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63화 (6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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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케이크를 사러 가야 했다. 이곳에 너무 오래 서 있었다.

평소라면 흘끗 보고 지나가고 말 곳인데. 예약을 안 하고도 케이크를 살 수 있을지 조금 불안하면서도 채원우가 내 손을 잡는 순간 그까짓 게 다 뭔가 싶었다.

귀에 캐럴이 들리고 세상이 반쯤 부서진 채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구세군 냄비의 종소리가 뒤이어 울렸다. 눈부셨다. 왜 사람들이 연말에 그토록 반짝이는 것들을 사용하는지 이제야 알겠다.

* * *

이브라 걱정했는데 영화표가 남아 있었다. 역시 호러는 뒤에 코미디가 붙든 로맨스가 붙든 혹은 액션이 붙든 연말에 인기 있는 장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좋은 자리라고 보기도 어려운,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은 채 우리는 자꾸만 서로를 지분댔다. 공공질서를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다리를 꼬면 채원우도 다리를 꼬아서 무릎끼리 닿는다거나 팝콘 통 안에서 반만 남은 팝콘은 버려두고 손을 잡는다거나, 그 정도였다.

눈꼴이 시렸을 리가 없다고 자부하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보통 이때의 연인들은 좀, 주변이 보이지 않고 물불 안 가리지 않나?

그런데 우리가 어느 때의 연인들이지?

“한창 좋을 때죠.”

크림우동을 먹으며 채원우가 대꾸했다. 나는 채원우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훔쳐 자연스럽게 내 입술로 가져오며 그런가? 하고 골몰했다. 채원우가 휴지로 이미 깨끗해진 입가를 문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형은 진짜 유죄예요.”

“어?”

“이런 다정한 태도 말이에요. 무의식적으로 하는 거죠? 남들한테도 다 이러죠? 그런 걸 유죄라고 한댔어요.”

또, 또 맥락 없이 배운 말 그대로 사용한다.

갑자기 빨간 날에 빨간 줄이 그어진 처지가 됐다. 이젠 익숙해서 허허롭게 웃으며 얼른 먹으라고 재촉이나 했다.

자정을 넘어가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헌터청 내부 숙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통금이 있었으니까. 우리는 엄격한 집안의 자제분들처럼 고상하게 통금을 지켜 모범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신세였다.

다행히도 안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북을 치든 장구를 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 같아요.”

채원우가 포크로 크림 속을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나는 채원우의 정수리를 보며, 얘가 지금 어떤 얼굴로 말하는지 확인하고 싶단 충동에 시달렸다. 막상 보면 후회할 거면서.

“어린놈이 무슨 벌써부터 인생의 리즈를 점치고 있어. 그렇게 따지면 나는 돌 때가 리즈였습니다. 그때 내가 얼마나 귀여웠는데요.”

“정말요? 사진 보고 싶다. 사진 있어요?”

“없어요. 던전 브레이크 때 집이 개박살이 나서.”

“아쉽다…….”

나는 채원우의 분위기를 살피며 천천히 콜라를 마셨다. 작은 폭죽들이 터지는 탄산음료. 바깥에선 사람들의 발랄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잡상인이 높게 차올리는 반짝이는 제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갔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채원우.”

“네.”

“어렸을 때 기억나요? 돌잔치 때는 뭘 잡았나, 그런 거 나도 궁금한데.”

“기억 안 나요.”

“진짜 던전에서 태어났어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물어봤다. 내 귀에는 그럴싸한 연기 톤으로 들렸는데 채원우의 귀에는 어떨까. 어조가 아니라 말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걸 매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싶다.

채원우의 포크가 멈췄다. 덩달아 채원우의 손목도 허공에서 멈췄다. 나는 초점을 잃고 멍하게 생각에 빠진 채원우의 눈동자를 보며 가만히 물병을 닫았다. 안에서 막 동그란 물거품들이 올라오려던 참이었다. 손을 뻗어 채원우의 손등을 덮으니 채원우가 나를 바라봤다.

“형. 나는 괴물일까요?”

“괴물치고는 너무 사람처럼 생겼는데. 그것도 잘생긴.”

“그런데요, 어렸을 때부터 괴물이란 소리밖에 들은 적이 없어요. 애초에 던전에서 날 주웠다고 하는데 그러면 나는 던전이 낳은 걸까요?”

강 팀장의 사무실에서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던전도 결국 우주의 부산물이라면 던전과 그 몬스터 역시 별의 조각을 품은 우리의 형제가 아닐까, 하던. 하지만 이 순간 나는 채원우에게 그런 번드르르한 말을 해주지 못했다. 나조차도 확신이 없던 거다.

그 잠시의 망설임만으로도 채원우에겐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씨발. 실수를 거둘 틈도 없이 채원우가 자신의 손을 빼냈다.

“던전 안에 있었대요.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었고 기억은 없고. 전세계에 유례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나라마다 저 같은 애들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쩌면 걔네랑 저랑 형제일지도 몰라요. 외계인이 내려보낸 걸지도 모르고요.”

점점 장난스럽게 변하는 말투에 겨우 웃어 보였다. 비겁한 양백겸. 멍청한 양백겸.

“별, 헛소리를. 정말 그렇다면 오늘 본 영화보단 무섭겠네.”

“그렇겠죠? 헛소리였으면 좋겠어요. 만약 그 애들하고 저랑 같은 게 진짜라면 모든 애들이 다 형을 좋아할 거 아니에요? 전 라이벌이 많아지는 건 질색이거든요.”

“무슨, 지금도 라이벌이 있는 것처럼 말하네요.”

“맞아요. 형 인기 많아요. 오븐 리그라고 하나? 야구에서요, 구단 옮기고 그럴 때요.”

“음. 스토브 리그일걸요. 아무튼 오븐은 아니고.”

“그거요. 형 계약 끝날 때마다 다들 은근히 기대하고 있어요. 헌터들끼리는 다 알아요. 헌터들 사이에서 형이 얼마나 유명한데요.”

“그건 몰랐네요…….”

유명하리란 걸 몰랐단 게 아니라 좋은 의미로 유명세를 탔다는 걸 몰랐다는 게 맞았다. 당연히 미친놈에 싸가지 없고 안하무인인 새끼로 유명할 줄 알았는데…….

조금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입꼬리를 움찔댔다. 그러자 대번에 채원우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눈썹을 한껏 구기고 입술을 내밀며 불퉁해졌다.

“형은 인기 많은 게 좋아요?”

“아무래도 그럼 프리로 뛰게 되더라도 몸값이……. 아 차가워. 미쳤어요?!”

갑자기 목덜미에서 물이 터져 깜짝 놀랐다. 허공에 대고 구슬치기할 때 같은 손 모양을 하고 있는 채원우가 보였다. 자신의 물컵에서 찬물을 뽑아 던진 거다. 어이가 없었다.

“넌 나가면 죽었어.”

“어떻게요? 호텔로 가게요?”

“지금 그 텐션으로 보입니까? 눈싸움 한 판 하죠. 안에 돌 넣어서 던져도 무효죠? 설마 우리 채원우 헌터가 그 정도에 다치려고.”

“채원우 헌터는 안 다칠 텐데 우리 채원우는 마음이 상할 것 같긴 해요.”

“…….”

제법인데……?

맹랑한 소리에 넘어갔다. 사실 얼굴에 넘어갔다는 게 더 맞겠다. 나는 채원우의 눈 깜빡임에 헬렐레해지는 멍청이가 된 거다.

그 때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 몰라서 취소되는 케이크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중구난방으로 찔러본 가게 중 하나였다.

<취소 케이크가 하나 남았는데 혹시 예약 도와드릴까요?>

나는 물을 마시며 서둘러 한 손으로 답장을 쳐 보냈다.

<네, 지금 갑니다.>

“가자.”

“어딜요?”

“케이크 생겼대. 가서 자정까지 먹자.”

“케이크요?”

채원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표정에 뿌듯해졌다. 채원우에게는 내가 안 하던 짓을 하는 보람을 느끼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아주 다재다능했다.

헌터청은 모르고 오로지 나만 알 수 있는 재능들이었다. 던전의 몬스터를 죽이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고, 공략하는 데 쓰이지도 않지만 오로지 한 사람의 하루를 밝히는 데는 충분한 작고 환상적인 능력.

나는 올 때와 달리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채원우의 손을 잡았다. 단단히 잡자 오히려 채원우가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사람들이 쳐다보는데요’ 했다. 손을 잡는 것보다 이 야릇한 귓속말과 너의 외모가 이목을 끌게 하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우리 둘이 잘생겼으니까.”

그 말에 채원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늘로 얼굴을 들고 입까지 벌려가며 푸하하 웃는 애를 끌고 갔다. 그러다가 무심코 고갤 돌리고 커다란 유리창에 비친 우리를 발견했다. 만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이리 와봐.”

채원우의 팔을 잡아끌어 붙어 섰다. 키 차이가 크게 나는 게 아니라 딱 좋았다. 핸드폰을 들고 카메라를 켰다. 주로 보내야 하는 서류, 드물게 음식 사진을 찍을 때나 쓰던 카메라가 처음으로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된 거다.

“너 내일을 생일로 할래?”

“네?”

“네가 발견된 던전, 크리스마스에 터졌더라.”

“아…….”

“네 생일 기억 안 나면 내일을 생일이라고 하자. 나중에 기억나면 바꾸면 되지 뭐.”

채원우의 고개가 나를 돌아봤다. 개의치 않고 연거푸 촬영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볼에 차갑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 눈이 동그랗게 떠졌고 거의 동시에 촬영 버튼이 눌려 그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겼다.

사람들이 본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던 채원우는 광장에서 내 볼에 입을 맞춰놓고 해사하게 웃고나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조금 유쾌해서 헛웃음을 뱉었다.

“좋아요.”

“네 생일이 좋다는 거지?”

“아뇨. 형이 좋아요.”

“…….”

“아니. 사랑해요. 초콜릿, 크리스마스, 트리, 케이크가 좋아요. 형은 그것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으니까 사랑해요. 맞죠? 보면 껴안고 싶고 자다가도 떠올라서 계속 뒤척이고 쉬지 않고 뽀뽀하고 싶고 없으면 죽을 것 같고. 그런데 형이 아픈 건 죽는 것보다 싫고. 그럼 사랑 맞죠?”

배운 것 하나 없이 세상에서 격리된 채 살아 온 채원우가 세상에서 가장 정석적인 사랑을 읊었다. 모든 말 하나하나에 고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채원우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적어도 좋아하는 것 이상의 감정이란 건.

그런데 말로 듣는 건 달랐다. 피부로 느껴지던 애정이 귀로 꽂히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너무 어지러워서 바닥이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처음 각성하던 때와 똑같았다. 열만 안 날 뿐이지 그때처럼 산산조각 해체되었다가 재구성되는 것처럼 정신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빙글빙글 도는 시야 속에 유일하게 고정되어 있는 채원우를 보며 천천히 핸드폰을 쥔 손을 내렸다. 야, 나 지금 존나 어지러워. 그렇게 말하려고 입술을 열었다.

“나도.”

이게 아니었는데. 할 말은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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