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화가 나다가 그냥 웃음이 났다. 어린 게 잘난 척도 수준급이다. 어리니까 할 수 있는 게 잘난 척인 것도 아는데,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도 뭐, 어린애들 특징이지.
‘파트너가 죽으면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게 될 텐데 왜 죽어요? 멍청하거나 약하거나 둘 다 해당되는 거죠.’
그러는 너는 오지랖이 넓고 싸가지가 없거나 나한테 관심이 많고 착한 거 둘 다 해당되는 모양이다.
‘형이 제 거라면 나는 형도 살리고 나도 살 텐데. 적어도 형만 살게 둬서 다른 사람이 형을 차지하지는 못하게 할 건데.’
더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나는 내내 틀어놓고 있던 수돗물에서 손을 튀겨 그 애의 얼굴에 물방울을 튕겼다. 그때는 키만 크고 비쩍 마르고 몸에는 온통 주삿바늘 자국만 있는 꼬마가 몸 건장했던 내 파트너보고 약하다 어쩌다 하는 게 진짜 우스웠었다.
‘형. 다음엔 날 선택하면 안 돼요? 우리 잘 맞지 않아요?’
쟤는 진짜 애답지 않다.
나는 좀 질색하면서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몇 년 후에는 쟤는 진짜 애 같다, 라고 생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괜찮으십니까?”
빠아아앙 하는 소리가 한참 후에야 메아리처럼 들렸다.
“선생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눈을 뜨니까 시야가 새빨갛다가 돌아왔다. 고갤 번쩍 드니 날 깨우고 있던 의경 복장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뒀다. 머리가 멍했다. 그렇게 얼빠진 채 앉아 있다가 코 밑이 축축해서 훔쳤다. 소매에 새빨간 게 묻었다.
와, 나 죽는 줄 알았네. 한 번 죽어봤지만. 사망 경력직이 되고 싶진 않아서.
“벼, 병원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병원 상황이…….”
“여의치 않아요?”
멍하게 의경을 보면서 물었다. 의경의 눈에 ‘이거 미친놈인가?’ 하는 의심의 선명하게 보였다.
“저기…… 제가 머리를 부딪쳐서 정신이 없어서요. 부축해 주실 수 있으세요?”
“네. 그, 내리셔서 면허증도 좀 확인하겠습니다.”
“일단 내려야죠.”
안전벨트를 푸는 손이 떨렸다. 몇 번이고 떨려서 결국 선량한 의경 친구가 풀어줬다. 옆으로 몸을 돌리고 있어서 풀리자마자 앞으로 고꾸라졌다. 의경 친구가 마침 딱 받아줘서 다행이었다.
거의, 물이 담긴 비닐봉지처럼 천천히 끌어 내려졌다. 옛날에 포장마차에서 오뎅국물을 담아주던 비닐이 된 기분이었다. 몸은 뜨끈뜨끈하고…….
바닥에 발이 닿았다.
“선생님. 일단은 여기 근처가 봉쇄되어서 말입니다.”
근처로 오긴 한 거구나. 나는 고갤 끄덕이고 몸을 뗐다. 내 손에는 의경의 허리에 달려 있던 진압봉이 들려 있었다.
“제가 제대로 왔네요. 옷 좀 빌려주시겠어요?”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떠오른다. 미안한데 저는 사기꾼이었습니다. 손등으로 줄줄 흐르는 피를 훔치며 고갤 까딱였다.
소매는 조금 짧고 어깨는 조금 끼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적어도 내 옷은 그 착한 의경 친구에게 딱 맞겠다. 내가 소매를 좀 찢긴 했지만…….
찢은 천조각을 이마에 대고 헬멧을 썼다. 그러자 확실히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채원우가 근처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몸이 무리를 했다는 것만은 사실이라 더운 숨이 나왔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주먹으로 팔뚝을 때렸다. 그러고 나서 출발했다. 방향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기 먼지와 먹구름이 모이는 곳이 목표였으니까.
다가가면서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내가 여태 보아온 건 고작 폭주 직전까지 간 헌터에 불과했다. 그건 다시 말해서, 폭주한 헌터를 본 적은 없다는 뜻이었다. 이쯤 되니 대체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다시 자문해야만 했다.
승규도 물었었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솔직히 말하자면, 심장이 뚫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다. 실연으로 괴로워하긴 했으나 너도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도 잘 먹고 잘 살 테니, 서로 행운을 빌어주며 끝났을지도 모른단 거다.
그런데 심장이 뚫리고, 채원우가 준 목걸이와 똑같은 빛이 나를 억지로 다시 삶으로 끌어냈을 때, 모든 게 바뀌었다.
세상은 종말이었다. 종말은 극적이기보다 아주 느리고 지겹게 진행될 거라는 글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말로 가고 있는 길목에 있는 거다.
종말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초에 마침표가 언제 찍힐지, 어떻게 찍힐지 아무도 모르니까.
하지만 한 번 죽어보니, 세상이 끝나가니 후회나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문자 그대로 죽으려고 환장을 했기 때문에, 채원우를 후회 없이, 극단적으로, 미친 새끼처럼, 사랑해 보고자 하는 거다.
어렸을 때 봤단 이유 하나로, 어린 왕자처럼, 그때 정신 연령에 멈춘 듯, 애새끼처럼, 내 사용권이 자기 차례로 돌아올 때까지 버티고 버틴 채원우처럼.
“에스퍼들은!”
“전방에 있던 에스퍼들과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채원우와 연결은 돼?!”
“이어 모니터는 진작 연결이 끊겼지 말입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언제나 전쟁터에서 지냈는데도 여기에 비할 수가 없었다. 여긴 진정한 개판이었다.
거센 바람이 불었다. 폭풍우 같았다. 나는 채원우가 어디서든 수분을 뽑아내는 걸 알았다. 그게 저 묵직하게 모인 먹구름에서 진행된다면……. 과장을 섞어서 채원우는 기후까지 뜻대로 조절할 수 있는 헌터가 되는 거다. 그의 몸이 버티기만 한다면 말이지.
“애초에 에스퍼들의 능력이 닿질 않아요! 이 정도 상황인데 채원우 헌터의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할지도 모르고, 청각도 시각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상황은 정말로 내 상상보다 안 좋았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다들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덩달아 건물 파편들이 무섭게 흔들렸다. 이리저리 날리는 것들을 막기 위해 에스퍼들이 애를 쓰고 있었다.
정신계 에스퍼들의 능력 발동 조건은 안전이 보장된 지대인데, 그것부터가 확보가 안 되는 거다. 그리고 지금 떠드는 말처럼 에스퍼들의 그 능력이 닿을 뇌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지금 허수아비를 구하러 가는 건가?
가슴이 선득해질 정도로 시렸다.
그래도 가야겠어?
……이미 펜던트는 사라진 빈 목걸이 줄을 손으로 쥐었다. 이게 목에 걸려 있는 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길 택할 거다. 채원우가 나를 구했으니 나도 한 번은 채원우를 구해야 공평했다.
“저, 저 어디 가! 거기 어디 가요!”
헌터청 소속 옷도 아니고 의경 옷을 입고 자기들보다 앞으로 걸어가는 나를 발견했는지, 뒤에서 왕왕 소리를 질러댔다. 제대로 들렸지만 안 들리는 척했다.
“아오, 거추장스러워!”
결국 헬멧을 벗어 던졌다. 숨만 막혔다. 헬멧을 바닥에 떨어뜨리자마자 거센 바람에 뒤로 굴러갔다.
폭주한 헌터는 어떻게 되지?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 교본에 분명 적혀 있었는데……. 아니야. 거기에 적힌 건 이거였다. ‘파트너가 없이 헌터청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폭주 임계점에 이른 헌터는 사살한다.’ 정 없는 새끼들.
머리가 웅웅 울렸다. 지끈지끈 아팠다. 뇌진탕만은 아니길 바랐다. 귀랑 코에서 물이 안 나오니까 뇌진탕은 아니겠지 하며 희망을 걸었다.
“이봐요!”
거센 바람에 따라 영혼이랑 정신이 한 꺼풀 벗겨져 나가려는데 누군가 내 팔을 덥석 잡았다. 멀거니 뒤를 돌아보니 헌터청에서 채원우와 간식거리를 털 때 우리한테 너희 생각은 어떠냐며 물어봤던 그 헌터였다.
헌터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보다가 남자의 목에 고글이 걸려 있는 걸 보고 단번에 빼앗았다. 갑자기 얼굴 위로 뭐가 휙 벗겨진 남자를 두고 고글을 썼다. 이게 훨씬 나았다. 먼지는 막아주고 숨 쉬긴 편하고.
“아, 반다나도 빌릴게요.”
다들 이 바람에 대한 대비책으로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이다. 손목에 걸고 있던 반다나까지 뺏기는 동안 헌터는 별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을 기다려줄 시간이 있으면 좋을 텐데 우리는 휴게실에서 만난 게 아니었다. 나는 계속 가야만 했다.
다시 이동하려는데 세 걸음 떼자마자 도로 잡혔다. 슬슬 짜증이 났다. 체급은 비슷한데 신체 능력에서 차이가 날 거다. 제압하려면 영리하게…….
“조심해.”
남자가 한 말은 내 예상외의 것이라서 움켜쥐려던 주먹에서 힘이 빠졌다.
“넌 알아볼 것 같다. 아니, 알아볼 거야. 사이가 좋든 나쁘든 헌터들은 자기 가이드는 반드시 알아봐.”
“……청각, 시각, 심지어 뇌 활동도 보장할 수 없다는데요?”
“설마 벌써 그 정도로 망가졌겠어? 쟤는 우리 괴물들 중에서도 괴물이잖아.”
“…….”
몸이 짜릿짜릿했다. 직격하는 위로에 목이 메었다. 헌터는 다시 한번 조심하라고 내게 당부했다. 그 역시, 사실 믿을 구석이라곤 없는 상황이라 그럴 거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관계든 헌터는 자신의 파트너를 알아본다. 그 말만 믿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고갤 들었다. 지반이 위로 높게 올라가 있었다. 아래를 침식하며 파고 들어가거나 반지하처럼 솟거나 같은 높이로 생기는 던전과 달랐다. 완만해도 언덕은 언덕이었다. 게다가 바람이 심하게 부니 기듯 올라가야 했다.
바람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내린 쓰레기들이 처참하게 녹고 있었다. 경사가 가파른 건 아니지만, 위에서 아래라는 위치가 주는 분위기는 분명 다르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려오는 괴물들을 보았을 때의 공포가 어림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좀비 떼가 나오는 영화 속 한 장면 같지 않았을까.
“우리는 호러 코미디라니까…….”
중얼거리며 겨우겨우 앞으로 한 걸음씩 전진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몸이 달았다. 그러면서도 왠지, 채원우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랜 시간 고독과 고통 속에서.
“코미디는 언제나 해피 엔딩이지? 안 그래……?”
호러가 붙어서 아슬아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