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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82화 (8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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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으로 웅크리고 있던 몸을 세워 벽에 머릴 기댔다. 천천히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리니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모를 어린 채원우의 실루엣이 보였다.

‘오늘도 아프냐?’

‘나’의 몸속에 있는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내 기억으로 이 당시 나는 말을 하지 않았었는데……. 날짜도 제대로 기억 못 할 만큼 뭉개진 기억이라 할지라도, 말을 했고 안 했고 정도는 기억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닌가. 하긴. 당시에는 뭔가 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르고 먹었었지.

‘아파요. 엄청 아파요. 어른들이 제 팔다리를 잡고 다른 방향으로 당기는 것 같아요.’

채원우는 하나도 안 아픈 것 같은 말투로 무시무시한 묘사를 했다. 손등으로도 부족해서 팔뚝과 발등에도 링거를 맞았다가 바늘을 빼낸 자국이 있었다. 헌터인데도 저렇게 연하게 피멍이 들 정도면, 매일마다 몇 번씩 찌른단 뜻이었다.

‘이리 와.’

‘나’는 아주 지친 목소리로 손을 까딱였다. 개를 부르는 것처럼 무례한 손동작인데도 채원우는 쪼르르 다가왔다. 컨디션이 좋았는지 그날따라 이목구비가 조금 보였다.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진짜 강아지 대하듯이 손, 하니까 척하고 내 손 위로 올렸다. 손바닥 위로 올라온 손은 어린애치고 제법 컸다. 강아지들은 발이 크면 크게 자란다고 하던데.

사람을 정말 무슨 개처럼 보면서, 나는 아주 조금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입꼬리가 움찔하는 정도라 하더라도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건 이 어린애 앞에 있을 때만이 유일했다.

올라온 손을 감싸 쥐자 내내 예쁜 인형처럼 무표정하던 얼굴이 녹았다. 울먹거리기 직전이었다.

‘왜 우냐?’

나는 좀 못된 형처럼 물었다. 말을 거의 하지 않아서 목소리는 낮았고 소리도 작았다. 하지만 어려도 헌터는 헌터인지 어린 채원우는 다 들었다.

‘안 아파서요. 맨날 엄청 아픈데 형이 이럴 때만 안 아파요.’

‘그럼 웃어야지, 울어?’

‘그러니까요. 이상해요. 원래 전 진짜 잘 안 우는데, 형이 이럴 때면 울고 싶어져요.’

대단한 속도로 안정화를 시키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죽은 파트너와 비교하면 안정화 컨디션은 안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손을 빼려고 하면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잡으려고 했다.

이 정도 안정화를 해주는 사람도 없다고? 의아하면서도 순순히 잡혀줬다. 이유는 별것 아니었다. 어린애가 잡고 싶어서 손가락을 움찔대면서도 정작 잡진 못하고 끝에는 힘을 빼는 게…… 얘는 뭘 달라고 졸라본 적도 없이, 체념부터 배웠구나 싶어서.

‘……고마워요.’

당시에는 나도 체력이 좋지 않던 때라서 오래 가이딩해 줄 수가 없었다. 결국은 내가 먼저 지쳤다. 손을 떨구면 잡고 있던 손을 앞으로 모으며 고맙다고 했다. 다시 그 특유의 인형 같은 무표정이 되어서.

‘별말씀을.’

‘형은…… 여기 싫어하죠?’

‘응.’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그런데 왜 안 떠나요?’

‘넌 돌아갈 집이 있겠지.’

이렇게 어린애가 혼자 헌터청을 오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근데 나는 없어. 그리고 나가는 방법도 모르겠어.’

단어를 자주 잊고 내가 하려던 것도 잊었다. 우울증에 동반되는 증상이라고 했다. 의욕이 떨어지니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욕구도 흐려졌다. 항상 나가고 싶다, 떠나고 싶다고 생각은 해도 방법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어린애 주제에, 채원우가 내 눈을 똑바로 보더니 멋대로 약속을 했다.

‘제가 내보내 줄게요.’

‘어떻게?’

웃겼다.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한껏 비웃을 수 있었지만,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속으로 비아냥이 절로 샘솟긴 했다.

‘제가 어른이 되어서 힘이 좀 생기면요, 그때 형을 내보내 줄게요.’

‘그러세요. 고맙네.’

영혼이라곤 씨알도 없는 말을 하곤 피곤함에 다시 고갤 돌렸다. 조금 짜증이 났던 것 같기도 했다.

어린애들의 순수함도 순수함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여유가 없던 때다. 더는 이런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 대화도 그냥 잊어버리고 싶었다. 어린애 앞에서 내 마음을 까발렸단 사실이 싫어서였다.

‘꼭이요. 그러니까 형, 우리 다시 만나요.’

이미 멍해진 정신 속으로 채원우의 앳된 목소린 그저 스치고 사라졌다.

그리고 오래도록 잊고 있다가

이제야 생각이 났다.

‘채원우……!’

크게 몸을 떨며 눈이 떠졌다. 그사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손으로 거칠게 닦았다. 닿는 바닥이 차가웠다. 옆으로 눕혀져 있던 거다.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 자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라고.”

킬킬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초점이 잘 맞지 않았는데 실루엣을 보니 두 명이었다. 몸을 일으키는데 볼썽사납게 팔이 휘청거렸다. 겨우 일어나 눈을 거칠게 비빈 끝에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차가운 돌벽에 철창이 있었다.

“아니면 야한 꿈 꿨나?”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선 다른 손 검지를 그 동그라미 안으로 왔다 갔다 하는 손가락질에 고갤 돌렸다.

“그쪽은 거시기가 검지만 한가 봐요.”

“뭐, 뭐라고?!”

철창이라니. 감빵이야? 아니지. 감빵은 철창이 아니라 철문이지. 안타깝게도 내 바람과 달리 아이들은 119가 아니라 112를 누른 모양이다. 똑똑한 것들. 이 나라의 미래가 밝구나. 내 현실이랑 달리.

게다가 이제 알았는데 수갑도 차고 있었다. 수갑을 안 찬 저쪽 멍청이들이랑 달랐다. 멍청이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선 씨근덕거렸다.

“너, 너너, 너 이 새끼 지금 내 가랑이 봤어?!”

“아니, 그쪽이 갑자기 일어나서 높이가 딱 그렇게 된 거구만. 여긴 의자가 뭐 이렇게 낮아?”

투덜거리는데 아직 안 일어난 멍청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유를 알 만했다. 내가 낮다고 투덜거리며 다리를 주체 못 하는 동안 저 사람은 등도 벽에 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에 벽을 대면 아마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을 거다.

“앗 죄송. 멕이려던 건 아닌데.”

열받았는지 자기도 일어나고 싶은데 일어나면 정말로 키가 들통 날까 봐 못 일어나는 눈치였다. 그럼 내가 가줘야지.

일어나자마자 핑 돌아서 잠시 멈춰서 기다렸다. 그걸 어떻게 오해한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거시기가 손가락만 한 멍청이가 다가와선 고갤 마구 좌우로 틀며, 미디어에서 그리는 일본 양아치처럼 아앙~? 아앙~?거린다.

“지금 신음 소리 내세요? 듣기 거북하네요. 이건 뭐 음란죄라고 하기에는 너무 더럽고…… 뭐라고 해야 잡혀가나. 아, 지금 우리 이미 잡혀서 필요 없나?”

“너 이 새끼가…… 눈에 보이는 게 없지?!”

왜 시비 거는 사람들의 대사는 다 똑같을까. 멱살이 잡히긴 했는데 키가 고만고만하고 멍청이의 힘이 대단치 않아서 위협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온갖 괴랄한 몬스터들과 싸우다 보면 사람의 폭력은 폭력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사람한테 무서운 건 마음이지.

“여기 난동 피우는데요~”

옆방도 있었는지 옆에서 뭐라뭐라 꼬부라진 발음이 들렸다. 그제야 있는 줄도 몰랐던 경찰이 일어나서 ‘소란 피우지 마세요. 예? 뭐 좋은 일로 오셨다고 난리십니까’ 하고는 다시 주저앉았다.

“여기 구치소예요?”

간수도 아니고 경찰에 허울만 갖춘 철창. 그러면 구치소밖에 없지.

난 어이가 없어서 그저 헛웃음만 뱉었다. 내가 살다 살다 구치소에 다 와본다.

“그럼 여기가 너네 집 안방이겠냐?!”

“아,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세요. 귀 잘 들려요.”

“……너 저기 짭새 믿고 나대는 거지?”

“먼저 시비 건 건 그쪽인데.”

귀찮았다. 다 귀찮고 사실 컨디션도 별로 안 좋았다. 점점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서 목이 눌리는 것도 싫었다.

그 커다란 손을 잡으니 내가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하는지 멍청이가 희열에 차서 웃었다. 이런 사람들 잘 안다. 남이 자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으로 자존감을 채우는 거지, 뭐. 아니면 발기하거나. 근데 하든 안 하든 비슷할 것 같고.

“……아, 아, 으아아악!”

손목을 조금 틀어서 검지와 엄지 사이 공간을 꾸우우우욱 눌러줬다. 소화는 더럽게 잘될 거다. 순식간에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내가 놓아주지 않자 옆으로 몸을 무너뜨리며 엄살에 엄살을 떨어댔다. 옆으로 웅크린 멍청이의 복숭아뼈를 지그시 누르자 엄살이 더 심해졌다.

“뭐야!”

경찰이 벌떡 일어나선 이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소란입니까! 예!? 소란 피우셔서 들여보냈더니만!”

“체했다고 해서 제가 지압 좀 해드렸어요.”

나는 멍청이의 얼굴이 안 보이게 살짝 몸을 틀어 섰다.

“확인 좀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기꺼이 다시 몸을 틀자 혈색이 아주 좋아진 멍청이가 보였다. 평소에도 소화기관이 좋진 않았나 보네.

“……소란 피우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들.”

“그럼요~ 그런데 저 혹시 여기 왜 들어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기억이 안 나서요.”

넉살 좋게 헤헤 웃으며 물으니 경찰이 약간 한심함을 담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술에 취해서 길거리에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 수갑은…… 조회해 보니 가이드로 떠서요. 특수 분류자라서 채워뒀습니다.”

특수 분류자……. 나는 그 단어를 곱씹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경찰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나도 낮은 의자에 다시 앉았다. 엄살이 상당히 심한 멍청이가 몸을 일으켰다. 침을 흘렸는지 입술이 축축했다.

“너 가이드냐?”

“이젠 아니에요. 짤렸거든요.”

멍청이는 어기적어기적 일어나면서 꿍얼댔다. 뭔 사고를 쳤길래 철밥통이 잘리냐며.

철밥통은 헌터고 가이드가 철밥통인 경우는 인질일 경우지. 난 인질이 될 뻔하다가 그 파트너가 차서 철밥통이 못 됐고.

나는 턱을 괴고 금이 간 시멘트 바닥만 물끄러미 봤다.

* * *

채원우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물을 마셨다. 분명 잠들 때는 자신의 침대였던 것 같은데 눈을 뜨니 또 백겸의 방 침대였다.

백겸의 침대에는 그가 두고 간 후드티가 있다. 가장 자주 즐겨 입던 옷인데 두고 갔다. 까먹은 걸까, 날 위해서일까.

원우는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까먹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옳았다.

옷에서는 이제 백겸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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