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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75화 (7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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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이쪽으로 마구 달렸다. 헌터도 없고 던전 결계를 관리할 사람도 없었다. 여기서는 나도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힘이 센 민간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 역시 몸을 돌려 달리려는데 하필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승규의 할머님이었다.

“할머니!”

교회를 다녀오시는 길인지 성경책 가방을 품에 안고 계셨다. 승규가 태어났을 때 승규 어머님이 쓰셨다던 기저귀 가방이었다. 그걸 만든 분이 할머니였다. 헷갈릴 일이 없었다.

“배, 백겸아!”

나를 알아보신 할머니께서 손을 뻗었다. 노인이었다. 아무리 달린다 하시더라도 느린 게 당연했다. 나는 당장 할머니 쪽으로 달렸다. 정강이가 당길 정도로.

겨우 가까워졌을 때 던전은 3미터 거리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범위가 어디까지 퍼질지 모르겠다. 나는 할머니를 거의 들다시피 해서 달렸다. 속도는 느려도 할머니 혼자 달리실 때보다는 나았다. 이마에 핏대가 서도록, 목에서 피 맛이 나도록 절박했다.

사람들은 달리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할머니가 몇 번이나 통독했다는 성경 속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랬는데 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뒤를 돌아보았다가 저승에서 겨우 데려온 아내를 다시 잃게 된 사람에 관한 신화도 있다. 왜 자꾸 돌아볼까.

“백겸아, 아가. 아이고, 백겸아. 멈췄다, 저 망할 것이 멈췄어!”

할머니는 던전 경험자였다. 믿을 수 있는 말이었다. 돌아보니 정말로 확장되던 자기장 벽이 전진을 멈춘 상태였다. 안쪽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를 내려드리니 걸쭉한 욕을 하며 바닥에 떨어진 돌을 마구 던졌다. 뉴스에서 아무리 저게 무엇인지 설명하고 학계에서 정의를 내려도, 할머니에게는 자식을 삼킨 망할 사탄으로밖엔 안 보일 거다.

“아이고, 하나님. 아이고. 아이고!”

돌을 던지고 아시는 모든 욕을 하고 나서야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셨다. 나도 기운이 쫙 빠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겨울인데 땀이 났다. 외투를 벗어 할머니 어깨에 걸쳐 드렸다.

“백겸아.”

고갤 떨구고 숨을 고르는데 손이 덥석 잡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할머니가 내 손을 몇 번이고 쓸었다.

“늙으니 눈물도 잘 나지 않는다. 근데도 너 보니 눈물이 나는구나. 네가 날 살렸어. 우리 착한 백겸이……. 어쩜 네가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을꼬…….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할 일이다…….”

“승규랑 싸워서…… 화해하러 온 거예요. 그러니까 할머니 손자가 절 그 자리에 있게 한 거예요.”

“착한 백겸이. 그렇게 네 공 남한테 다 돌리면 넌 무슨 건덕지로 살겠니. 아이고, 살았다. 할미가 네 덕에 살았다.”

나는 할머니의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나 맞잡은 내 손 역시 떨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헬기와 군용 수송차 소리가 들렸다. 분명 일반 승용차와 다른 묵직하고 거친 바퀴 소리였다. 그린존이라 그런지 출동이 빠르긴 빠르네.

“할머니!”

승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도 들었는지 ‘아이고, 내 손주. 내 강아지’ 하며 일어나시려 애를 썼다. 다리가 풀려 잘 일어나지 못하시는 걸 부축했다. 달려오던 승규는 내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승규야!”

할머니의 부름에 정말 똥강아지처럼 왔지만.

“할머니, 다행이야! 다행이야. 나 진짜 할머니까지 없었으면……. 할매.”

승규는 할머니를 부둥켜안고 새빨개진 눈에 힘을 줬다. 울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지만 곧 울게 될 거다. 할머니를 안은 채 나를 보고는 눈을 껌뻑였다. 봐, 울 거라고 했잖아.

“고맙다.”

코를 훌쩍이며 하는 말에 진심이 절절했다.

“네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고마워.”

“너랑 화해하러 온 건데, 할머니가 대신 화해시켜 주겠다. 안 그래요, 할머니?”

“당연하지! 내 은인인데. 너 은인한테 배은망덕하게 구는 거 아니다.”

애써 사 온 뇌물은 떨어져서 깨졌지만 그보다 더한 걸 얻었다. 할머니 덕에 어색할 짬도 없이 승규와 화해하게 됐다. 이런 상황이니 김승규도 이제 나한테 뭐라고 말 못 할 거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갤 돌렸다. 손주와 조모의 감동적인 상봉 장면이 좋고 다행이긴 한데, 평생 메워지지 않을 허함이 있어서. 아무도 구해주지 못한 내 가족이라든가, 저기 있는 채원…… 채원우?

우리를 스쳐 지나가 멈췄던 수송차 근처에 채원우가 있었다. 낯익고 아니고를 떠나서 애초에 헷갈릴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담배 연기를 뱉고 있는 건 분명 채원우가 맞았다. 살이 조금 내리고, 못 보던 피어싱을 귀에 하고 있는데도 확신할 수 있었다.

손가락이 보이는 가죽장갑을 끼고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채원우의 시선이 묘하게 멍했다. 입술은 거칠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스친다 하더라도 절대 그냥 지나갈 리 없으리라고 믿었다. 채원우와 내가 서로를 못 알아보고 지나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랬는데. ……채원우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끝까지 태운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넣은 채원우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패치를 꺼내 혀 밑에 넣었다.

지금까지 본 가이딩 대체 약물은 캡슐형이었는데. 패치형은 처음 봤다. 그것도 녹여서 먹는 거라고……?

‘약물 문제가 있대.’

김승규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발을 내디뎠다. 더 나아갈 수 없는 건 손목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가지 마.”

승규가 고갤 저으며 나를 말리고 있었다. 이쪽과 채원우가 있는 쪽을 번갈아 봤다. 채원우는 고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쪽을 봤다.

……눈이 마주쳤는데.

“가지 마. 너 계약한 거 있잖아. 사인했잖아.”

그렇게 절박하게 말리지 않아도 나는 가지 않았을 거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그냥 고갤 돌린 채원우 때문에.

혹시라도 나를 다시 돌아보지 않을까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채원우는 억지로 벌린 던전 출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남들은 다 페어로 들어가는데 채원우는 혼자였다. 그런 애를 맨 앞에 세우고 있었다.

뒤에서 승규가 나를 당겼다. 종이인형처럼 훅 물러났다. 간발의 차이로 내 앞으로 트럭이 지나갔다. 트럭이 지나간 뒤로 삽시간에 먹구름이 끼더니 곧 비가 내릴 기세가 되었다.

어차피 던전 안은 밖의 날씨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래도 바깥 날씨와 일치할 때도 종종 있는 만큼 나는 채원우가 우산을 갖고 있는지를 걱정했다. 그 애가 지금 비를 맞고 있을지 걱정했다. 비를 맞더라도 감기조차 걸리지 않을 채원우를…….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 * *

소나기가 생각보다 오래 내렸다. 승규의 집으로 온 뒤로 할머님이 계신데도 나는 계속 바깥만 보고 있었다. 할머님은 한참 감사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더니 몸이 고단하시다며 안으로 들어가셨다. 거실에 남은 건 승규와 나, 그리고 식은 국화차 세 잔뿐이었다.

“민간인이 되어서 던전을 보니 기분이 어때?”

“……생각보다 작다 싶네.”

“그게 다야?”

“그럼 뭐가 더 있겠어.”

정말로 그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작았다. 지금껏 들어갈 문만 바라봤지 이게 얼마나 주변을 잡아먹었는지, 그런 건 따지지 않았다. 어차피 던전은 공략하면 사라질 테고 바깥과 안은 환경이 분명히 달라지니까.

그게 공간 규모에도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는지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단 게 더 맞겠다.

“이런 말 하면 돌 맞을지도 모르는데, 던전은 생각보다 효율적인 시스템 같아.”

“뭐? 미쳤냐, 너?”

“난 들어가 봐서 알잖아.”

식은 국화차를 마시면서 아예 창문에 등을 기댔다. 바깥에는 이제는 번개까지 치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면 되게 넓거든. 마지막에 들어갔던 던전은 계절도 다르더라. 쥬라기 공원에 들어간 관광객 기분이 딱 이렇겠다 싶을 정도로. 피해만 안 준다면 출입해도 좋을 것 같더라고. 실질적으로는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데 안에 들어가면 넓은 천연 생태 공원. 어때?”

“어떻긴 씨발, 공룡 나오는 영화 스토리대로 될 것 같지. 티라노 나오고 막, 익룡 날라 다니고. 사람들 죽고.”

“맞긴 하네.”

실제로 익룡형 몬스터를 본 사람으로 더 말꼬리를 잡을 순 없었다. 여기서 흥분해서 던전의 잠재적 개발 가능성이라든지 던전 옹호론 따위를 펼치면 그냥 강 팀장처럼 던전에 미친 오타쿠처럼 보일 거다. 흥분한단 부분에서부터 딱이다.

“이제 여기도 끝이구나.”

한참의 침묵 끝에 승규가 중얼거렸다. 뒤늦게 그 말을 이해했다. 승규는 레드존 역시 사람 사는 곳이고, 그곳이 소문처럼 끔찍하진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 집에서 자고 갔겠지.

하지만 부양해야 할 가족이, 그것도 노인일 경우에는 말이 달랐다. 오늘처럼 할머님이 계신 영역 내에서 던전이 터졌을 때, 마침 또 내가 있던 요행을 바랄 수도 없었다. 기적보다는 자주 일어난다지만, 일상은 아닌 게 요행이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가장 최근에 선정된 그린존으로 가.”

“가장 최근에? 요즘 그린존 선정, 15년이 아니라 5년 이내에 던전 발생 기록 없음으로 기준이 낮아진 건 알고 있지?”

“그게 나을지도 몰라. 던전도 이제는 안 터져 본 곳에 터지고 싶어 하는 거면 어쩌려고.”

“넌 저게 무슨 자아라도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 정도로 미친 소리는 아니고. 그냥 전 경력자로 충고지, 충고.”

말투는 뾰족했지만 승규의 손과 눈은 바빠졌다. 매물을 찾고 있는 걸 테다.

나는 창밖을 보고 있다가 서서히 빗방울이 멎는 걸 보고 벌떡 일어났다.

“모자 좀 빌려도 돼?”

“어어. 있지. 왜?”

말로는 왜냐고 물으면서 승규는 착하게도 순순히 모자를 내놓았다. 나는 호피 무늬의 털벙거지를 보고 조금 난색을 표했다가 그걸 푹 뒤집어썼다. 김승규와 나는 오래된 친구지만 그게 취향도 같다는 말은 아니었다.

“야. 나 나갔다 온다.”

“어? 어?! 어디 가, 임마!”

뒤에서 승규가 블루종을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허겁지겁 따라오는 걸 두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도 없어서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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