줄기 잘랐을 때 피가 나오진 않던데요.”
“음…….”
“형을 만나고 너무 오래 지나서 재회했을 때는 제가 좀 다른 마음을 품기도 했어요. 그냥 다 숨기고 내 안정제로 평생 둘까 했는데.”
“사람을 멋대로 약 취급하네.”
“그러게요. 형이 절 멋대로 헌터나 물건 취급 안 하고 애새끼 취급했던 것처럼요.”
“아, 설마.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마. 날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이런 말.”
“뭐 어때요. 사실인데. 형은 그냥 제 모든 처음이에요.”
그건…… 나쁘진 않았다. 나는 꽃을 들고 채원우에게 다가섰다. 이제 우리는 조금만 고갤 틀면 입술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영화관……. 다시 가고 싶은데 이젠 못 가겠죠?”
“왜 못 가. 몰래 가면 되지. 변장해서. 아니면…….”
나는 이 낙원을 둘러봤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고 끔찍하던 던전이 이렇게 변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겠지. 건물을 잡아먹고 도심을 제멋대로 바꾸는 것까지만 알았지, 스스로 꽃을 피우고 나무들로 숲을 이룰 줄은 몰랐다. 우리는 오해가 참 많았던 것 같다.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혀질 때까지 여기서 살아도 좋고.”
갑자기 몬스터들이 미쳐 날뛰더라도 나에겐 채원우가 있다. 채원우에게는 내가 있고. 그리고 솔직히 내가 그냥 안정제치고는 싸움도 곧잘 하거든. 그건 누구보다 내 파트너가 잘 안다.
“이 안으로 들어오는 거, 형 계획이었어요?”
“왜요. 충동적인 결정이었으면 취소하게?”
“아뇨. 좋아요. 전 평생 계획 속에서 살았으니까요.”
형이 처음이에요, 제 오점은.
채원우가 수줍게 중얼거렸다. 나는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던 채원우의 기사에 달리던 댓글 중 하나를 기억했다. 너라는 완벽한 삶에 나라는 오점을 남겨도 되냐던 주접 댓글. 킥킥 웃었다. 채원우는 사실 오점투성이고 완벽한 점은 나밖에 없을 수도 있지.
“키스해 봐.”
중얼거리자 채원우가 내 허리를 감싸 당기고 고갤 틀었다. 이제는 각도가 제법 나왔다. 엷은 한숨이 닿고 곧 입술이 포개졌다. 아직 미열이 감도는 채원우의 혀가 따뜻하고 좋았다.
나는 손을 들어 채원우의 목을 감쌌다. 꽃다발이 부서졌다. 채원우는 생각보다 꽃꽂이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막눈이 보기에도 예뻤으니까. 게다가 향기도 좋았다. 꽃다발이 뭉개지며 라벤더 향기가 났다.
* * *
난리가 났다. 작은 사건도 아니고 큰 사건이었고, 큰 사건이 여러 개 뭉쳐 돌돌 말려 김밥이 된 수준이었다.
개방형 던전이 생겼다. 기록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발발한 던전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핫하던 헌터가 살신성인으로 막다가 폭주하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나더니 그 헌터를 데리고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 던전 입구가 닫히고 시청역, 용산역 광장에 이어 그 상태로 고착화되었다.
인터넷은 난리가 났다. 하필 도심에 생성된 던전이었던 만큼, 아무리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해도 개인 인터넷 방송은 완전히 막지도 못했다. 멋대로, 일부만을 찍어 올렸지만 난리가 나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그 헌터를 데리고 사라진 남자가 의경 옷을 입고 있었던 터라 소문은 일파만파로 더 퍼졌다.
여론은 처음에는 비등비등하다가 헌터에 대한 욕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그리고 박선행 기자가 몸담은 언론사에서 독점 기사를 터뜨렸다.
<헌터청 내 수석 연구원 K 씨의 비밀, 그리고 헬리오스의 유작>
던전 안으로 사라진 그 헌터가 사실은 헬리오스의 지부장이던 K 연구원의 조카이며, 삼촌이 부모를 잃은 조카를 데리고 이능력을 극도로 발달시킬 수 있는 훈련 및 실험을 펼쳐 왔다는 주장이었다.
여론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헌터청은 헬리오스와 관계는 분명히 끊어졌으며 K 연구원에 대해서는 내부적 조사가 진행될 예정이라는 정도로 대답을 미루었다. 대답을 미룰수록 음모론이 더 퍼진다는 걸 간과한 모양이다.
“완전히 미친 새끼네.”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던 손님이 중얼거렸다. 대한민국의 소시민이지만 편의점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따로 없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경력만 7년 차인 김민수는 고갤 들었다.
남자는 손에 꺾어 먹는 요거트를 든 채로 화면에 빠질 기세였다. 손목에는 쇼핑 바구니도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특정 편의점에서만 파는 컵라면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매너 없게 이어폰도 없이 스피커로 듣고 있어서 김민수 역시 지금 손님이 무슨 뉴스를 보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실 못 들어도 유추 가능했다. 요즘 대한민국은 그 이야기뿐이니까.
손님은 계산대에 와서도 혀를 끌끌 찼다.
“미친 새끼. 어떻게 조카를 데리고 그래요. 그렇죠?”
온갖 진상, 온갖 미친 사람, 온갖 괴인을 만나온 김민수는 넉살 좋게 대꾸했다.
“그러니까요. 공부를 너무 많이 했나 봐요.”
“이제라도 밝혀져서 다행이죠, 뭐.”
“근데 밝혀지면 뭐 해요. 벌을 받아야죠.”
“받을까요?”
그 물음에 김민수는 피식 웃었다. 솔직히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돈도 있고 힘도 있고 똑똑한데, 유야무야 묻히지 않을까. 한 달만 지나도 이 주제는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가다가 곧 사라질 거다.
“글쎄요……. 받아도 점점 감형되지 않을까요? 삼만칠천오백 원입니다, 포인트 카드 있으세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포인트는 없습니다.”
손님은 10,000원짜리를 네 장 꺼내 내밀었다. 김민수가 거스름돈을 내밀다가 실수로 동전을 떨어뜨렸다. 둘은 동시에 몸을 숙였다. 계산대 아래에서 얼굴이 마주치는 이런 상황에는 보통 로맨틱한 기류가…… 흐르지 않는다. 다만 깊숙이 눌러썼던 모자챙 아래에 숨겨진 손님 얼굴은 볼 수 있었다.
‘와. 진짜 잘생겼네.’
김민수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보았다가 벌떡 일어났다. 하마터면 계산대에 부딪칠 뻔했다.
‘나라면 모자 벗고 다닐 텐데.’
모자가 큰 게 아니라 머리가 작아서 깊이 눌러쓴 모양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았다.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어 인상도 좋은데 심지어 엄청 잘생겨서, 좋은 인상에 홀려도 섣부르게 말 걸기 힘들 것 같았다.
“젓가락 좀 가져갈게요.”
“네, 네! 마음껏……. 네……!”
김민수가 절로 친절 우수 직원이 되어 두 손으로 젓가락 통을 내밀었다. 한 주먹이나 집어가는데도 인상이 찌푸려지지 않았다.
“수고하세요.”
“네. 수고할게요…….”
문이 짤랑 열리자 언제 서 있었는지 모를 장신의 남자가 보였다. 둘은 일행이었는지, 모자 쓴 손님이 나가자 마찬가지로 모자에 후드까지 눌러쓴 남자가 몸을 기울이며 무어라고 물었다. 저 남자도 왠지 엄청 잘생겼을 것 같다…….
“살 거 다 샀어?”
“네. 형은…….”
뒷말은 문에 닫혀 안 들렸지만, 목소리도 끝내줬다. 김민수는 인간은 시각의 동물이라는 걸 아주 분명히 자각하며, 두 인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갤 돌리고 굳어 있었다.
드디어 둘이 사라진 뒤에야 허허 웃었다. 저런 사람이 여기 편의점 단골이라고 인별에만 올려도 사장님 입 찢어지겠는데, 하다가 고갤 갸웃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인터넷에서 봤나?
한참 갸웃거리던 김민수는 곧 우르르 들어오는 손님에 고갤 내저었다.
에이. 보긴 어디서 봐. 인별 피드 같은 데서 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인별 피드를 내렸다. 중간에 잠깐 ‘네티즌들이 할 말을 잃은 헌터청의 충격적인 비밀!’이라는 사진이 짧게 스쳐 지나갔고, 곧 그 위로 새로 시작한 커플 매칭 프로그램에서 가장 핫한 출연진의 사진이 떴다. 김민수는 거침없이 그 피드를 눌렀다. 조금 전 손님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졌다.
* * *
“장 잘 봤어?”
발걸음이 가볍다. 요즘 핫한 라면을 구하기 위해 편의점을 돌았다. 세 번의 실패 끝에 만난 값진 수확물에 손은 거추장스러운데도 발만은 날개 달린 것처럼 가벼웠다. 게다가 처음으로 낮에 나온 외출이었다.
“사 오라는 거 다 사 왔어요.”
채원우가 자랑스럽게 봉지를 벌렸다. 얼추 다 맞았다. 숙주나물이 아니라 콩나물이 들어 있는 것만 빼면.
콩나물도 나쁘지 않지. 어떻게든 해먹을 순 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수익이다.
40분을 걸고 각자 필요한 걸 사 오기로 했다. 앞서 돈 편의점에서 면도기와 세면도구, 그리고 속옷을 샀고 마지막 들른 곳에서 컵라면을 손에 넣었다. 체크리스트가 만족스럽게 채워졌다. 채원우는 내가 써준 대로 장을 봐 왔다. 채원우의 기억이 맞다면, 이건 채원우가 처음으로 홀로 장을 보는 경험이 될 거다.
우리는 아주 대담하게 지하철로 들어갔다. 사실 그래도 되는 이유가 있었다.
“현재 대기 중 변이 지수가 높습니다! KF94 이상의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 주세요!”
공익 요원이 소리 높여 외쳤다. 마스크를 끼고 있지 않던 사람들도 주섬주섬 가방에서 꺼내는 게 보였다. 우리는 이미 마스크를 끼고 있던 상태였다.
2주 전, 헌터청에 대한 여론이 한참 악화될 쯤 속보가 나왔다. 요즘 속속 발생하는 작은 규모의 던전에서 유전자 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 유독성 가스가 나오고 있단 내용이었다.
헌터청은 바로 대응 기사를 냈다. 모든 던전에 헌터들을 배치하고 최선을 다해 이 사태를 수습하여 국민들을 안전하게 지키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