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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향이라서 햇빛도 아주 잘 들고요. 무엇보다 내진 설계가 무척 잘되어 있어요! 던전이 터지면서 지반이 흔들려도 안전하답니다. 아! 물론 이 지역 자체가 여태 던전이 한 번도 안 터진 곳이긴 하지만요. 그래서 매물이 귀한데 몇 년 만에 하나 나온 거 제가 조르고 졸라서~ 겨우겨우 가져온 거예요.”
던전이 터진다고 지진이 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던전이 터졌을 때 그 경계선에 애매하게 걸치는 경우가 더 위험하다. 나는 깨끗한 유리창에 손을 대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던전 브레이크 이후로 고층 아파트보다 저층 빌라나 단독주택이 선호되고 있는 추세였다. 건물이 우르르 무너져 탈출도 못 하고 깔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 때문이었다.
이곳 역시 8층짜리 빌라였다. 그린존의 최저선이라도 걸쳐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단 꿈을 꿨는데 여긴 그린존 내에서도 안쪽에 속했다. 모두 다 채원우가 준 위약금 덕분이다.
“욕실도 보시겠어요? 여기 물도 틀어보시구요. 잘 내려가요. 온수 냉수 당연히 잘 나오고요.”
원래대로라면 신이 나서 구경하고 가구를 어떻게 들일지 꿈꾸느라 여념이 없어야 할 텐데 내 태도는 시큰둥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일 거다.
사실은 멍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한 눈으로 보고 한 눈으로 흘리는 상황이었다.
꿈꾸던 미래가 성큼 다가와 현실로 이루어지기 직전인데도 이렇게 몽롱할 수가. 오히려 이게 더 꿈같지 않나?
‘형. 여기에 침대 둬요!’
안방 문선에 기대서자마자 채원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증이었다. 채원우와 나는 이런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 우리가 함께했던 미래 계획이라곤 각자 쓴 유서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니 최악의 첫 데이트였네. 그땐 데이트라고 생각도 안 했지만.
“다음에.”
“네?”
“생각 좀 해보고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중개사가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당연했다. 그린존은 매물이 없어서 난리인 지역이다. 오죽하면 집주인이 죽었는데 마침 물려줄 자식은 물론 친인척도 아무도 없어야 한 채 나올까 말까 할 정도라니까. 다음은 없을 거다.
“혹시 금액 때문이시면…….”
“아닙니다. 그냥…….”
나는 조용히 고갤 저었다.
“그냥 제가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이곳에는 현수막도 없고 실종자를 찾는 전단지도 없다. 던전이 한 번도 터지지 않았다는 동네는 작고 전국에 산발적으로 있다. 내가 잃어버린 평범함을 영위할 수 있는 곳.
“언젠가는 터지겠지.”
그린존의 수는 아주 느리게 줄어들고 있다. 던전이 일단 터지면 끝이니까. 처음엔 당혹스럽겠지만 살다 보면 깨닫게 될 거다. 옐로우든 레드든 사실 그린존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위험성을 안고 있긴 해도 사람들은 어디에서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저장한 지 오래된 번호 하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 양백겸입니다. 오랜만에 연락드리네요.”
상대방이 반갑게 인사했다. 늦은 새해 인사를 나누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지내던 곳이 던전으로 무너져서요. 새로 구하고 싶은데요. 네. 레드존으로요. 외곽이든 안쪽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냥 좋은 곳이면 돼요.”
한참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여차하면 둘이 살아도 될 정도 크기면 좋을 것 같아요. 가까운 곳에 마트랑 편의점 있는.”
나는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는 걸까?
* * *
며칠 지나지 않아서 연락이 왔다. 나는 헌터청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떨어진 호텔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린존에 살겠다는 야망도 버렸으니 평생 놀고먹을 돈이 생긴 거다. 수입도 없는데 사치를 부렸다.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까지 나가니 내가 가이드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래로 거처를 옮길 때마다 신세를 지는 중개사 할아버지가 나와 계셨다.
“어어. 백겸 씨. 여기야.”
“잘 지내셨어요? 멋쟁이 선글라스 끼셨네요.”
“그래? 멋져?”
멋쩍게 웃으시면서도 제법 멋진 포즈를 지으신다. 사진까지 좀 찍어달라고 하시기에 무릎까지 굽혀가며 적극적으로 찍어드렸다. 금실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잉꼬부부이신지라 아마 부인분께 보내드리시려는 모양이다.
“여기가 위치만 아니면 아주 인기가 좋았을 텐데. 사실 완전 중심인 것도 아니고 외곽과 중심에 걸쳐져 있거든? 깨끗하고 좋아. 햇빛도 잘 들고. 주변에 산책로도 잘되어 있고.”
“그거 그냥 건물 무너져서 공원으로 조성한 거잖아요.”
“에잇, 참. 이래서 내 헌터청 사람들하고 일하기 싫은 거야. 속일 수가 없다니까!”
너스레도 참 잘 떠신다. 나도 마주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내 웃음소리다.
도착한 곳은 나도 기억하는 아파트였다. 언젠가 저기로 이사를 가자며 부모님이 언급한 적이 있어서다. 완공된 지 두 달 만에 던전만 안 터졌으면 좋았을 텐데.
“잘 지었어. 그러니까 버티고 있는 거지.”
“저, 죄송한데요. 할아버지. 저 여기 말고 그냥 단독주택으로 가고 싶어요.”
“정말로? 그러면 손 많이 갈 텐데?”
“상관없어요. 저 어차피 백수 됐거든요.”
“그으래? 제대로 한 탕 뛰었나벼. 어디, 헬기에서 떨어지기라도 했어?”
그것만 했겠나. 하지만 굳이 민간인을 겁줄 필요 없다. 나는 어디까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말하는 대신 고갤 끄덕이며 엄살을 부렸다.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나도 해봤어. 난 지렸어.”
심각한 표정으로 맞장구치는 할아버지께 죄송했다. 나는 그냥 장단 맞춘 건데……. 졸지에 할아버지가 허공에서 실례하신 것까지 알게 됐네.
“근데 주택은 더 안쪽이야. 괜찮아?”
“괜찮아요. 사실 그쪽이야말로 요즘 던전 안 터지지 않아요?”
“잘 아는구먼. 맞아. 오히려 중간 지역이나 외곽이 위험하지. 우리도 옮기려고. 거기 깨끗하고 좋아. 조용하고. 지내다가 터져도, 후회 없이 살았으니 아쉽지 않구 말이야.”
“에이. 그럼 할아버지 옮기면 안 갈래요.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시면 어떻게 집을 팔아요.”
내 말에 중개사 할아버지가 마구 웃더니 내 등짝을 때렸다. 손이 매웠다. 아직 정정하시니 30년은 더 사시겠다.
우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허리가 굽지도 않고 걸음이 느리지도 않고, 확실히 30년, 아니, 40년은 더 사실 기세였다.
안쪽으로 갈수록 가로등이 놓인 간격이 멀어지고 벤치도 분명 줄었지만, 오히려 아기자기 귀여운 동네가 나타났다. 마당은 각자의 개성과 취향대로 꾸며놓았다. 공원처럼 잔가지 하나 없이 동그랗게 깎은 나무가 있는 마당과 꽉 찼지만 하나하나 다른 종이라 봄이 되면 화사할 맥시멀리스트 정원도 있었다.
서울엔 이제 벌이 없다. 사람이 줄었는데도 벌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라면 봄에 벌도 나비도 올 것 같다. 자연스럽게 채원우와 함께 있는 봄을 떠올렸다.
최근 나는 상상력이 풍부해졌다. 이 풍부해진 힘을 모두 채원우를 떠올리는 데 쓴다. 실연을 당하면 모두 잊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잊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여기야.”
안경을 이마로 올려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신다. 나도 고갤 기울여 문패와 화면에 적힌 숫자가 맞나 봤다. 일치했다.
“예쁘제?”
“……네.”
집은 예뻤다. 정원은 관리가 필요했지만 돌로 마당 대부분을 깔고 구석구석에 조금씩 공간을 준 정도라 말도 안 되게 잡초가 자라거나 할 일은 없어 보였다. 동화 속에 나올 것처럼 예쁜 집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주택이었는데 나는 이곳이 내가 찾던 곳이라 멋대로 결정했다.
바로 여기로 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두 개였고 부엌과 거실이 있었다. 2층이었다면 청소가 번거로웠을 텐데 단층인 것도 좋았다. 마루는 반짝반짝 윤이 났다. 조금 올드한 디자인의 실링팬도 제법 그럴싸하게 보였다. 무엇보다 정원 쪽으로 난 통창과 테라스가 마음에 쏙 들었다.
“여기로 할게요.”
아직 확인해야 할 게 더 많은데도 나는 무턱대고 말했다. 바로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게 무색했다.
“여기가 좋아요.”
비록 전신주에는 실종자 전단지가 있고 바깥쪽으로 5분 걷다 보면 금세 현수막이 보여도, 여기가 좋았다.
* * *
애초에 빈 집이었기에 이사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짐도 별로 없었다. 호텔에서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속옷과 옷가지가 전부였다. 가구는 모두 새로 사야 했다. 난 실연당한 덕에 부자가 된 터라 그 정도는 무리가 없었다.
가구를 모두 들인 다음 마지막으로 몸뚱어리를 입성시켰다. 잠자리가 바뀌었으니 잠을 설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잤다.
그리고 일주일 후, 승규가 집들이를 왔다.
“형민이도 오고 싶어 했는데.”
그렇게 말하고는 머쓱해 했다.
“헌터청에서 나랑 연락하지 말라고 했겠지. 내가 이 바닥 하루 이틀 있어보냐.”
“그것도 그렇지?”
허허 웃은 승규는 뒤늦게 천혜향을 건넸다. 소문난 자린고비가 돈 좀 썼다.
“결제하면서 손 좀 떨었겠다?”
“손 더럽게 떨리더라. 그래도 가격 많이 내렸어. 비싼 건 요즘 딸기가 비싸지.”
“그럼 딸기 사오지.”
“그건 진짜로 손이 떨려서…….”
“돈도 잘 버는 새끼가.”
“제일 잘 벌어주던 누가 그만두는 덕분에 거지 되게 생겼어, 임마.”
승규는 할머니와 그린존에 산다. 모든 게 비싼 그린존에서 지내려면 자린고비가 되는 수밖에 없을 거다. 사정을 아는 처지에 타박할 필요 없었다.
“근데 왜 여기로 돌아온 거야? 나 너랑 이웃 되는 줄 알고 얼마나 기대했는데, 새끼야.”
“그냥. 부질없다고 생각해서. 거기도 던전 터지면 끝 아냐?”
“재수 없는 소리 하고 있어.”
승규는 대놓고 정색하며 벗겨놓은 한라봉 껍질을 내 얼굴에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