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안 그래도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터라 안쪽의 억지로 밝혀놓은 연말 분위기와 더 대비되었다. 종말론자들이 주창하는 아포칼립스의 연휴 같았다.
그래도 작년 연말에는 얼마 남지 않은 목표 금액을 생각하며 통장을 정리하는 낙이라도 있었는데 올해는 그런 자축도 할 수 없는 이유는 뻔했다. 타임라인만 읽고 끝난 채원우의 정보를 외우도록 읽었기 때문이다.
채원우를 보지 못하는 동안 나는 미친 사람처럼 비고란을 채웠다. 나만의 채원우 타임라인이었다.
아는 테스트 내용을 최대한 기록하고 나머지는 올해 채원우와 내가 만나서 한 일들을 기록했다. 한 사람의 삶의 기록이라고 표현할 만한 일들은 나를 만난 뒤에나 조금 생겼다. 교만이라고 할 필요도 없었다. 이전에 채원우가 만난 사람들은 모조리 헌터청 사람뿐이었으니까.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채원우의 근무 기록에서 새로운 점을 발견한 게 문제였다. 조금 정신이 들고 난 뒤 차분하게 살펴보니 영입 일자는 있는데, 그게 갱신되는 날짜가 없었다. 한마디로 무기한이었다. 채원우의 영입 날짜가 ―명분만이지만― ‘헌터 독점 금지법’이 생기기 전이라는 게 문제였다. 채원우는 아무런 하자 없이 헌터청에 묶인 신세였다.
“속이 타네.”
욕을 씹어 뱉으며 다 태운 담배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마음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엉망이 되어서 새로 한 대를 물었다. 손이 바짝 얼었는데도 들어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느새 세 대째였다.
가슴이 답답해서 한숨을 쉬자니 끝이 없어 대신 담배를 피우는 꼴이었다. 언 손으로 라이터를 들어 켜려고 하는데 이젠 손뿐만 아니라 라이터도 말을 듣지 않았다. 안 그래도 바닥을 보이던 연료가 끝내 동이 난 건가.
“안 되려니까 이런 것까지…….”
필터를 물어서 뭉개지는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손은 더 헛발만 쳤다. 그 순간 불이 다가왔다. 자연히 담뱃대 끝으로 온 친절에 고갤 기울이며 ‘아.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이런 소소한 친절 정도는 흡연 부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차였다.
“저도 한 대 주세요.”
“…….”
처음에는 하도 생각하고 연구하다 보니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오랜만에 나온 거라 라이터밖에 없거든요.”
“채원우…….”
“두부는 됐고 이것도 하얀색인데 이걸로 대신 받아가도 돼요?”
흰 섬섬옥수가 구겨 들고 있던 담뱃갑을 가져갔다. 멋대로 가져가서 마지막 하나 남은 귀한 돛대를 꺼낼 때까지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멍청하게 서서 앞에 선 사람만 멍하니 볼 뿐이었다.
채원우는 마치 우리가 처음 본 사람처럼, 혹은 조금 전에 헤어졌다가 만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태연하게 내 옆자리에 서는 거였다.
어두컴컴한 날씨 속에 불을 붙이는 채원우의 얼굴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그 옆모습이 그사이에 성숙한 것처럼 느껴져서 멍하니 쳐다보게 되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오랜만에 봐요, 형. 잘 지냈어요?”
씩 웃으며 돌아보는 얼굴에 울렁거리는 가슴과 다르게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그러니까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 때문에 목구멍이 들끓기 시작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머리는 차가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드라이아이스와 불 정도인 거지. 둘 다 화상 입는 건 똑같고.
“아야…….”
멋대로 내지른 주먹에 채원우의 고개가 돌아갔다. 느릿느릿 아프다, 하는 말에 더 화가 솟구쳤다가, 이쪽으로 일제히 향한 눈빛에 정신이 들었다.
“형. 화났어요?”
오른손으로 왼뺨을 만지작거리며 채원우가 물었다. 화가 났냐고?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눈치를 살핀 흡연 부스의 다른 사람들이 슬금슬금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둘만 남기를 기다렸다. 채원우의 얄미울 정도로 깨끗한 얼굴에는 내가 때린 주먹질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흡연 부스가 텅 비고 우리 둘만 남자 채원우가 내 손을 감쌌다.
“형 손만 아프게…….”
“…….”
“많이 화났어요?”
“화가 났냐고?”
내 목소리가 떨렸다. 아, 이제는 슬슬 화가 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채원우의 손을 확 잡아끌었다. 결국 한 모금도 피우지 않은 내 담배와 채원우의 것을 함께 눌러 끄곤 채원우의 얼굴을 잡았다.
“걱정했다고 하는 거야.”
“…….”
“이럴 땐 너……. 나를 많이 걱정했냐고 물어보라고. 화가 날 정도로 네가 걱정됐다고…….”
“미안해요.”
채원우가 덤덤히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얼굴을 때렸던 내 손을 어루만졌다.
“제가 반성을 안 했거든요.”
“허.”
“그래서 안 내보내 줬어요.”
“미친놈.”
“그 소리도 많이 들었고요.”
“너 여기에 잘 보여야지. 갱신 기간 없더라. 법 제정 전에 영입되어서.”
채원우는 어떻게 알았냐는 말 대신 고갤 끄덕였다. 덤덤한 모습에 속이 탔다. 그것 말고도 내가 뭘 알게 됐는지 알아?
하지만 그런 걸 늘어놓는 게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채원우가 함께 훈련 중이었던 헌터들을 죽인 건 사실이고 그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허무한 말이었다.
“너랑 같이 나가서 살까 했는데.”
말끝을 흐렸다. 이곳을 나가지 못할 채원우와 1년마다 새로 채워지거나, 혹은 계약이 들어오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뛰게 될 나의 처지는 확연히 달랐다.
여기서 한마디만 하면 된다는 걸 채원우도 알고 있을 거다. 우리 둘 다 남아달라거나 남겠다는 말이면, 설령 그게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크리스마스 이브를 로맨틱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한 명은 너무 겁쟁이라서, 한 명은 너무 단단해서.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래요.”
“알아.”
“케이크 사 올까요? 저 외출 가능해요.”
그래도 자세히 보니 채원우의 입이 좀 터져 있었다. 헌터와 가이드 사이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뭐, 이 정도는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모양이다. 나는 좀 마음이 풀려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내 참고 있던 손목 통증에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압박 붕대도 사 오자.”
채원우가 하하 웃었다. 그런 채원우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다친 건 다리가 아닌데도 채원우에게 한껏 기댔다. 씻고 온 모양인지 시원한 향기가 났다. 우중충한 회색의 하늘에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아깐 잿물처럼 구린 하늘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까 그다지 나쁜 것 같지도 않았다. 케이크와 따뜻한 커피를 곁들인다면 저런 하늘도 분위기 있다고 우길 만도 하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크리스마스 시즌은 매년 더 화려해지고 있었다. 첫 던전 브레이크로부터 시간이 지나 던전 발발이 일상으로 녹아든 상황이었다.
일상으로 녹아들었다고 그게 단순한 교통사고처럼, 불운하나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사고 정도로 변했다고 할 순 없었다. 여전히 던전은 재난이었고 모두가 재난의 가능성을 품고 살아가게 된 거다. 가족을 잃은 사람도 많고 연인을, 혹은 친구를 잃은 사람도 많을 거다.
그래서 그런지 축제라고 할 수 있는 날이 다가올 때면 사람들은 발악처럼 기념하고 축하했다.
찬란한 모닝 스타가 커다란 트리 위에서 반짝였다. 나는 붕어빵을 들고 오다가 그 모닝 스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넋이 나간 채원우를 발견했다. 어린아이도 잠깐 꺅꺅거리다가 멀어질 그것을 채원우는 한참을 보고 있는 거다. 한껏 꺾인 고개와 조각한 것처럼 예쁜 옆모습이 반짝거렸다.
“예뻐요.”
다가가니 톡 내뱉는 말에 진심이 가득했다. 나는 채원우의 옆에 서서 원우가 보는 곳을 바라봤다. 내 눈에는 그저 반짝이는 별 모양의 장식물에 불과했다. 오히려 채원우의 눈에 비친 모닝 스타를 보는 게 더 감동이었다.
평소에는 내가 쳐다보면 고갤 돌려 마주 봤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는 게 채원우에겐 정말로 특별한 경험인 모양이었다. 산타클로스는 뭐 하나. 진짜 크리스마스는 얘한테 갖다줬어야죠.
하지만 아마도 산타클로스의 기준으로 보면 ‘못된 아이들’을 적는 왼쪽 팔에 채원우의 이름이 올라가 있을 거다. 당연히 채원우에게 크리스마스는 오지 않을 테고.
됐어. 그 있지도 않은 할아버지의 오지 않을 선물보다 내가 사 온 붕어빵이 훨씬 나아. 나는 채원우에게 붕어빵을 물려줬다. 그제야 천천히 시선이 돌아왔다.
……돌아왔다고? 마치 내가 저 장식 반짝이 별에 질투라도 했다는 것 같다. 했나?
“텔레비전 앞에 넋 놓고 있는 애들 입에 넣어주는 밥숟가락 같아요.”
“그런 기억이 나?”
“…….”
순간 채원우가 짙은 눈웃음을 그리며 웃었다. 아차 싶었다. 바보 같은 실수를…….
“저에 대해 뭘 봤나 봐요.”
붕어빵을 든 채로 다시 모닝 스타에 시선을 고정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없었다. 나는 실수한 내 입에 붕어빵을 욱여넣으며 속으로 욕을 씹어댔다.
“근데 괜찮아요. 가끔은 제가 말하고 싶었거든요.”
“말하지 그랬어.”
“형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또 몰랐으면 하고. 매분 매초 마음이 바뀌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얼마나 알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속은 시원하네요.”
내 속은 시원하지 못했다. 커다란 짐이 내게 옮겨진 것만 같았으니까. 그렇다고 버릴 건 아니고.
어느덧 붕어빵 꼬리만 남겨두고 있었다. 나는 꼬리가 가장 좋았다. 그럴 거면 풀빵을 사 먹으라고 아버지는 그랬었지만, 여기가 진짜 맛있는 이유는 팥을 충분히 먹었기 때문인데. 맛있는 건 가장 마지막에 먹는 게 좋았다.
반면 채원우는 꼬리부터 먹고 있었다. 이제야 드러난 내용물에 어!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슈크림이다. 슈크림도 있어요?”
슈크림 붕어빵이 이미 15년도 전에 나왔다는 걸 채원우는 몰랐다.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꼬리부터 먹네.”
“꼬리가 제일 좋아서요. 맛있는 건 제일 먼저 먹어야죠.”
“빼앗기기 전에?”
“네. 빼앗기기 전에.”
채원우가 남은 것을 한입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