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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채원우의 손을 슬쩍 당겼다. 고집스럽게 바깥을 보고 있던 고개가 내 쪽을 돌아봤다. 어떤 표정인지 보기도 전에 채원우가 내 얼굴을 당겼다. 나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뒤 속삭였다.
“좀 자요.”
너라면 지금 잘 수 있겠냐.
“돌아가면 바쁠 테니까.”
“…….”
이곳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구나. 채원우는 내가 있으면 자신이 능력을 못 쓰리란 걸 알고 있었다.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남들 앞에서 자신이 머저리가 됨으로써, 내 잘못이 아니라고 공표한 거다. 의도한 거든 아니든 채원우는 약속을 지켰다. 나를 지키겠다는.
* * *
“어서 와.”
강 팀장이 팔 벌려 우릴 맞이했다. 이런 따뜻한 환대 하나도 고맙지 않다.
강 팀장이라면 여러 의미로 치를 떠는 헌터들이 각자 파트너를 데리고 슬슬 자리를 피했다. 주차장에 남은 건 우리 둘과 강 팀장, 그리고 한 번 본 적이 있는 강 팀장의 불쌍한 조교뿐이었다.
“원우. 쓸모없어졌다며?”
채원우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내 손을 놓았다. 조금도 포장해 주지 않는 저 말에 채원우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평생 해 온 일이 이건데 갑자기 왜 이래. 선생님이 원우한테 실망하는 건 처음이라서 충격이 커.”
“…….”
“네가 왜 여기에 있는데.”
강 팀장의 말은 구구절절 공격적이고 사람의 자아란 걸 깔아뭉개는 식으로 전개됐다. 나와 대화할 때도 말하는 스타일이 세련되지 않긴 했는데, 채원우에게 하는 방식은 조금 달랐다. 타고난 화법인 게 아니라 일부러, 일부러 이런 식으로 채원우를 키워 왔단 느낌이 강했다.
망설이지 않고 원우가 쓸모없어졌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저 말을 듣고 자랐다면 채원우는 지금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무력감에 빠져 있을 거다. 던전에 가서 몬스터를 죽이는 걸 자신의 존재 의의와 가치로 여기고 스스로를 평가해 왔다면, 지금 채원우는 본인을 몇 점으로 평가할까.
“원우는 일단 나랑 가고.”
“저는요.”
나는 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끼어들었다. 강 팀장은 나를 흘끗 보고는 야릇하게 웃었다. 기분이 나빴다.
“양 가이드는 일단 대기!”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진짜 짜증 난다. 사람 성질 긁는다. 몸을 돌린 강 팀장의 뒤를 채원우가 따랐다. 나는 채원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돌아와.”
골 때리거나 한참 핀트 나간 대답이라도 꼭 해 왔던 채원우가 답이 없다.
“기다릴 테니까 꼭 와. 저 사람이 하는 말 듣지 말고.”
“……형은요. 원래 이렇게 다정해요? 모두한테나?”
나는 대번에 코웃음을 쳤다.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에 대한 평판은 조금만 조사해도 알 수 있다. 나는 헌터청의 일반 공무원들에게는 정중하게, 헌터들에게는 약간 삐딱하고, 강 팀장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에겐 역모라도 꾸미는 놈처럼 굴었다. 다정? 그건 승규에게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난 너한테만 다정해.”
“…….”
“그러니까 사람 인격 파탄자로 전국에 소문나기 전에 꼭 와. 늦지 않게.”
채원우는 미세하게 끄덕였다. 끄덕인 건지 아니면 고갤 저으려는 건지. 나는 내 멋대로 해석했다. 끄덕인 거다. 채원우를 보내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아봐. 여기 봐봐.
하지만 채원우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주차장에는 나만 남았고 뼛골이 시린 으슬으슬한 겨울바람만 함께했다.
* * *
현관에 들어서자 불이 탁 켜졌다. 현관 외에는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전기세 아깝단 생각도 없이 하나씩 불을 켰다. 채원우의 방까지 모두 환하게 밝히고 둘러보니 조금 채워 넣은 물건들이 무색하게 썰렁하고 휑했다.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채원우는 약간의 물건도 없이 이곳에서 지냈겠지.
나는 채원우의 방으로 들어갔다.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는 고쳤는지 시계 방향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느렸다. 느리게 흘러가는 초침이 오히려 더 맞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씻고 나와 핸드폰을 확인했으나 아무런 연락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러 시청역을 검색해 봤다. 사람들이 찍어 올린 사진들이 보였다. 개중에 우리가 밥 먹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도 있었다. 아무래도 눈치를 좀 보긴 했는지 작게 나온 데다 흐리기까지 했다. 그 자리에 있던 당사자여야만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그 사진 끄트머리에 겨우 나온 우리 둘을 발견했다. 기분 나빠하는 대신 사진을 저장했다.
앨범으로 들어가니 그간 제법 찍어둔 채원우 사진들이 보였다.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가 사진을 하나씩 넘겼다. 제법 많이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금방 동이 날 때까지.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몇 번씩.
사실 이때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 같다. 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거란 걸.
내 예상대로 채원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채원우가 격리실에 갇혀 있을 때는 돌아와야 하는데 오지 않으니 불안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그래서 채원우가 나 없이 홀로 던전에 나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가슴이 쿵 내려앉긴 했어도 머리로는 충격받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 * *
“이런 스캔들은 처음이네.”
나는 수저 끝을 잡고 천천히 돌렸다. 국 건더기가 느릿느릿 그릇 안에서 돌았다.
채원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근 일주일 만에 보는 모습인데 어쩐지 10년 만에 본 어색한 친구처럼 침묵만 흘렀다. 격리실에서 나왔을 때는 채원우에게 주먹질까지 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흘러 지금까지 온 상황에는 화도 나지 않았다.
“살 빠졌네요.”
“그래요? 채원우 헌터는 괜찮게 지내는 모양입니다.”
겨우 나눈 대화에는 거리감만 가득했다.
배신감? 느끼지. 당연히 느낀다.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가슴이 납득하는 건 별개였다.
젓가락질이 서툴러도 늘 야무지게, 남김없이 식사를 마치던 채원우는 오늘따라 도통 그릇을 비워내지 못했다.
“헌터가 가이드를 찬 거야?”
조금 전에 ‘이런 스캔들은 처음이네’ 하던 목소리가 또 등 뒤에서 들렸다. 나는 고갤 뒤로 휙 젖혀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사사삭 고갤 돌리며 아닌 척하는 모습이 거슬렸다.
허리에 안 좋은 자세가 분명한데도 나는 의자에서 거의 미끄러지듯 앉아 식사 예절에 어긋나는 모든 행동을 하고 있었다. 채원우는 인내심도 좋았다. 그런 나를 보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네가 바라던 게 이런 거야?”
결국에 조급한 건 나였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물었다.
“네가 악역이 되고 나는 불쌍한 머저리가 되는 거. 이게 네가 바라던 거냐고.”
“아마도요.”
대답은 잘하지.
“난 별로 원하지 않았는데.”
“난 이게 맞다고 생각해요.”
“뭐? 내 파트너가 나 없이 혼자서 전투에 나가는 걸 손가락 빨며 구경만 하는 거? 그래서 내가 병신처럼 보이는 거? 그러다가, 극적으로 너한테 맞는 가이드가 새로 나타나서 내 자리를 빼앗는 걸 넋 놓고 보기만 하는 거?”
“그럴 일 없어요.”
“뭐가 없어. 채원우 헌터 어제 출동했잖습니까.”
“아뇨. 그거 말고요.”
채원우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분명 지난주엔 없던 상처가 볼에 남아 있었다. 커다란 습윤밴드로 덮어놓았다. 헌터가 밴드를 붙일 정도면 상처가 여간 깊은 게 아니었다는 거다.
나는 묻고 싶었다. 얼마나 다쳤는지, 아프진 않은지. 이런 날 선 대화 말고 사실은 그걸 하고 싶었던 건데.
“형 대신할 사람 없어요. 제 가이드는 평생 형밖에 없을 거예요.”
“그런데 대체 왜……!”
“그래서 그래요. 형이 유일해서.”
“…….”
“저는 돈도 필요 없고 친구는 애초에 없고 가족도 바라지도 않아요. 형만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형이 없으면 다 끝이라는 거예요. 제 곁이 아니어도 좋으니 그냥 어딘가에 살아 있단 확신만 있으면 돼요.”
그렇게 말하는 채원우의 모습은 놀라울 만큼 성숙해져 있었다. 옆에 서서 그사이 또 얼마나 자랐는지 견주어보고 싶었다. 발을 조금만 뻗어도 닿을 거리에 있으면서도, 남극과 북극에 각자 떨어져 있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채원우는 결심했다.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걸 보아하니 이미 마음을 먹었다. 내가 함께 있는 한 채원우는 능력을 쓰지 않을 거다.
쟤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채원우는 얼마든지 손쉽게 나를 죽일 수 있다. 자신이 죽인 줄도 모르는 사이 죽일 수도 있었다. 그만큼 저 애의 능력은 범위도, 파워도 압도적이었다.
나는 사실 발악하는 특별한 개미에 불과할 거다. 채원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개미.
개미를 살리려고 모든 걸 다 포기하는 멍청이를 또 보게 될 수나 있을까.
“계약 해지 부탁했어요. 제 과실이니 위약금이 나갈 거고요.”
“채 헌터는 그런 말을 급식 먹으면서 합니까?”
“어떤 상황이든 할 거였어요. 그래도 형이랑 키스나 포옹할 때 이런 말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어요.”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다고? 너 나 가지고 노냐? 할 말이 많았다. 뭘 먼저 해야 하지? 매달려야 하냐? 그런데 화도 났다. 넌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나만 칠렐레팔렐레 좋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채원우 쪽은 보지도 않았다. 채원우의 말이 맞았다. 키스나 포옹을 하다가 이 소릴 들었으면 더 최악이었을 거다. 나도 모르는 구질구질하고 추잡한 면을 모조리 발견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채원우는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나를 더 보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그럴 거면 왜 계약 파기를 해. 심리 상담 같은 거 있잖아. 부부들끼리도 이런 위기쯤은 흔히 있지 않겠어……?
아니. 한쪽이 한쪽을 죽일 거 같아서 헤어지고 싶단 말로 상담하는 경우는 드물 거다. 그런 경우는 보통 접근 금지 명령을 신청하지.
씨발. 채원우는 다분히 이성적인 결정을 내린 거다. 접근 금지 명령을 신청할 수 없으니 계약 관계를 끊는다는 거지.
채원우가 멀어진 뒤, 나는 탁 소리가 나게 수저를 내려놨다. 입맛이 조금도 없었다. 단지 이번만이 아니라, 채원우가 본 대로 살이 빠질 정도로 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