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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71화 (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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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우가 미리 말해 주지 않았더라도, 강 팀장이 불렀을 때 놀라진 않았을 거다. 책임일 때도 혼자 쓰던 강 팀장의 연구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명랑한 소리로 들어오란 대답이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린 채원우도 안 하는,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도는 짓거리를 하던 강 팀장이 나를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우리 양 가이드, 원래 이러지 않고 나한테 기 세우며 바락바락 대들었잖아?”

“…….”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강 팀장은 씩 웃더니 자릴 옮겼다.

“이리 와. 와서 앉아.”

책과 서류가 잔뜩 쌓여 컵 하나 놓기에도 여의치 않은 꼴이었다. 자리에 앉자 혼자 신이 난 강 팀장이 커피? 주스? 하며 물었다. 너랑은 차도 마시기 싫다는 게 진심이었지만, 내가 들어도 맥 빠진 목소리로 ‘커피요’ 했다.

“인사과에서 부른다는 걸 내가 맡겠다고 했어.”

쓸데없는 친절은 오지랖에 불과하다.

“채 헌터가 말이야. 계약 파기를 하고 싶다네? 고분고분 말 잘 듣던 애가 왜 그러나 몰라. 사춘기인가 봐. 양 가이드가 이해 좀 해줘.”

내가 너보단 원우를 더 잘 이해해.

“커피 여기. 천천히 마셔.”

앞에 앉아 씩 웃는 낯짝에 붓고 싶었다. 하지만 채원우는 잘 지내냐 물어봐야 해서 참았다. 강 팀장에게, 채원우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해야 해서 참았다.

“여기. 위약금 관련해서 읽어봐. 섭섭지 않게 적었어.”

나는 내민 종이를 받아 들었다. 위약금 액수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얼굴을 찌푸리며 강 팀장을 보았다.

“채 헌터가 사비로 내는 거야. 주고 싶다는 만큼 넣은 거니까 부담 없이 받아들여. 우리 양 가이드는 그래, 그냥 피해자잖아?”

피해자? 가해자는 누구고. 가해자가 채원우인가? 적어도 그건 틀렸다. 여기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고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었다.

달달 외우도록 보았던 숫자라서 안다. 이 위약금을 받으면 내가 원하는 동네의, 그린존의 매물 평균치에 딱 맞게 채워진다. 마치 채원우가 주는 선물처럼.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멍했다. 세상이 나랑 유리되고 있었다.

“파기 안 하겠다고 하면요?”

멋대로 입술이 움직였다. 강 팀장은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팔짱을 끼고 흐음, 깊은 숨소리를 냈다.

“사실 우리가 바라는 일이야.”

“……이걸요?”

“가이드가 있다고 싸울 수 없는 헌터라니. 그만큼 개소리가 어디 있어. 쓸모없는 놈이면 그냥 자르면 될 일이지만 채원우는 그렇지가 않아요. 걔는 어떻게 해도 쓸모가 있어. 그만큼 싸우는 놈은 이 세계를 다 뒤져봐도 드물 거야. 던전이 어떻게 변해도 채원우가 있으면 괜찮아. 회복력도 전투 능력도 언제나 우리 예상을 웃도는 데다 지금도 성장 중이니까.”

“…….”

“사실은 말이야, 양 가이드. 우리는 너희 둘이 연애 놀이를 하길 정말로 바랐어. 그러면 양 가이드도 여기에 잡아두고 채 헌터도 여기에 같이 잡아두고. 일석이조였거든.”

책상 아래로 숨긴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덩달아 잡힌 바지가 구겨졌다. 허벅지도 긁혔다. 강 팀장은 내가 겨우 참고 있는 걸 알면서도 떠들었다. 그 목소리와 말투가 전에 없이 진중했다.

“우리가 바란 건 딱 그 정도였지 상대를 다치게 할까 봐, 자기 처지에 휘말리게 만들까 봐 싸우지 못하는 것까진 아니었거든. 너희 선 넘었어.”

“잠깐, 잠깐만요. 자기 처지에 휘말릴까 봐?”

“아……. 이건 몰랐나? 실수했네.”

머쓱하게 웃던 강 팀장은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뭘 더 숨기냐는 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자기 말을 듣고도 계약을 파기하지 않겠다 하더라도 강제로 집행할 의지가 있단 뜻이었다.

“채 헌터는 네가 자기 때문에 여기에 계속 묶여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어. 격리실에서 하도 말을 안 듣길래 널 가지고 좀 협박을 했더니…… 눈앞에서 동료가 죽든 말든 상관 안 하던 놈이 바로 반응하더라고. 괴물이 사람 흉내를 내는 것 같아서 소름 끼쳤다니까. 그것도 양 가이드 작품이야? 비결이 뭐야?”

강 팀장은 사이코패스가 분명하다. 나와 채원우가 함께 쌓은 유대감을 실험의 결과인 것처럼 지껄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채원우가 한 선택의 이면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연달아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제가 파기하기 싫다고 하면요?”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강 팀장은 내가 손 한 번 대지 않은 컵에 시선을 주고 대답했다.

“채원우 헌터를 평생 책임질 자신 있어?”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달리 로맨틱했다. 평생이라니.

“채 헌터는 우리가 평생 데리고 있을 거야. 죽어서도 데리고 있겠지. 쓸 데가 얼마나 많은데? 뭐 상담이랑 약물 도움 조금 받으면 양 가이드가 옆에 있어도 싸울 수 있을 테고. 아예 기억을 좀 망가뜨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던 참이야. 가이딩 약물은 말 그대로 대체만 해줄 뿐이지 진짜가 아니니까. 그럼 양 가이드는 평생 헌터청 소속으로 살래?”

채원우처럼, 이라고 말하는 거겠지.

나는 이후 오래 후회할 짓을 했다. 아주 잠깐 망설인 거다.

내 망설임을 강 팀장은 바로 눈치챘다. 그는 아주 재미있단 미소를 지었다. 약간 실망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내게 서류를 내밀었다. 어서 서명하라는 무언의 종용이었다.

“그냥 채 헌터 뜻대로 해. 이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야, 양백겸.”

그는 이미 서명을 받은 것처럼 나를 그저 이름으로 불렀다. 비밀 보장 서약이 담긴 서류가 오늘따라 꼴 보기 싫었다. 손에 추를 단 것처럼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상상력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채원우가 나를 허울뿐인 가이드로 곁에 두고, 계속해서 홀로 싸우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는 점점 대화가 없어지고 채원우는 점점 망가져 가는 최악의 결말까지 이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이름을 썼다. 왼손으로 쓰는 것처럼 글자가 엉망이었다.

강 팀장은 내가 마지막 획을 긋기 무섭게 종이를 가져갔다.

“그럼 이제 끝.”

고작 이게? 이렇게 쉽게?

처음 채원우와 파트너 계약을 맺을 때 나는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니 대충 훑고 휘갈겨 서명한 뒤 바로 잊어버렸다. 커피랑 먹을 디저트나 궁리하고 있었다. 그랬으면서…….

“잘 가. 건강하고.”

몇 장 되지 않는 종이를 챙겨 서랍에 넣은 강 팀장은 벌써 내게 흥미가 꺼진 모습이었다. 나는 강 팀장이 금연인 건물 안에서 담배를 무는 와중에도 종이가 들어간 서랍만 노려봤다.

후회하냐고? 당연하다. 서명하기 전부터 후회하고 있다.

“양백겸 씨.”

“…….”

“건강하시고, 앞으로는 민간인으로 던전하고 거리가 먼 평화로운 인생 사시길 바랍니다.”

강 팀장은 내가 다시는 가이드 일을 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모양이다. 신기하다. 내가 미래는 생각하지도 않던 순간에조차 저 사람은 그걸 엿보고 있었다는 게.

저 사람 말대로 나는 이제부터 다시는 누구의 파트너도 하지 않을 거다. 이런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다. 평생 내가 하지 않던 언행과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는 건. 사람이 바뀌는 경우는 한 번이면 충분하다.

“저 이제부터 민간인인 겁니까?”

“아무래도.”

“잘됐네요. 민간인이 되면 꼭 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

그간은 계약이 끝나도 가장 큰 거래처라서 헌터청에게 밉보일 짓은 하지 않았다. 근데 이젠 아니거든. 승규에게도 이번 계약이 끝나면 더는 일하지 않겠다고 말해 뒀다. 어젯밤의 일이고 내가 딱 바라던 금액의 돈이 위약금으로 들어오리란 걸 모를 때였다. 얄궂은 타이밍과 얄궂은 금액이었다.

“뭔데? 들어줄 수 있는 거면 그간의 우정을 생각해서 들어줄게.”

사람 약 올리는 이 낯짝도 끝이다. 나는 강 팀장에게 다가가서 주먹을 날렸다.

강 팀장이 물고 있던 담배가 날아갔다. 옆으로 책상을 짚은 채 쿨럭거리는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아쉽게도 이는 안 빠진 거 같다.

“살살 때렸습니다.”

“이런…… 미친……. 양백겸, 미쳤어?!”

“앞으로는.”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죽이고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이 엉킨 속내가 풀리진 않아도.

“앞으로는 좀 착하게 살아. 마음씨 좀 곱게 먹고.”

어차피 통하지 않겠지. 신념을 가진 미친놈은 위험하다. 강 팀장은 신념을 가진 미친놈인데다가 심지어 능력이 있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거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말을 해야지.

“원우한테 좀 잘해주고. 그냥…… 어린애잖아요, 씨발.”

결국에는 말끝을 떨었다. 강 팀장은 벌게진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런 어린애랑 키스하고 별거 다 하는 누구도 있는데.”

“그 뜻이 아니라. ……됐다. 미친놈하고 누가 대화를 해.”

책상으로 다가가서 커피를 벌컥 들이마시고 내려놨다. 힘 조절을 잘못해서 컵이 산산조각이 났다. 내 알 바냐? 난 이제 평범한 민간인이고 국민이다. 개진상 한번 보여주지.

“단명하고 쪽박 차시길.”

장수와 번영을 비는 대신에 저주를 퍼붓고 강 팀장의 연구실을 나왔다. 나와서는 침을 뱉으려다가 죄질이 미약한 조교의 얼굴을 떠올리곤 그냥 명찰에 엿이나 날렸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처넣었다. 가방이 워낙 작아서 처음에 가져왔던 그대로밖에 들고 갈 수 없었다. 그나마도 제대로 개지 않아서 터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제일 많이 입은 후드티 하나를 꺼내놨다. 채원우가 가지고 있으면 해서. 솔직하게는, 아주 구질구질하고 찌질한 마음으로, 나를 잊지 말았으면 해서.

계약이 끝나면 당일에 숙소를 나가야만 했다. 현관에 서서 뒤를 돌아보니 썰렁했다. 채원우는 오늘이면 돌아올까? 적어도 내가 느낀 쓸쓸함은 덜 느끼면 좋겠다. 그래서 보일러를 틀어놨다. 어차피 헌터청은 돈 많으니까.

아, 그런데 나도 이젠 돈이 많구나. 채원우가 줘서.

감정이 복받쳐 쾅쾅 걷던 걸음이 점차 맥없어지기 시작했다. 넓은 부지를 오기로 걸어 나와서 입구까지 왔을 땐 다리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택시 정류장에 앉았다. 택시를 멍하니 세 대를 거푸 보냈다. 그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중충한 잿빛 하늘에 청승맞은 싸리눈이라니. 함박눈도 아니고. 내 엉망인 꼴에 극적인 효과까지 더해주는구나.

이건 내 두 번째 계약 파기다. 파트너가 멀쩡한데 헤어지는 첫 번째 경우고. 파트너를 그리워할 최초의 경험이며, 내 생애 첫 번째 실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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