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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77화 (7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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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앞에서 다 사라진 뒤에야 깍지를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지금 하는 게 낫지. 던전 터지기 전에 첫사랑을 했어봐. 평생 잊지 못했을걸.”

승규는 첫사랑이라는 말에 토하는 시늉을 하다가 갑자기 점잖은 체를 했다.

“채원우가 전사하기라도 하면 아주 열녀비를 세우겠다.”

“열남비겠지. 그리고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나는 고갤 떨구었다. 고작 한마디 가정인데도 손이 떨렸다. 떨어지고 난 뒤에야 깨닫는다. 네가 나한테 이렇게 큰 존재였다는 걸.

* * *

레드존의 유일한……은 아니고 여러 소소한 단점 중 하나는, 안쪽까지 버스나 택시가 다니지 않는다는 점이다. 덕분에 레드존 안의 사람들은 여유로운 목가적 생활을 즐길 수 있는데……는 아니고, 좀 귀찮긴 하다.

승규 할머님이 저녁 먹고 가라, 저녁을 먹었으니 후식을 먹어라, 후식을 먹은 김에 드라마도 같이 보고 가자 하시는 바람에 늦은 밤이 되었다.

밤이 되니 춥기는 추워서 어깰 웅크리고 걸었다. 날이 어둡다고 무서울 리 없다. 사실 갑자기 던전이 터지는 것 말고는 무서운 일이 없었다. 갑자기 괴한이 나타나도 민간인인 이상 내가 이길 테고. 민간인 괴한의 힘은 여성 가이드보다 한참 아래니까.

혹여나 미등록 능력자나 도망자 헌터라 하더라도 나쁜 짓은 안 저지를 거다. 능력자가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처벌은 더 엄격하게 진행되니까.

혹여라도 술에 의한 심신 미약? 그런 거 없다. 아직도 주취 감형이나 창창한 미래의 가능성 같은 개소리 판결을 내리는 시대인데도 능력자, 특히 헌터들에게만은 그 자비로움이 통하지 않는다. 법원 앞의 정의의 여신이 괜히 안대를 안 쓴 게 아니었다.

집까지 돌아가는 길에 동네 개 몇 마리를 만나서 노닥거리느라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할머니가 챙겨주신 옛날식 찐빵과 고구마 냄새도 점점 줄어드는 게 식은 모양이었다. 두었다가 내일 먹어야지, 하며 마당에 들어서는데 왠지 싸한 기분이 들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천천히 걸었다. 한껏 긴장한 채로 현관문까지 갔다. 도어락을 달지 않아서 열쇠로 여는데 잠금이 풀리는 그 잠깐 사이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문이 열리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당기는 힘이 무력하게 문이 활짝 열렸다.

“누구……. 윽!”

안으로 퍽 밀리고 말 그대로 괴한이 현관 안으로 같이 들어왔다. 균형을 잡는 동안 괴한은 나 대신 친절하게 문단속을 해줬다. 현관 등이 깜빡거리며 켜졌다. LED 전구가 아니었던 탓에 필라멘트가 부실해져 수명을 다해 가는 전구였다.

조명 아래 모자를 쓴 채원우가 서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고갤 제대로 들지도 않지만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당연했다. 지금의 채원우는 내가 얘를 처음 만났던―처음이라고 생각했던― 계단에서의 모습이었다.

입술이 터져 있었다. 씻고 바로 온 건지 바디워시 향기가 났다. 귀에 단 피어싱이 부산스럽게 깜빡이는 전등빛 아래에서 특이한 빛을 냈다.

“집 좋네요.”

채원우 특유의 어딘가 몽롱한 목소리였다. 반가워서 입술이 절로 벌어질 지경이었다.

“좋은데 왜 자꾸 위험한 곳만 와요. 여기서 지내지.”

“채원우.”

“그린존이 아니라 레드존에 사는 이유는 뭐예요? 형 꿈은 그린존에서 사는 거 아니었어요?”

“오늘 던전이 터진 곳은 레드존이었어서 터졌나? 안전한 곳이 어디 있어. 내가 살고 싶은 곳만 남았지, 그럼.”

“현장에 나타나지 마요.”

“우리 지금 같은 대화 하고 있는 거 맞아?”

“헌터청 눈에 띄어서 뭐가 좋다고 자꾸 알짱거려요. 나갔으면 신경 끄고 형 인생 살아요.”

그사이 많이 자랐네, 채원우. 사람 상처 주는 말도 하고.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한 말도 들어봤다. 채원우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정 떨어뜨리려고 해도 살면서 들어온 말보다 심한 말은 못 할 거다. 그러니까 애초에 상처를 주겠다는 게 성립이 안 되지. 아프게 하려면 세게 때려야 하는데, 채원우나 나나 세게 때릴 수 있을 리 없잖아.

“내 인생 살까?”

“네.”

“그래. 네 말대로 내 인생 살게. 나는 가이드니까 새로운 헌터를 만나면 되는 건가? 그래, 채원우?”

“…….”

나는 특이한 빛을 내는 피어싱에 눈길을 줬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약이 잘 안 들어?”

“…….”

“지금 한 피어싱, 던전 부속물로 만든 거잖아.”

가이딩 약물에 내성이 생긴 모양이다. 내성도 어지간한 내성이 아니라서, 몸에 상처를 내고 부착해야 진정시킬 수 있는 지경이 된 모양이다.

나는 채원우에게 손을 뻗었다. 손끝이 손등에 닿자 채원우는 불에 덴 듯 내 손을 쳐냈다. 그러고는 구석으로 물러났다. 당연히 나는 더 다가섰다.

“왜? 싫어?”

채원우의 손이 떨린다. 나는 채원우가 감싸 쥔 두 손을 아예 통째로 잡았다. 통째로 감싸고 입술로 가져왔다. 찬바람 때문에 건조한 입술을 찍어 누르니 채원우가 애끓는 신음을 흘렸다. 입술 아래서 채원우의 심장이 펄떡거리며 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 마요.”

“그럼 네 발로 여길 기어들어 오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아주 나쁜 새끼가 된 기분이다. 채원우를 궁지에 몰고 희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가벼운 말투와 달리 온 정신을 집중해 채원우의 독소를 빼는 중이었다.

나 역시 가슴이 아프도록 심장이 뛰었다. 겨우 손만 잡았는데도, 과도한 능력 사용으로 인해 쌓인 끝에 본인의 몸을 공격하게 된 채원우의 능력이 내 몸으로 흘러들어 왔다.

“정말로 싫은 거면 밀어내고.”

“으……윽.”

이를 갈던 채원우가 날 밀쳐냈다. 옆으로 밀려나 신발장에 등이 쿵 부딪쳤다. 하지만 아프기는커녕 간지럽지도 않았다. 여전히 채원우의 손은 내게 잡혀 있다. 나는 신발장에 등을 댄 채 허벅지를 채원우의 다리 사이에 밀어 넣었다.

“진심으로 공격해야지. 이거로 되겠습니까, 채원우 헌터?”

“내가 진심으로 하면…….”

“그래. 내가 다치겠지. 하지만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원하는 걸 어떻게 얻어?”

나는 아예 혀를 빼 채원우의 손가락 마디를 핥았다. 채원우의 손을 들고 고갤 꺾어 손목의 부드러운 살도 빨아줬다. 순식간에 열이 오를 정도였다. 그간 어떻게 버티고 있었던 거지. 희롱하는 몸짓과 달리 내 속이 무너졌다.

“이미 나 때문에 한 번 죽어놓고 무섭지도 않아요?”

위협이라도 하려는 건지 채원우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내가 또 한 번 당신 죽이면, 그제야 피할 거냐고.”

“그땐 어쩔 수 없이 피하게 되겠지. 아, 이제 더는 기회가 없지 않나.”

채원우의 손을 당겨 내 목에 갖다 댔다. 절로 벌어졌던 손이 목을 감쌌다. 맞닿은 손바닥과 목덜미에서 박동이 은은하게 퍼졌다. 내가 쥐고 있는 채원우의 손목에서 느껴지는 맥도 점점 빨라졌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단 사실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씨발, 얘 때문에 내가 변태가 다 되어간다.

“근데 난 네가 나 살린 기억밖에 안 나.”

채원우의 고개가 기울며 내려왔다. 키스할 것 같았다. 바라던 바였다.

밀도 높은 침묵에 서로의 심장이 뛰는 소리도 들릴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였다. 채원우는 내 맥박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는 걸 알았고, 지금까진 장난이었던 것처럼 거세게 손을 뿌리쳤다.

“아.”

목이 살짝 긁혔다. 아프지도 않은데 고작 그 소리에 채원우가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난 채원우의 주변으로 작은 물들이 떠다녔다. 언제 연 것인지 채원우의 손에 작은 페트병이 보였다.

“좋아요. 형이 날 안 무서워할 수 있죠.”

이렇게 차갑고 싸가지 없는 채원우는 처음이다. 나는 태연하게 고갤 까딱였다. 채원우의 주변을 행성처럼 떠다니던 물방울이 점점 종유석처럼 끝이 뾰족하게 길어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채원우의 무기였다.

“근데 난 무섭거든. 내가 형 죽일까 봐.”

점점 더 길어지며 뾰족해지는 끝이 나를 향했다. 얇아지고 얇아지다 못해 아래로 뚝뚝 방울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너는 나 없이 살 수 있어?”

조금 전 채원우가 내 물음에 관련 없는 대답을 할 때처럼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채원우가 페트병을 들었다. 그 안으로 물이 다시 들어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못 그러니까 이러는 거죠.”

모자 먼저 벗길 걸. 얼굴이 궁금한데 도통 보이지가 않는다. 위에서 우리의 움직임에 따라 내내 깜빡이던 전구가 드디어 팍 소리를 내며 꺼졌다. 필라멘트가 그대로 탄 거다.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요.”

건조한 목소리다. 말 내용보다 저 목소리가 좀 상처가 되었다.

“안 보는 게 서로한테 좋은 일이에요. 더는 헌터청과 엮이지도 말고. 그럴 필요 없게 내가 돈도 줬잖아요.”

“이야, 몸이라도 판 기분이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낫다면 그렇게 생각하고요.”

기가 찼다. 채원우는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 한참 뒤에야 손을 내려다봤다.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오면서도 큰 정신적 충격 없이 잘 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부상 정도일 때나 해당되는 거지 설명하기도 어려운 죽음일 때는 다른 모양이다.

나보다 더 예민한 감각을 지닌 채원우가 이 손을 느꼈을 리가 없다.

상처를 받은 건 나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틀렸다. 아무래도 상처는 채원우가 받은 것 같다.

“……찐빵이라도 줄 걸.”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이미 한참 늦은 소리나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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