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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64화 (6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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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지러웠다. 사실 어른인 척했지만 나이만 먹었을 뿐 연애 부분에선 채원우만큼 무지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건 전부 일이었지 감정을 나누거나 몸을 섞는 게 아니었다.

중학생 때 좋아했던 애가 있다. 그때가 첫사랑인 줄 알았는데 지금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채원우에게 크리스마스, 초콜릿, 케이크의 의미와 같았던 거다. 나는 그 이상으로 채원우가 좋았다.

“나도 그런 것 같아.”

젠장. 모르겠다. 어지럽고 나발이고 나도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습게도 그렇게 고백하고 나니까 점점 어지럽지 않게 되었다. 이제야 규칙대로 제대로 움직였다.

모든 해법은 간단했다. 아주 간단히 말 한마디에 풀리고 말았다. 내가 안 하던 짓을 하는 것도, 이상하리만큼 너에게 집착하는 것도, 네가 없는 내내 세상이 우중충하게 여겨졌던 것도. 다 하나 때문이었다.

* * *

케이크를 픽업하고 나오니 어느덧 늦은 밤이었다. 길이 제법 밀려서 채원우와 나는 중간에 내려 걸었다.

남들은 몸을 웅크리고도 추워서 덜덜 떠는 날씨인데도 우리한테는 괜찮은 편이었다. 이렇게 추위에도 더위에도 강하고 남들보다 덜 다치는 몸인 이유는, 바깥 계절이 어떻든 상관없이 제멋대로인 던전 안에서 더 잘 버티라는 게 아닐까.

그러면 애초에 헌터와 가이드는 던전에 들어가는 게 운명이고 안에서가 더 잘 맞는…….

“그 연기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자른 건 채원우였다. 채원우는 아이스초코를 마시고 있었다. 어느덧 얼음만 덜걱대는 테이크아웃 컵을 흔들었다.

“박석호 헌터가 유독 이상했던 거, 시청역 던전 안에서 맡은 연기가 그렇게 만든 거라면, 나는 왜 괜찮았을까요?”

문득 채원우의 구조 비화가 떠올랐다. 사람 모습을 흉내 내는 몬스터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근거가 부족했다. 게다가 꽤 구른 나도 그런 몬스터에 대해선 듣지 못했고.

그러니까 내게 채원우가 몬스터인 건 결국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문득 깨닫고는 픽 웃었다. 너무 오래도록 현장에서 굴러 그런지 나도 참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테스트를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테스트? 벌써 그걸 했다고?”

“네. 그래서 제가 했어요.”

채원우는 덤덤히 말했지만 듣는 나는 아니었다. 우뚝 서서 외쳐 묻고 말았다.

“채원우 씨가 모르모트입니까? 맨날 온갖 테스트를 다 하게?!”

우리는 긴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대교만 넘으면 헌터청이었다. 던전 브레이크 이후 새로 만든 대교는 다른 곳보다는 유동 인구가 적은 위치에 있어서 차가 덜 밀리는 편이었다. 그래도 워낙 길이 막히고 있는 터라 가만히 서 있으면 눈에 띌 건 뻔했다.

분한 마음을 눌러 삼키고 다시 발걸음을 뗐다. 그 옆을 졸졸 쫓아오며 채원우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아니, 그런 거 한다고 하면 좀 싫다고 하고 그래요. 뭐 하는지도 모르는데 그걸 다 하고 자빠집니까?”

“자빠지진 않았는데…….”

“그리고 대체 언제 했어요? 이 헌터 웃긴 헌터네. 남이 바깥에서 기다리는 건 생각도 안 하고, 영창에서 그딴 테스트나 받고 있었다는 거 아냐.”

“영창 아니라 격리실인데……. 근데 형, 저 기다렸어요?”

“그럼 안 기다립니까? 하늘이 노래지도록 기다렸다, 왜.”

그 말에 채원우가 또 핀트 못 잡고 빙긋 웃었다. 헤벌쭉 벌어지는 입술이 얄미웠다. 아오, 한 대만 때려주면 좋겠네. 하지만 맞았던 채원우의 입술이 다 아물어가는 동안 정작 내 손등은 여전히 부은 터라 나만 손해인 짓은 다시는 하지 않기로 했다.

“별것도 아닌 테스트라 했어요. 고작 마셨던 연기 또 마시긴데요.”

“그 안에 뭘 섞었을 줄 알고요.”

“그런 짓 안 해요. 내가 이성을 잃으면 손해 보는 건 그쪽밖에 없는 거 잘 아는 사람들이에요.”

“이성을 잃은 채원우 헌터한테 마취총을 갈기던 건 생각 안 나고요?”

“음. 그건…….”

“박석호 헌터도 맞았으니까 괜찮다고 하려고요? 박석호 헌터 가이드도 억장이 무너졌을 겁니다.”

“그런 생각은 못 해봤어요.”

“안 해본 거겠죠.”

이런 일상이 너무 익숙한 채원우가 답답했다. 이런 테스트를 몇 번이나 받아도 버텨냈기 때문에 헌터청에 유용한 유능한 자원일 채원우가 속상했다.

채원우가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얼음컵까지 들고 있었으면서 손이 나보다 더 따뜻했다. 나는 케이크 상자를 고쳐 쥐었다. 어느덧 대교의 끝이었다. 대교를 걷는 일은 생각보다 낭만하곤 멀었고 생각보단 짧았다.

“경험자를 대상으로 하는 테스트였어요. 참가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았던 헌터가 저랑 박석호밖에 없었고요. 그런데 박석호는 제가 때려눕히는 바람에 입원실에 있어서 탈락했고, 결국 가능한 헌터가 저밖에 없어서 한 거예요. 내가 입원해 있었다면 박석호가 했겠죠.”

“…….”

“그만큼 별 실험 아니라는 거예요. 게다가 그거 하면 격리실에서 조금 더 일찍 내보내 준다고 했어요. 나는 박석호를 때린 걸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할 리 없으니까 언제 나갈지 까마득했거든요.”

“……지금 내가 훨씬 애새끼 같아서 자괴감이 드네.”

“형이요? 그건 아니죠. 모든 경험이 나보다 많잖아요. 키스랑 잠…….”

“그래요. 난 잘났고 채원우 헌터는 더 잘났습니다. 잘했어요. 하지만 다시는 그런 거 함부로 하지 마세요.”

“네.”

“걱정되어서 하는 말 맞습니다.”

채원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온갖 도시 조명 때문에 반짝거리는 한강보다 더 빛났다. 나는 얄밉다가 좋다가 애 같다가 또다시 50년은 산 것처럼 구는 종잡을 수 없는 파트너를 밉지 않게 노려봤다. 채원우는 좋다고 실실 웃으며 손깍지를 더 움켜쥘 뿐이었다.

“형이 나에 대해서 아니까 편하긴 하네요.”

“이렇게 된 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하시든가.”

“그건 싫어요. 오늘은 좋은 말만 할래요. 좋은 이야기, 좋은 기억만 하기에도 너무 짧거든요.”

나도 동감했다. 채원우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동화는 아닐 거다. 그렇다고 영웅 이야기도 아니었다. 지리멸렬하고 우중충한 이야기겠지. 차라리 SF였다면 좋았을 텐데. 적어도 픽션이긴 하니까.

“형. 저 지금 술 마신 것처럼 붕붕 뜨고 기분이 너무 좋아요. 저 땅에 붙어 있는 거 맞죠? 저도 모르게 능력 쓰고 있는 거 아니죠?”

“아닙니다. 땅에 붙어서 걸어가고 있어요. 발 직직 끌면서. 밑창 다 닳겠네.”

“생일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좋아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설레요.”

나는 생일이란 게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내 생일도 감흥 없이 보내는 사람이었다. 가족이 있을 때조차도 그랬다. 그런데도 픽 웃고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대답했다.

“원래 그래. 세상이 반짝반짝 빛나 보여.”

“아니에요.”

채원우가 몽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채원우는 내 뒤로 펼쳐졌을 물비늘이 돋은 강물이나 수많은 차도 아니고, 나만 봤다.

“형만 반짝여요.”

너는 내가 마치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해. 내가 단순한 가이드가 아니라 하나의 고유명사인 것처럼 나를 봐.

마치 내가 그저 양백겸이었던, 돌아갈 수 없는 과거처럼…….

* * *

채원우나 나나 속옷만 입은 채로 이불을 어깨에 뒤집어썼다. 실내 온도를 올리는 것도 잊은 채 몸을 섞은 탓이다. 추위를 덜 탄다고 땀을 흘린 뒤 헐벗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바짝 붙으니 그나마 괜찮았다.

“자정 되기 전에 끝나서 다행이지.”

라이터로 촛불을 밝히며 투덜거리는 내게 채원우가 아주 많이 뻔뻔하게 자랑을 했다.

“제가 타이밍을 잘 맞춘 거죠. 제때 끝냈잖아요.”

“타이밍을 그렇게 잘 맞추는 사람이 옷 벗을 시간도 안 줍니까? 거참 컴퓨터가 따로 필요 없네요.”

“형이 존댓말로 그렇게 비꼴 때요.”

“왜요. 얄미워요?”

“아뇨. 섹시해요.”

채원우가 차마 지금 시작되면 안 되는 욕구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을 무시했다. 근처에 라이터 불만 갖다 대도 큰불이 날 것처럼 기름이 잘잘 흐른다, 너.

촛불을 다 밝혔다. 긴 양초는 일부러 하나도 쓰지 않았다. 케이크 위에 빼곡한 스물한 개의 촛불은 채원우가 이제야 만 나이로 스물이 되었다는 걸 알려줬다.

“불 좀 꺼.”

일렁이는 촛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채원우가 샴페인에서 방울을 하나 만들어선 스위치를 향해 쐈다.

“비싼 샴페인인데.”

“저 돈 많아요.”

“통장을 까야 믿죠.”

“속물. 내 돈만 보고 날 만나는 거죠?”

이거 또 이상한 영상 봤나 본데. 앙큼한 말투에 기가 찼다. 헛웃음을 지으며 채원우의 벌거벗은 어깨를 때렸다. 차진 소리가 났다. 채원우가 힝, 하고 엄살을 떨었다.

“돈 말고 얼굴 보고 만났는데요. 관리 잘해요. 괜한 흉터 같은 거 만들지 말고.”

“네에.”

대답은 잘하지. 전투에 들어가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걸 아는 나는 헤식은 웃음이나 흘렸다. 채원우는 ‘형. 저 안 믿죠?’ 하고 삼류 유혹 대사 같은 걸 뱉으며 내 어깨에 팔을 둘러 당겼다. 얼떨결에 그 품에 꽉 차게 들어갔다.

“촛불이나 불어서 꺼. 촛농 떨어져.”

“그것도 예쁜데.”

“맛은 없거든. 소원 비는 거 잊지 말고.”

채원우는 팔을 풀지 않고 내 어깨에 얹은 채 깍지를 꼈다. 채원우 생일날에 목이 졸려 죽는 줄 알았다. 시간을 흘끔 보니까 분명하게 자정을 넘었다. 바짝 붙은 덕에 입술이 달싹이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왠지 떨렸다. 솔직하게 굴기로 하자. 떨리고 좋았다. 그리고 믿지도 않는 신과 믿지도 않는 촛불 불어서 끄며 소원 빌기가 진짜이길 바랐다.

진짜로 신이 있다면 채원우 소원 좀 들어주세요. 얘 진짜 착하고 안쓰러운 애예요. 제까짓 게 건방지게 동정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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