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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74화 (7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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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팀장이 내게 기한이 정해진 접근 권한을 주었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모두 프린트해서 서류화했다. 그때는 헌터청과 이렇게 틀어지게 될 줄 전혀 몰랐는데도 홀린 듯이 해버린 거다. 평소라면 내 안위가 가장 중요해서 이딴 도박은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채원우를 만난 이후로 내가 언제 나처럼 군 적이 있었나? ……어쩌면 이게 진짜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봤다. 꼼꼼히 읽고 다시 상자에 넣고 잠그는 일련의 작업을 했다. 부엌 배기구관 뒤쪽에 열쇠를 숨긴 뒤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승규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시 주목도가 가장 높은 메이저 신문사들을 추렸다. 그 안에서 던전 관련 기사를 자주 뽑는 기자를, 그 기자들 중에서도 헌터청에 대해 삐딱한 스탠스를 취한 사람들을 추렸다.

세 명. 고작 세 명이 남았다.

‘내가 지금 무슨 미친 짓을 하려는 거지?’

긴장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벌써 새벽 6시였다. 손톱 거스러미를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으면서도 세 명의 이름과 이메일을 메모장에 적었다.

누가 지켜본 것도 아닌데 그 후에야 뜨겁게 달구어진 핸드폰을 던질 수 있었다. 잠이 올 리야 만무했지만 일단 천장을 보고 누웠다. 승규는 11시나 되어서야 일어날 거다. 하도 핸드폰을 보았던 탓인지 흰 천장이 푸르딩딩하게 보였다. 입술을 씹다가, 중얼거렸다.

“채원우.”

* * *

당장 다음날이 되자마자 갈 줄 알았던 승규는 농땡이를 부리며 더 눌러 지냈다. 처음 던전이 터졌을 때 임시 대피소에서 1년 동안 함께 보냈던 추억 아닌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면서, 나름 재미있었다. 잠깐은.

“너 안 가냐?”

“실연당한 친구가 허튼짓할까 봐 못 가겠다.”

“네 눈에는 내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것 같냐……?”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사람이 같이 루미큐브 하고 있겠냐고.

이곳엔 두 명밖에 없어서 한 명이 두 명분을 하고 있었다. 승규는 아직도 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승규 A랑 B 둘 다.

“혹시 모르잖아.”

“수상한데.”

“뭐가 수상해. 야잇, 좀 봐주면 안 되냐?”

나는 징징대기 시작하는 김승규를 무시하고 게임을 진행했다. 엄청 성가시게 이겨버렸다.

그러다가 이놈이 떠나지 않고 눌러붙어 지냈던 속셈을 알게 된 건 루미큐브를 하고 이틀 후였다. 김승규가 온 지 일주일 되던 날, 장 좀 보고 오겠다며 나갔다 왔더니 거실에 말린 미역처럼 늘어져 있던 녀석이 안 보였다.

“김승규?”

대답이 없었다. 화장실에 있나 싶어서 가는 길목의 방에서 승규를 발견했다. 방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너 뭐 해?”

몇 걸음 다가가자마자 뭘 하느라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승규의 어깨 너머로 펼쳐진 종이들이 보였다.

“너 이거로 뭐 하려고?”

승규가 드물게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눈치챘을 거다. 눈치챘으니까 저렇게 반응이 안 좋은 거지.

“…….”

“백겸아. 너 이거로 뭐 할 건데.”

“그냥 가지고 있는 거야.”

다가가서 빼앗으려고 하니까 옆으로 확 치워버렸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승규는 화를 눌러 참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냥 가지고 있는다고? 누가 봐도 기밀인데? 어떻게 얻었어.”

“목숨 걸고 정정당당하게.”

“반출해도 된다디?”

“…….”

“대통령 다음으로 센 게 누구 같아. 아니, 청와대보다 높을 수도 있을 거야. 지금 헌터청은 뭐든 할 수 있어. 그런데 너…… 거기랑 척질 생각이냐?”

승규는 가늘고 길게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나도 별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욕망은 내가 더 강렬할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서류는, 그 욕망과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물건이었다.

“그냥 가지고 있는 거 맞아?”

“……맞아.”

“너 거짓말할 때 손 쥐었다 펴는 거 알고 있냐?”

나도 모르던 습관이었다. 이 새끼가 우정이 있으면 미리 말해 줬어야지. 숨길 수도 없게 되었다.

“보험이야.”

“가입자를 죽일 수도 있는 걸 요즘에는 보험이라고 하냐?”

“그냥……! 그냥……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 주라. 어? 너한테는 폐 안 끼칠게.”

“폐……?”

승규의 손에서 종이가 구겨졌다. 나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고 그걸 억지로 빼냈다. 찢어지지 않게 하려고 승규의 손목을 세게 쥐었다. 헌터만큼은 아니더라도 가이드 역시 민간인보다 신체 능력이 월등했다. 바로 희게 질려서 쫙 펴지는 손에서 종이를 뺏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유일하게 남은 친구이자 몇 안 되는 생존자 집단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위협이 되리란 것도 알았다.

“너……!”

“신경 쓰지 마!”

자괴감과 초조함이 뒤섞여서 고성이 나왔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냥 두라고. 너 이거 파헤치려고 안 가고 나 감시하고 있었냐? 나 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냐고.”

“어. 그랬다. 왜.”

“쥐새끼처럼…….”

“그럼 친구가 황천길로 가는 KTX 타겠다는데 그냥 둬?!”

“승규야.”

나는 스스로도 확신이 없으면서 이딴 소리나 지껄였다.

“나 죽을 생각 없어. 그러려고 모아둔 거 아니야. 이거 혹시라도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게 될 때 도망치려고 가지고 있는 거야.”

“……네 대가리가 그렇게 꽃밭인 줄 몰랐다.”

“나도 몰랐어.”

“네 대가리에 그렇게 꽃 심은 거 채원우야?”

“아마도.”

상황에 안 맞게 픽 웃었다. 채원우는 확실히 꽃밭 속에 살고 있었지. 그게 만들어진 인공 꽃밭에 고작 한 뼘밖에 안 되는 감옥과도 같은 곳일지라도.

“그거 버려. 진심이다.”

“…….”

“나, 누가 더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충분했잖아……. 우리 충분하잖아……. 소중한 사람 잃는 건.”

“그래서야.”

내 마음과 정확히 같았다. 바로 그게 나를 이렇게까지 만들고 있다는 걸 승규는 몰랐다.

우리는 새로 정 붙이는 일을 필사적으로 피해왔다. 내 첫 번째 파트너의 죽음 이후로 나는 더더욱 재수 없게 굴어왔다. 세상에 날을 세우고 선을 그어 비즈니스 그 이상도 이하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너무 오래 스스로를 고립시켜서 잊고 있었어. 새로이 소중한 사람이 생길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인생을 바꿀 수 있는지.

“내 친구가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할 줄 몰랐다.”

김승규는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을 명분도 면목도 없었다. 사납게 몸을 돌리는 승규의 재킷 지퍼에 얼굴이 긁혔다.

조금 뒤에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났다. 찢고 갈 줄 알았는데 결국 그냥 두고 가는 게 참 김승규다웠다. 나는 흩어진 종이를 하나하나 모으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

고작 이런 일로 일일이 절망했다가는 나는 이미 옛날에 죽었을 거다. 설령 김승규가 내 얼굴에 종이를 흩뿌려도 그것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다. 모욕적으로 느끼지도 않았을 거고.

볼에 지퍼 자국 좀 남은 나보다 김승규가 훨씬 힘들 거다. 비록 짭퉁 명품을 쓰고, 짠돌이지만, 김승규니까.

* * *

화해를 해야 하긴 하지.

하지만 김승규는 며칠째 연락을 안 받는다. 이런 건 처음이라 화해도 화해지만 걱정되기도 해서 찾아가기로 했다.

어쨌든 던전이 바닥에서 터지는 만큼 새로 급부상하게 된 운송 수단이 자기 부상 열차였다. 아직 멀리 갈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구획에서 구획까지 이동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자기 부상 열차에서 내려, 오밀조밀 모여 있는 마을로 들어섰다. 던전의 발생 빈도와 지반 안정화에 따른 결과값으로 거주 지역에 등급을 매기기 시작할 때 처음으로 지정된 그린존 열 개 중 한 곳이었다. 그러니 가장 오래된 그린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관리도 잘되어 있었고 체계도 잘 잡혀 있었다.

나는 가는 길에 승규의 할머님을 위한 꽈배기와 시장 도넛을 샀다. 품에 안고 가다가 도수가 높은 고량주도 두 병 샀다. 양손이 묵직해졌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 한가로이 혼자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 등. 이곳은 정말로 던전이라는 게 터지지 않은 세계의 좋은 점만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양손이 묵직해도 크게 무겁게 느껴지지 않으니 산책하기에 적당했다.

이파리들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는 그림자도 제법 볼 만했다. 나는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꽂은 채 걸었다. 자꾸만 돌이 발끝에 차였다. 누가 돌 굴리기 장난이라도 치나 싶어서 고갤 드니 그 순간 시야에 반짝거리는 입자가 눈에 들어왔다.

반짝거리는…… 입자?

깨닫기 무섭게 몸을 돌렸다. 내가 향한 곳은 유모차를 끄는 가족이었다. 그들에게 몸을 날리자 당연히 위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가족들은 놀랐다.

“뭐, 뭐예요?!”

“빨리 여기서 나가세요. 다들 여기서 나가십시오!”

마음이 다급해서 자세한 설명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다. 그러니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미친 새끼 아니야?! 유모차 안 놔요?!”

“지금 내 멱살을 잡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던전이 터지려고…….”

“던전? 여기가 몇 년째 그린존으로 선정되는 줄 알고 말하는 겁니까?!”

발바닥으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유모차에서 멋대로 아이를 들어 아이 아버지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외쳤다.

“가라고요!”

바닥에 떨어진 고량주 병이 깨져 새콤한 파인애플향이 올라왔다. 눈앞에서 반짝이는 입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웬 미친놈이 다 있나 재밌는 구경났단 꼴이었다.

“전 헌터청 소속 가이듭니다. 제발, 제발 좀 대피하세요!”

진동이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는 곧이어 10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 보도블록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곳에서부터 빛과 자기장으로 된 기둥이 뻗어 나왔다. 불쑥 올라온 게 부채처럼 좌우로 펼쳐지며 영역을 펼치기 시작했다.

야금야금 빨려 들어가는 건물들과 사람들의 모습에 손이 덜덜 떨렸다. 던전이 터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가족들을 잃은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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