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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67화 (6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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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네가 나 두고 자서 심심해. 너는 왜 맨날 자는 거야. 다 컸으면서 아직도 성장기라고 우기려고?”

“어어……. 그런데 저 진짜로 아직도 키 크는데요.”

“그게 싫다는 건데. 이제 그만 커. 키스할 때 시선만 좀 들면 되는 정도가 딱 좋아.”

“죄송. 참아볼게요.”

채원우다운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에 뽀뽀하며 놀렸다.

“그게 참는다고 되는 거긴 하고?”

“우주의 힘까지 빌린다는 마음으로…… 어떻게 해보면 되지 않을까요?”

“무슨 사이비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됐어. 너 평소에도 참는 거 많으니까 이런 것까지 참을 필요 없다.”

우습게도, 너무나 평범한 연인이 휴일을 보내는 것처럼 있는 덕에 내 말은 한결 더 편해졌다. 이러다가 일을 할 때조차 반말을 할까 봐 걱정이다.

“어떻게 알았어요? 저 엄청 참고 있는데. 맨날 하면 아플까 봐요.”

채원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예쁜 눈이었다. 특히 속눈썹이. 속눈썹이 길어서 노상 졸음에 겨운 분위기가 있긴 한데 그 눈이 또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차게 웃으면 더 서늘해 보이기도 하고.

“아, 그거 나도 할 말이 있긴 해. 솔직히 맨날 할 수 있고, 나도 좋거든? 그런데 무슨 채 헌터는 거기도 아직 성장기입니까? 아, 말 나온 김에 일주일에 한 번씩 재봅시다. 길이랑 둘레도.”

“음……. 뿌리, 중간, 머리별로요?”

“당연하죠.”

채원우는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또라이 같은 신소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얘도 어지간히 정상이 될 여지는 없어 보였다. 그러곤 하는 말이 ‘줄자 새로 사요. 금속으로 된 거 썼다가 잘리면 어떡해요?’ 요런 말이다. 하지만 그건 또 중요한 문제긴 해서 우리는 미니 줄자를 살까 했다.

살까 했다는 말은 말만 하고 결국 주문하지 못했다는 거다. 난무하는 광고란에서 ‘몬스터로부터 지켜주는 페로몬 향수!’라는 문구를 보고 그만 호기심을 참지 못해서 딴 길로 새버렸기 때문이다.

페로몬 향수 같은 소리 하네. 애초에 몬스터들의 자각 인지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되는지는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다. 고작 형태를 분류할 카테고리 목록 작업이 끝나고 카테고리별 정의가 마무리 단계인데 무슨.

“이런 걸 사는 사람이 있어?”

낄낄대는데 채원우가 가만히 리뷰를 가리켰다. 상당했다. 심지어 구매 리뷰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게 네 자리 숫자였다.

“미쳤다. 이게 통하면 나도 쓸랍니다.”

그래도 나름 던전 이야기라고 나는 어느새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채원우가 키들키들 웃으며 스크롤을 천천히 내렸다. 같은 쇼핑몰에서 파는 다른 물건들도 심상치 않았다.

“아예 리뷰 동영상 봐봅시다.”

별 헛소리를 다 하긴 해도 이런 유사 과학 제품에는 치를 떠는 강 팀장에게 따로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나중에 아카이빙해서 꼭 보여줘야지.

동영상 플랫폼으로 들어가 던전 제품 리뷰를 찾았다. 재미있는 물건이 많았다. 던전이 터지기 직전에 울린다는 알람기 같은 경우에는 그냥 전자레인지만 돌려도 징징 울려대서 못 써먹겠다고 했고, 레드존에 들어갈 때 착용하는 마스크도 있었다.

레드존의 공기는 그린존과 거의 다르지 않아서 특수한 마스크를 써봤자 그냥 많이 답답한 마스크를 쓴 사람이 될 뿐이었다. 하지만 이 제품은 평이 좋았다. 당연하지.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비슷한 썸네일들에 생각하지 않고 스크롤을 내리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된 커다란 글씨를 화면에 마구잡이로 박아 넣은 썸네일 때문이었다.

<헌터들 충격 실체! 사실은 던전에서 나온 외게인?!>

“뭔…….”

심지어 글자도 틀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보고 있자니 채원우가 그사이 썸네일을 콕 눌렀다. 나는 이제 알고리즘에 이런 거 뜨게 생겼다고 질색팔색을 하면서도 또 어떤 헛소리를 하나 궁금해서 보게 되었다.

“…….”

상당히 화가 많이 난 것 같은 목소리로, 무료가 분명한 일러스트와 조악한 합성 기술로 만든 이미지를 연속으로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이런 말을 하는 거다. 던전은 외계인이 땅속에 심은 알이 부화할 때 생기는 찌꺼기고, 안의 몬스터는 알이 품고 있던 씨앗이라고. 그런데 헌터 역시 그 씨앗에서 나왔다는 거다.

코웃음도 안 나오는 헛소리인데 괜히 채원우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채원우가 던전에서 주워졌단 사실 때문……이 맞다.

“이거요.”

그 때 채원우가 화면을 멈췄다. 마침 화면에 썸네일과 같은 색, 같은 폰트로 ‘헌터, 그들은 과연 인류의 구원자일까요?’라고 떠 있던 참이라 두근거렸다.

“네……?”

절로 공손해진다. 빨리 말하지, 오늘따라 채원우의 말이 느릿느릿했다. 그리고 손이 다시 움직였다. 눈만 아픈 번쩍거리는 문장……을 지나서 그 뒤 배경으로 떠 있는 사진으로.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어린애가 대각선 위로 시선을 던지고 턱을 받친 채 골똘히 궁리하는 사진이었다. 이게 왜……?

“얘 진짜 많이 보이더라고요. 이 사진은 아니고 검지만 들고 아하! 하는 표정, 그 사진으로 더 많이 봤는데……. 유명한 애예요?”

와, 십년감수했네.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최대한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심드렁한 척, 이런 거 재미없는 척 쿨하게 대꾸했다.

“수십 년은 더 된 무료 이미지일걸……. 어떤 의미에선 유명하긴 하겠다.”

“아역 배우 같은 거 아니고요?”

“어…….”

“그렇구나. 그럼 우리 사진도 올리면 이렇게 막 퍼질 수 있어요?”

“뭐?”

절대 안 되지. 나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채원우를 돌아봤다. 그리고 진지하게 눈을 마주쳤다.

“절대, 절대 무료로 아무 데나 써먹게 풀지 마세요.”

“…….”

“특히 너는…… 함부로 사진 찍혀주지 말고. 헌터청이 시켜도 돈 받아내라.”

“으음. 그럴게요.”

“그래……. 그래도 많이 찍어두는 게 좋긴 하지. 얼굴이 아까우니까.”

이왕이면 채원우의 신상 자체가 안 털리는 게 좋고 헌터청도 털리게 두진 않겠지만, 그래도 아무나 퍼가서 막 쓰기에는 너무 아까운 얼굴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며칠 사이 사진 찍는 것에 익숙해진 채원우가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눈을 사르르 감으며 웃었다. 자연스럽고 예뻤다.

“나두요.”

그러더니 채원우가 자기 핸드폰도 들었다. 거의 쓰지 않아서 잊고 있다가 배터리가 방전되기 일쑤이던 그건 오늘따라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채원우는 팔을 뻗더니 나를 팔로 껴안고 몇 번이나 셔터를 눌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발로 찍는 거 같은데…….

결국 빼앗아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내가 발로 찍은 것보다 못한 사진들이 있었다. 처참했다. 연속으로 찍어서 양은 많았다. 눈을 반만 뜬 것도 있고 찌그러진 것도 있고 하여튼, 웃기긴 했다. 지우려다가 그냥 두었다.

“채원우 헌터는 정말로 던전 갈구는 거 말곤 잘하는 게 없네요.”

“형에 대해 기억하는 것도 잘해요.”

얘가 갑자기…… 치고 들어오네.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민망한 건 내 몫이고 채원우는 내 뒤통수에 대고 재차 고백했다.

“아마 형이 절 잊어도 저는 형을 잊지 못할 거예요.”

나에겐 과분한 애정이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생각은 없지만.

던전이 터진 이후로 처음 생긴 욕심이다. 지키고 싶었다. 지켜서 꼭 내 것으로 영영 보관하고 싶었다.

* * *

시청역으로 후속 작업에 나갔다. 몇 개의 출구가 막혀 평소보다 더 붐빈다고 했다. 민원이 폭발하는 것도 당연했다. 관련 공무원들이 하소연을 했다. 저거 정말 이대로 영영 남는 거 아니죠? 없어지죠? 미치겠어요, 저희도 이해하죠. 여기로 출퇴근하니까. 그런데 불평하시는 게 이해가 되긴 해도 저희가 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던전은 두꺼운 피막으로 이루어진 알처럼 변했다.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물리적인 것밖에 없다고 해서 우리는 하염없이 대기했다.

끼니를 건너뛰게 되어 도시락을 받았다. 다들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식은 밥덩이를 씹어댔다. 오가는 사람들마다 이곳을 보고 지나갔다. 대놓고 사진인지 영상인지를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던전 안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는 것만 겨우 보던 헌터와 가이드라는 이상한 족속들이 평범한 사람들처럼 밥 먹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긴 할 거다.

“뭘 봐요.”

우리 옆에 앉아 있던 페어 중 가이드가 입을 열었다.

“사람 밥 먹는 거 처음 봅니까? 그냥 지나가세요. 그만 찍고.”

“아니, 그…….”

“그냥 똑같은 직장인입니다.”

그 가이드의 파트너 헌터가 손을 들었다. 눈을 감고 관자놀이에 검지와 중지를 갖다 대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우리를 찍고 있던 사람들이 엉덩이에 불이 난 것처럼 서둘러 도망갔다.

사람들이 떠난 뒤에 낄낄대고 웃는 그들에게 어린 티가 역력한 가이드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지금 능력 쓰신 거예요? 그러면 안 돼요! 민간인에게 능력 쓰면 잡혀가잖아요……!”

“잡혀가지. 빨간 줄도 그어지고. 그런데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우리는 철밥통이야. 죽기 전까진.”

시큰둥한 말에도 정말로 갓 헌터가 된 것으로 추측되는 애가 종알종알 말꼬릴 잡았다. FM이었다. 나는 이미 저 헌터가 장난을 친 거란 걸 알아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 그래도요!”

“그러면 동물원 원숭이로 지낼까? 계속? 아그야, 걱정하지 마세요오. 이거 다 구라예요. 그냥 영화 속 장면 따라한 거라고.”

눈에 띄게 안도하면서도 시선이 불안한 게,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그때는 원래 저렇다. 위에서 한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무엇보다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며 더는 예전처럼 지낼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단 생각에 몸을 사리고 과하게 무서워한다.

근데 아무리 후속 작업이라 해도 저런 애를 보내냐. 혀를 끌끌 차고 고갤 돌렸다가 이미 열네 살에 다른 헌터들과 전투를 했던 채원우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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