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승규를 따돌리지 않고 같이 온 건 결국 잘한 일이었다. 길에 군인들이 있었고 헌터청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저마다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지만 그중 하나라도 날 알아보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었다.
승규를 바깥쪽으로 세우고 걷다가 던전이 적당히 보이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던전이 옆에서 터졌다고 해도 범위 안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일단 장사는 하는 게 K-자영업이었다.
온장고에서 커피 두 병을 꺼내 승규에게 하나 줬다. 마침 던전이 더 커지진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편의점 사장님이 다시 파라솔 테이블을 펼치고 있었다.
“도와드릴게요.”
싱긋 웃자 사장님이 고맙다며 화답했다. 의자를 두고 냉큼 자리에 앉았다. 승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에게 혀를 찼다.
“너 날 이용하려고 데리고 나왔냐?”
“말은 바로 하자. 내가 널 데리고 나왔냐, 네가 따라 나왔냐.”
나는 던전 입구를 등진 채로 커피를 마셨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뒤쪽 분위기를 살폈다. 시간이 지나고 비도 멈췄으니 잠시 상황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이거 없어지는 거 맞죠?!”
지나가는 헌터청 직원이 그들에게 잡혀 쩔쩔매고 있었다.
“이거 최대한 빨리 없어져야 해요. 그리고 재발 방지 대책은 있습니까? 여기가 얼마나 유서 깊은 그린존인데! 올해 기념행사도 준비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집값은 어떡해요! 나라에서 보상금 내주는 거죠? 저 여기 들어오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미치겠다. 집값 떨어지겠네.”
“재발 방지 위원회라도 결성합시다!”
목소리가 큰 아저씨 하나가 결의에 차서 주먹을 허공으로 내지르며 외쳤다. 재발 방지 위원회를 만든다고 던전이라는 재난이 알아서 잘 피해 가나.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유서 깊다니……. 유서 깊은 거로 안전도가 높아진다면 신라가 왜 망하고 조선이 왜 망했겠어.
“어? 야, 야. 형민이다.”
승규가 고갤 바짝 숙이고 속삭였다. 몰래 속삭이는 것까진 좋았다. 거기까지만 했다면 완벽했을 거다. 그런데 승규는 나에게 몰래 말하고 형민이에겐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그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자식은 한 번에 한가지 생각만 하는 놈인 게 분명했다. 내가 헌터청 사람들과 만나면 안 된다는 걸 잊은 게 분명했다. 나는 모자를 눌러 쓰고 모르는 척 시침을 뗐다.
“사장님!”
형민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슬쩍 어깨 너머로 돌아봤다. 그리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저, 저게 뭐야!”
“으악!”
나만 느낀 게 아닌지 사람들이 소용없을 대책을 쑥덕대다가 비명을 질렀다.
몬스터의 피는 색이 가지각색으로 다르고, 붉은 피가 가장 적었다. 나 역시 붉은 피를 본 게 손에 꼽는다. 그런데 막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공략팀과 전투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새빨간 피를 뒤집어쓴 게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짝이었다.
“야, 아이고. 걍 다시 가라.”
“왜 그러세요~ 정 없게.”
“너는 참…… 애가 밝다. 밝아. 응. 좋아……. 너는 근데 파트너도 없이 여긴 왜 왔……. 악!”
기절할 정도로 무심한 승규의 질문에 나는 그의 정강이를 후려 찼다. 파트너를 눈앞에서 잃은 애한테 대체 무슨 소리야, 미친 새끼야!
“봉사로 나왔어요. 저한테요, 특출나게 우수한 가이딩을 하진 않지만, 전방위로 무난하게 안정시킬 수 있는 가이드랬어요.”
그거 너 잡으려고 내민 당근이다. 나는 형민이가 그 당근에 홀랑 넘어가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계속 앉아 있으면 자꾸 헛생각만 들어서요…….”
“그래……. 방에만 처박혀 있는 것보다 나오는 게 낫지.”
승규는 포기하고 중얼거렸다. 말끝에 나를 흘끗 보는 게 왠지 나를 꼽 주는 것 같다. 어이없네, 난 밖에도 잘 나오거든?
형민이는 사람들의 경악 어린 시선은 모른 채 태연하게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했다. 나는 채원우를 확인하고 싶어 자꾸만 돌아가려는 목을 고정한 채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다.”
“헉, 형! ……저 형이랑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응. 잘하고 있네.”
그래도 갈 생각은 없는지 정 많고 눈치 없고 말 많은 형민이 우물쭈물하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혀, 형…….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 저는 잘 지냈거든요.”
내가 헤어진 게 채원우가 아니라 너였기라도 했니. 왜 이렇게 떨고 말을 더듬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형민이의 태도를 이해했다. 연신 뒤쪽으로 시선을 굴리는 게, 저쪽에 채원우가 있구나 싶었다.
“넌 잘 지내? 너도 얼른 나처럼 한탕 벌고 떠야지.”
“으음. 그, 맞는데요. 그게요.”
“파트너하고도 잘 지내고. 차인 나랑 다르게.”
“아니, 그, 형은 잘 지내시는 것 같은데, 저기 그, 형의 파트너는…….”
다행히도 형민이는 나의 유도 신문에 슬슬 따라와 줬다.
“내 전 파트너는 요즘 핫한 모양이더라고. 여기저기 안 뛰는 곳이 없다며.”
“헉, 어떻게 아셨어요? 요즘 혼자 나가는 던전도 있고요. 완전 영웅이에요. 점점 언론사에서도 알아채서 곧 헌터청 대표 헌터가 될 거 같아요. 전에도 그랬지만요, 그래도 아는 사람만 알았잖아요.”
그랬구나. 요즘 원우는 혼자서 뺑이도 도는구나. 하도 쳐 굴려서 언론사에서도 눈치를 깠구나. 그랬구나.
“근데 잘 지내는지는 모르겠어요. 저희도 말 잘 안 걸거든요. 가끔 봐도 되게 예민해 보이고…….”
“박형민!”
아주 약간 살살 굴려줬을 뿐인데 술술 터지려는 이야기보따리를 막은 건 아마도 형민만큼이나 눈치가 없는 형민의 팀장이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박형민을 부르더니 우하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형민아! 짬뽕 먹으러 가자!”
“네! 형!”
“……사이 좋네.”
“네. 동생분이 저랑 나이가 똑같대요. 이거 해서 유학 보내셨다고 하더라구요! ……저 전 파트너 형이랑 성격도 비슷해서 제가 많이 좋아해요.”
음. 승규와 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아주 뻘쭘해졌다.
“저희 짬뽕 먹으러 가려는데 같이 가실래요?”
“형민아.”
“네!”
“되겠니?”
승규도 형민의 티 없이 깨끗한 머리에 감명을 받았는지 혀를 끌끌 찼다. 그래, 뭐 일만 잘하면 되지. 내면에서 타협을 봤는지 다시 싱긋 웃는 가증스러운 고용주가 되었지만.
“그렇구나……. 아쉽다.”
진짜로 아쉬운 모양이다. 애는 참 착하다. 애는 착한데…….
형민이 갑자기 승규를 향해 고갤 돌렸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나름 진중한 표정을 하고는 속닥거렸다. 안타깝게도 나는 청력이 좋아서 다 들렸다.
“사장님 여기 사시죠……? 얼른 팔고 이사 가세요. 공표는 늦게 할 건데 여기도 시청역처럼 완전 공략이 안 될 것 같아요……. 저희도 일부 공략만 하고 나온 거예요…….”
슬쩍 고개를 돌려 던전 방향을 바라봤다. 벙거지가 가린 아래로 게슴츠레 노려보니 아주 미세하게 경화되기 시작한 결계가 보였다. 저게 딱딱하게 모두 굳으면 시청역에 생긴 알처럼 견고한 벽이 될 거다.
이미 거의 비운 커피 병을 씹었다. 갑자기 광대 부근이 간지러워서 긁적이며 조금 더 고갤 돌렸다. 목이 조금 뻐근할 정도로.
우뚝 선 장신의 헌터가 보였다. 얼굴을 가렸지만 목에 고글을 걸고 있었다. 검은색 옷을 입어서 티가 나지 않을 뿐, 실상은 온몸이 피로 흠뻑 젖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충 닦아낸 얼굴과 목에도 얼룩이 남았다.
채원우였다.
“형민아.”
나는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형민을 불렀다.
“네, 형.”
“던전 안에 비 안 내렸냐?”
“안 내렸는데요?”
“그렇구나. 안 내렸구나.”
그런데도 너는 우산이 필요했다. 모여 있는 인원 중에서도 눈에 띄게 꼴이 엉망인 걸 보니 적어도 저 핏물을 나눠 뒤집어쓸 사람 한 명은 더 필요했다.
“그럼 정말로 가볼게요.”
형민은 허둥지둥 파트너에게 돌아갔다. 돌아간다. 그 말이 부럽게 느껴졌다.
형민이 멀어진 뒤에야 승규가 혀를 끌끌 찼다.
“뚫어지겠다, 뚫어지겠어.”
“쟨 내가 아는 헌터 중에 제일 강해. 고작 눈빛 정도에 뚫어진다면 퇴사해야지.”
“그걸 바라는 거 같은데. 헌터청을 나오길 바라는 거 아냐?”
“…….”
“그리고 그렇게 강한 헌터를 정말 눈빛으로 뚫어버릴 것처럼 보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눈치는 팔아서 짭 안경 사는 데 쓴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네가 워낙 평소랑 다르게 구는데 모를 수가 있냐.”
승규 역시 바닥을 보인 병을 털며 혓바닥을 내밀었다. 남은 몇 방울까지 알뜰살뜰하게 마시고는 고갤 저었다.
“쟤 보려고 변장해서 여기까지 나오다니, 너 스토커 같아.”
“내가 그렇게 역겨운 짓을 한다고?”
“그럼 뭐냐? 쫓아 나와서 몰래 훔쳐보는 게 또 뭔데.”
“……반박할 수가 없네.”
“내 친구가 이딴 찌질한 짓을 할 줄 몰랐다.”
“나도 몰랐어. 내가 연애사에서 이렇게 등신같이 굴 줄.”
“그러니까 내가 진작 연애 좀 하라 그랬잖아.”
인기는 많았다. 고백도 꽤 많이 받았다. 승규는 내게 왜 한 번도, 그 누구도 사귀지 않냐고 물었다. 당연했다. 상대의 마음만큼 내가 좋아할 수 없었으니까. 기울어진 저울은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 해볼 걸 그랬나. 연애라도 닳도록 해볼 걸. 이상한 일이나 계속하다가 제대로 된 감정에 맞닥뜨리니 얼뜨기가 따로 없다.
채원우가 수송차에 올라타서 모습을 완전히 감출 때까지 목을 빼고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