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그냥.”
“…….”
“그냥 형민이 없는 곳에서 가십 좀 씹는 거라고 생각해라.”
그렇게 말한 승규가 다가와서 대신 남은 재료들을 꺼냈다. 청양고추도 넣을까, 하는 물음에 나는 한참 뒤에야 당연하지, 하고 대답했다.
* * *
일단 형민이의 스케줄이 필요했다. 저번에 봤을 때 현장에 있어서 새 파트너와 매칭되어 금세 적응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임시로 나온 거야. 임시로.”
그렇게 말한 승규는 내 눈치를 살폈다. 아마도 채원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가이딩 확률이 턱없이 낮을 걸 알면서도 내보냈다는, 형민과 원우 둘 모두에게 해당되는 헌터청의 무심함에 치가 떨렸다.
“상태는 괜찮아 보이던데.”
“퇴사 날 받아뒀거든. 퇴사 직전의 광기인 거지.”
그렇게 말한다면 이해가 된다. 나도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퇴사 날을 받아둔 직장인이었다면 형민이처럼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좆 같아도 웃어넘기고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났을 거다.
승규는 연신 내 옆에 둔 자신의 핸드폰을 훔쳐봤다. 틈만 나면 자꾸만 전 애인에게 연락하려 는 꼴을 보다 못해 내가 뺏어둔 거다. 연애를 하면 미치는 게 분명했다. 나는 나한테 묻은 건 생각도 안 하고 겨 묻은 개 승규를 보며 끌끌댔다.
“퇴사해도 협조하기 힘들 거야. 비밀 유지 서약 몰라?”
“아는 새끼가 지금 이렇게 일을 벌이냐?”
나는 자꾸 내가 뭐 묻은 개인지 잊는 게 분명했다.
“만약에 이걸 터뜨린다고 쳐. 너 죽이려고 덤벼들 텐데, 어디로 도망치기라도 하게?”
“영국으로 갈까.”
승규는 동태 눈깔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말하고도 뜨끔했다. 그냥 뭐 묻은 개 해야겠다.
“하와유, 하면 아임 파인 땡큐, 앤뉴? 밖에 못 하는 네가? 그리고 뭐로 가게. 거기서 너 받아준대?”
“경력직 가이드 어때.”
“가서 또 그 짓을 한다고…….”
어쩔 수 없지 않냐……. 내가 그동안 꿈꿔온 그린존에서의 삶이 얼마나 동화적인 멍청함이었는지 깨달았다. 동화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얼버무려 엔딩을 내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린존으로 오면 이 일도 더는 하지 않고 동화처럼 내 삶이 얼버무려질 줄 알았던 거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가이딩밖에 없으면서, 지금까지 해온 것이라곤 그것밖에 없으면서. 아무리 부정해도 내 삶에 남은 건 이제 그쪽 세계밖에 없었으면서 말이다.
“가면 뭐가 다를 것 같냐…….”
“거기 유럽 지역이랑 규정 다르잖아.”
유럽은 동아시아처럼 헌터의 활동을 국가적 차원에서 통제하지 않았다. 헌터 시장을 연 헬리오스가 급격히 추락한 이후 지역별 특성에 따라서 시장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유럽의 경우 중세 독일의 길드식이 발달했다.
국가에 민간 길드가 등록되고 그 길드 안에서 체계적으로 능력자들을 관리하는 식으로 법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영국은 유럽과 다른 길을 가며 헌터 역시 민간의 영역으로 풀어버렸다.
그걸 줄줄이 설명하는 나를 보는 승규의 눈이 감탄으로 반짝였다.
“너 그런 걸 어떻게 아냐…….”
뒷말에는 아마도 같은 중졸 주제에, 가 숨겨져 있을 거다. 나는 대답 대신에 TV를 켰다. 요즘 늘 보는 프로그램이 또 재생 중이었다. 옛날에 하던 ‘세계는 이 순간’ 같은 가벼운 시사 프로그램이었다.
“여기서 엄청 많이 나와. 이젠 할 얘기가 헌터 얘기랑 던전 얘기밖에 없나 봐.”
마침 지금도 던전 난민에 대한 주제로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던전 난민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데요. 반면 내전으로 인한 난민이 줄어들며…….
“야, 똑똑하다. 양백겸.”
―그런데 최근 위성 사진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난민촌의 규모가 점차 작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진을 보시면 확실히 작년보다 올해의…….
“공부를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나는 앞집 할머니가 주신 고구마를 까며 투덜거렸다. 공부도 참 더럽게 안 했었지. 그게 그리워질 줄 몰랐다. 더럽게 불편한 의자와 책상까지.
―……던전으로 향하는 난민의 수가 늘고 있다 합니다. 이는 과연 도시 괴담일까요, 아니면…….
“근데 계속 듣고 있다 보니까 머리 아프다. 끄자.”
“어. 어차피 난 본 거야.”
꺼버리자던 승규는 옆으로 벌렁 누워 채널을 바꾸었다. 틱, 틱 바꾸다가 한 채널에서 멈췄다. 아주 어렸을 적에 이른 아침부터 눈이 번쩍 뜨이게 했던 추억의 만화 프로그램이었다.
“이게 다시 하네?!”
“소재 고갈인가 보지.”
나는 시니컬하게 대꾸하면서도 승규처럼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짜 오랜만에 보는 만큼 삐그덕대는 프레임과 클래식한 색감이 눈에 거슬렸지만, 좋은 의미였다. 추억이 되살아났다. 곧 엄마가 텔레비전에서 3m씩 떨어져 보라고 호통을 칠 것만 같았다.
“이거 볼 때마다 입 벌리고 봐서 할머니가 바보상자라고 했었는데.”
승규가 헤헤 웃었다. 나도 들었던 말이었다. 아마 한 번씩은 다 들어본 말일 걸, 바보상자.
이제 우리는 그 추억에 눈물짓지 않는다. 미미하게 웃으며 고구마를 나눠 먹었다. 추억이라는 게 때론 사람을 거세게 넘어뜨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살아가게 한다.
* * *
승규와 나는 선글라스를 끼고 헌터청에서 10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 기다렸다. 차도 빌렸다. 면허가 있는 사람이 김승규밖에 없어서 운전석에 앉히긴 했는데 걷는 게 훨씬 나을 뻔했다. 이 자식이 왜 그간 차를 안 샀는지 알겠다. 핸들을 안 맡기는 게 세상을 위해 옳은 길이었다.
“씨발. 걱정이다.”
초조함에 껌을 털어먹으며 중얼거렸다. 승규는 오늘따라 화려한 호피무늬 테 선글라스를 끼고 왜? 하고 물어봤다. 잠복하며 형민이를 기다리는 주제에 호피무늬가 뭐냐.
“괜한 귀한 집 아들 데리러 왔다가 황천길로 모셔갈까 봐.”
“너 지금 내 운전 실력 못 믿냐?!”
“별생각 없었는데 경험하니까 못 믿겠다. 너 솔직히 말해. 뇌물 먹이고 면허 땄지?”
“나 필기 100점이야.”
“필기랑 실기랑 뭔 상관이야.”
투닥거리는데 헌터청 문을 열고 형민이가 나오는 게 보였다. 어쩐지 출소하는 감빵 동기를 기다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좀 기묘했다.
나는 의자를 한껏 뒤로 젖혀 밖에서 보이지 않게 누웠고 승규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에이전시 사장으로서 계약이 일찍 파기된 직원을 데리러 왔다는 명목을 들어 기다린 것이다.
“형민아이!”
이상한 추임새를 넣으며 손을 붕붕 흔드는 걸 흘끗 보고 몸을 더욱 뒤로 눕혔다. 머릿속으로는 계획이 하나씩 쌓여가는 중이었다.
승규는 내 생각을 듣고는 미친 짓이라고 했고, 도망가지 않으면 법으로 개 털리거나 무력으로 개 털릴 거라고 했다. 개 털리는 그 순간이 오면 발을 빼기 위해서라도, 승규는 형민이와 나를 이 차에서 만나 아무것도 아닌 장소에 떨어뜨리는 정도의 일만 하기로 했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형민이의 작은아버지 이야기를 해준 것만으로도 승규가 엄청난 위험을 무릅썼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계획은 느슨하게 짰다. 분 단위가 아니라 기승전결만 적힌 러프한 시놉시스 같았다. 그 이유는 당연히, 매 단계의 불확실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
승규가 물었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었다. 누가 물어도 같은 답일 거다. 채원우를 사랑한다는 건 당연한 전제라 넘어가더라도…….
“백겸이 형?”
“형민이 안녕.”
몸을 세우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의아한 표정이던 형민은 늘 그랬듯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처음에는 참 꽃밭인 애가 있구나 했는데 꽃밭이 나쁜 건 아니었다.
박형민은 채원우와 다른 의미로, 보고 있으면 다른 문제에 신경 쓰이지 않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채원우는 꽃밭이 아니라 허허벌판, 황무지, 볼모지인데도 영영 거기서 살고 싶다는 점이 다르긴 하다.
“저 데리러 오신 거예요?”
저번에 봤을 때와 달리 형민이는 평범한 옷을 입고 얼굴도 깨끗했다. 하지만 분명 전보다 야위었다. 눈 밑도 거뭇했다. 각질이 일어난 입술에는 이미 몇 번이고 물어뜯다 상처가 난 자국이 있었다.
저 모든 흉터들이 낯이 익었다. 나에게도 있던 상처들이니까.
“형민아.”
나는 핸드폰을 두드려 적당한 식당을 찾았다. 형민이 작은아버지가 계신다는 언론사 근처이면서, 유동 인구가 많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형이 퇴사 턱 쏠까?”
형민이는 나의 기승전결 작전에서 징검다리가 되어줄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형민이의 역할은 다리에 불과하고, 아는 내용 역시 없어야 한다. 다칠 사람은 나 혼자로도 충분했다.
* * *
“이건 제가 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형민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꽤 비싼 곳이지만 금전 사정이 본의 아니게 아주 넉넉해진 터라 이 정도는 문제없었다. 게다가 본의 아니게 목가적 삶을 즐기는 중이라 나도 가끔은 이런 자극적인 외식을 즐겨줘야 했다.
테이블을 꽉 채운 멕시칸 요리에 형민이가 손뼉을 뻑뻑 쳤다. 보기보다 손이 크고 두꺼웠다.
“많이 먹어.”
이모티콘으로 표현하면 ^^ 이모티콘 자체일 웃음을 지으며 권했다. 형민이는 거절하지 않고 먹었다.
“헌터청도 식사가 잘 나오기는 하는데 급식은 급식이라서 그런지 질리더라구요. 규칙성이 보여가지고.”
“너도 그랬는데 난 어땠겠니.”
음료수부터 빨며 중얼거렸다. 진짜 몇 년을 헌터청에서 일하다 보면 어떤 요일에는 뭐가 나오는지 정도도 꿰게 된다.
“그래서 완전히 이 일 접는 거야?”
나는 역시 살갑고 다정한 성격은 못 되는 모양이다. 무심하게 묻고 말았다. 미안했다. 하지만 내 코가 석 자라서, 아무리 러프하게 짠 계획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조급했다.
이 모든 시간의 중심에는 채원우가 있다. 던전 부속물로 만든 기구까지 몸에 부착할 정도면 상태가 안 좋은 거다. 헌터청은 그 귀한 인재를 왜 그렇게 굴리기 시작한 거지? 의문은 쌓이기만 했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