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백겸에게는 언제나 깨끗한 냄새가 났다. 세탁세제 특유의 향과 그가 사용하는 향이 강하지 않는 바디클렌저 향이 어우러져서 근처에만 가도 공기가 청량하게 바뀌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원우는 늘 백겸이 제 나이보다 더 어리게 느껴졌다. 고작 한두 살 터울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특히 웃을 때면 그 인상이 더 강해졌다. 뽀득뽀득. 원우는 백겸을 보면 그 표현이 떠올랐다. 뽀득뽀득.
백겸은 자신을 전혀 기억 못 하는 눈치였지만, 채원우는 처음부터 그를 알았다. 모를 리가 없었다. 백겸이 자신의 파트너가 될 때까지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타이밍을 계산해 왔는데.
처음에는 그저 집착과 미련이었다. 저 사람이 있으면 아프지 않다, 약을 그만 먹어도 된다. 그것밖에는 없었다.
능력 수치가 높을수록 몸에는 무리가 간다. 아무리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를 듣는 헌터여도, 어쨌든 기본 베이스는 인간의 구조와 똑같았다. 똑같이 내장 있고 피 흐르고 뇌로 생각하고.
고통에는 익숙해지는 거지, 무감각해지는 게 아니었다.
어린 시절 백겸이 가이딩 봉사로 계약 기간을 채울 때 처음 만났다. 지금까지 맞는 가이드가 없던 채원우에게 백겸은 한 줄기 빛이었다.
헌터청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연구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 한 줄기 빛을 희망으로 여기고 미련을 놓지 못했다. 양백겸 말고도 다른 가이드가 나타나겠지, 채원우에게 맞는.
그 희망이 유일한 한 줄기 빛이란 걸 깨닫게 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계단에서 백겸을 처음 봤을 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를 만지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만져 주었으면 했다. 가슴이 무척 뛰었다. 드디어 이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나는구나 싶었다.
유일한 퇴로, 유일한 안정제.
사실 은근히 기대도 했던 것 같다. 혹시 나를 기억하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는 좀 더 좋은 파트너가 되지 않을까.
그 전 파트너들과 어떻게 지냈는지는 일부러 알아보지 않았다. 백겸의 과거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걸 좋아하며 지냈는지는 몰라도 누구와 함께 페어를 맺고 또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줬을 걸 생각하는 건 유쾌하지 않았다.
“보고 싶어.”
원우는 또 자신도 모르게 툭 나와버린 속마음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이렇게 가둬두고 잊으려는 본심이 입술 사이로 나왔다.
백겸이 왜 그 옛날에 차라리 입을 닫길 선택했는지 이제는 이해가 갔다. 자신의 진심이 두렵고, 그게 말로 나온 순간 그 마음이 더 강해질 걸 알아서일 거다.
그때 백겸의 진심은 이곳을 떠나고 싶어, 였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가 갈 곳이 없다는 것도 믿었다. 그는 헌터청을 떠나도 금세 다시 누군가의 새로운 빛으로 돌아왔으니까.
양백겸은 아주 많이 바빴고 그동안 헌터청에서 신뢰도 높아졌다. 자신도 내내 헌터청에 있었는데 백겸은 빛 속에 있고 자신은 그림자 속에 있는 것만 같았었다.
잠시라도 곁에 있던 것으로 만족해야겠지. 약속했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보고 싶다.
그와 했던 약속 따위, 어차피 백겸도 기억 못 하는 것 같으니 모르는 척할까 했다. 그런 욕심을 안 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그를 다치게 한 이상 더는 고집 부릴 수 없었다. 신 같은 건 믿지 않지만, 마치 네 약속을 지키라는 계시 같았다.
원우는 잔을 개수대에 내려놨다. 힘 조절을 실패해서 컵이 깨졌다. 벌써 몇 개째인지 모른다. 상관없었다.
어쩌면 오늘은 귀나, 귀에 자리가 없으면 눈썹에라도 또 구멍을 뚫자고 할지도 모른다. 약효가 확연히 떨어지고 있으니까.
다시 백겸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무의식중에 돌아가게 되는 곳인 만큼 고집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백겸의 방으로 향하는 원우의 뒤로 물방울들이 둥둥 떠다녔다. 자기들끼리 합쳐져 커지기도 하고 분해되어 작아지기도 했다. 그만큼 능력 운용자인 채원우가 불안정하다는 의미였다.
문을 연 원우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래도 잔향이 거의 나지 않았다. 원우의 뒤에 있던 물방울이 예쁘게 빚은 원형이 아니라 바이러스처럼 삐죽삐죽 곤두섰다.
문을 쾅 닫고 백겸의 침대로 엎어졌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여기서 엄한 짓을 했었다고 거짓말했었다. 그게 진짜가 될 줄도 모르고.
원우는 이젠 헌터의 감각으로도 느낄 수 없는 백겸의 체향에 흥분했다. 어차피 비강이 아니라 대뇌피질로 떠올리는 향기였다.
뽀득뽀득. 그 표현을 떠올리며 원우는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원래도 정신이 나갔다고는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특히 더 자신이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매일, 매분, 매초. 조금씩, 조금씩. 뽀득뽀득.
* * *
승규가 날 데리러 왔다. 한심하다는 눈빛에 억울했다. 술은 맥주 한 잔밖에 안 마셨고 고작 그 정도 양으로 내가 주취자가 될 리가 없다는 걸 구구절절 설명했다.
“아, 예.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닌 법이지요.”
“진짜 아니라니까. 미치겠네. 나 납치당했었다고.”
눈빛이 한층 더 심화됐다.
“이젠 거짓말도 하냐? 누가 널 납치해. 네가 납치한다면 모를까. 미친놈.”
“됐어, 새끼야.”
“그래도 나밖에 없지? 내가 너 데리러 온 건 고맙지?”
“꺼져. 할머니가 가라고 하셨겠지.”
“그건 아니고.”
왠지 의미심장하게 웃는 게 찝찝했다.
간밤에 계속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던 데다 차가운 벽에 기대서 선잠을 자서 그런가, 피곤했다. 집까지 가는 잠깐 사이에 깊게 졸아버렸다.
마침 퍼뜩 깨니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이었다. 승규는 제 집처럼 주차를 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얼굴이 팍 찌푸려졌다.
“이 꼴이 뭐야.”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마당에 있는 작은 장독대 뚜껑도 열려 있었고 도어 매트는 뒤집혀 있었다. 훔쳐 갈 게 사실 없어서 조급할 일은 없지만 확실히 불쾌했다.
승규도 당황했는지 마당을 이리저리 돌아봤다.
“뒤질 거면 뒷정리도 하고 가야지.”
욕을 껌처럼 씹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열쇠가 나갔다. 일부러 엿 먹이려고 이렇게 해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야, 이게 뭐야! 경찰에 신고할까?! 아니지. 당연히 신고해야지. 신고하자. 어?!”
“됐어.”
나는 구석으로 둘둘 말린 카펫을 발바닥으로 끌어 폈다. 승규는 주머니에 손이나 꽂고 태연하게 구는 내 태도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어어? 야, 아무리 집에 훔쳐 갈 은수저도 없다고 해도, 임마.”
“됐다고. 누가 왔다 갔는지 알 만해.”
“누, 누군데?”
“어제 나 납치한 사람들이겠지. 아니면 적어도 그 동료.”
“아씨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헌터청이나, 그 관련된 기관? 기업?”
나 대신 사색이 된 승규가 방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내가 모아둔 채원우 관련 파일이 있는 곳이었다.
“그럼 이렇게 느긋할 때가 아니지! 미친! 신고도 못 하네, 저 새끼가 불법으로 자료 모아서.”
“불법은 아니었거든?”
“비밀 엄수 깨고 밀반출했으면 불법이지, 새끼야!”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고.”
나는 옷장을 마구 열어젖히는 승규에게 다가갔다. 좀 진정하라는 의미로 어깨를 잡고 장롱 문을 하나씩 다 닫았다.
“그 파일 여기에 없어.”
“어……?”
“여기에 없다고.”
얼빠진 얼굴이 웃기다. 고등학생 교복을 막 입었던 김승규처럼 보여서.
나는 팔짱을 끼고 장롱에 기댔다. 여전히 넋이 나간 승규에게 확실히 말해 줬다.
“내가 다른 곳에 숨겨뒀다고. 파일.”
참 아쉽지. 내 머리가 생각보다 좋은 것 같아서. 던전만 아니었다면 제법 좋은 대학도 갔을 텐데. 하지만 그랬다면 원우와는 만나지 못했겠지.
아니. 우리가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만났을까? 어? 그랬을까, 채원우?
* * *
이렇게 된 거다.
일단 서류를 내 집에 두는 것 자체가 좀 멍청하고 위험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 집―당연히 아는 사람 집이겠지―에 놓자니 이 일에 연루시키는 꼴이니 옮겨둘 수도 없었다.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어차피 잠도 안 오고 해서 할 일이 그것밖에 없었다. 머리 굴리며 삽질하기.
삽질, 삽질, 삽질……. 그러다가 떠오른 거다. 숨길 곳이.
내가 살다가 던전 여파로 쫄딱 무너진 빌라는 여전히 무너진 채로 남아 있었다. 잔해는 얼추 치워 흉물 꼴은 아니지만, 여전히 보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바리게이트를 친 공터로 둔 상태였다. 며칠 전에 눈이 왔다가 따뜻한 날씨에 녹았기 때문에 흙도 적당히 질퍽질퍽해서 딱이었다.
그래서 나는 CCTV도 드문드문 설치된 레드존의 이점을 한껏 누려, 늦은 밤(새벽이었나?) 삽을 들고 누구 하나 묻을 기세로 무너진 건물터로 간 거다.
비닐백에 넣고 뽁뽁이로 감싸고 신문지로 감싼 다음에 또 뽁뽁이로 감싼 다음 김장 비닐로 감싸서 다시 비닐백에 넣었다. 그랬더니 A4 사이즈가 전지 사이즈가 됐다. 그걸 깊이 판 땅속에 넣고 다시 덮었다.
나름 표시를 하기 위해서 바리케이드를 좀 옮겨서 딱 그 포인트 위로 꽂히게 두었다. 기억이 안 나도 포인트 아래를 다 파보면 언젠가 나올 거다.
“이걸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유식하다고 해야 할지……. 분명 너 겁나게 똑똑한데…….”
승규가 아주 애매모호 아리까리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똑똑하긴 한데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는 것처럼 몸도 고생하네…….”
“안 똑똑한 모양이지. 아무튼 이제 이 세상에 묻은 위치 아는 사람 너하고 나밖에 없으니까, 혹시라도 없어지면 네가 뽀록 낸 건 줄 알고 널 죽일 거야.”
“넌 하나뿐인 친구한테 그럴 수가 있냐?! 너 이 새끼 사랑이야, 우정이야?!”
“사랑이지.”
“와.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너, 너 그 뭐에 씐 것 같다.”
“김승규. 너도 연애할 때마다 우정보다 사랑이라고 한 건 기억도 안 나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제 정신 차렸잖아!”
차여서 차린 정신에 퍽이나 감사하겠다. 나도 ‘채원우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나도 우정으로 바꿀게’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채원우가 없는 세상이라니. 별로 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걔는 외로우니 죽어서도 내가 같이 있어줘야 한다.
이 소리를 들으면 김승규가 나를 정말 어디 끌고 가기라도 할 것 같다. 할머님이 다니신다는 교회에 데려가 엑소시즘이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