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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56화 (57/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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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깼을 때는 숙소였다. 온통 흰 벽으로 이루어진 어떤 방에 갇히기라도 하지 않을까 했던 생각과는 달랐다. 손등에 바늘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수액인지 아니면 무슨 이상한 약인지 모를 약병은 비어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이마를 짚으며 일어났다.

바늘을 뽑고 나서도 한참 중심을 잡지 못했다. 겨우겨우 벽을 짚어 거실로 나오니 써늘한 침묵과 커다란 상자 하나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상자 안을 확인하기보다 채원우를 확인하는 게 급했다. 머릿속으로는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만 했다.

‘없겠지. 원래 이렇게 깨어나면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딘가로 끌려간 다음이니까.’

방문을 열기 전까지 긴장이 상당했다. 가슴이 쿵쿵 뛰어서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텅 빈 침대를 각오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외로 나는 채원우를 발견했다.

“뭐야…….”

아직 머리가 핑핑 도는 중이었던 터라 기운이 쏙 빠졌다. 나랑 다르게 채원우는 링거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다가가서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니 나직한 숨이 느껴졌다. 죽지도 않았고 아무 일도 없어 보였다. 겉보기로는.

안도와 함께 바닥에 미끄러졌다. 채원우는 뒤척거리지도 않고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던전은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했고 우리는 갑자기 마취총에 맞아서 헌터청에 끌려왔다. 어쨌든 서로의 행방을 모르는 건 아니라서 다행인가.

나는 채원우를 두고 거실로 나왔다. 조용히 문을 닫고 그제야 상자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안에는 격리 통지서가 있었다. 오염 물질을 묻히고 나왔거나 바이러스를 달고 왔을까 봐 확인차 진행된 소독에 양해를 구하는 말이 적혀 있었다.

‘아니, 그러면 양해를 먼저 구하고 하든가.’

뒤이어 던전 내부의 연기가 헌터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는 문장이 있었다. 거기서 나는 한 번 너무 놀라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서둘러 뒷말을 모두 읽었다. 자고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니까.

내부의 연기는 헌터들의 폭력적인 성향과 충동성을 자극하는 것으로 파악되어 헌터와 가이드를 별개로 격리해서 검사를 진행했다고 적혀 있었다. 가이드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헌터들은 강한 수면제를 써 진정시켰기 때문에 늦은 밤까지는 깨지 않을 것이며, 혹시라도 내일 아침까지 깨지 않을 경우 헌터청 병동으로 연락을 달라는 주의사항이 이어졌다. 그리고 격리 선고가 내려졌다. 사흘.

사흘 동안 숙소 안에서 대기하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잠깐의 휴가라고 생각하면 좋았다. 채원우가 깨어날 때까지 쉬기라도 해야겠다.

출동 이후에는 늘 약간의 근육통을 겪긴 했지만 이번에는 유독 그게 심했다. 소파에 기어 올라가서 누웠다.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결국 우리 팀 선에서 끝나지 않은 던전은 다른 팀이 투입되어 공략이 진행될 것이다. 최장 기록이 사흘이었던가. 사흘 후 격리가 끝날 쯤에는 던전 공략 소식을 들을 수도 있겠다.

정말 기묘한 던전이었다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토록 오래 잤는데도 또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던졌다.

* * *

격리 기간 동안 우리는 아주 게으르게 지냈다. 채원우는 많이 잤고 자주 깼다. 주로 깰 때는 내가 그 옆을 오래도록 비울 때였다. 그래도 매번 같이 잘 수는 없지, 무엇보다 내가 채원우 곁에 내내 있어주지도 못할 텐데, 하며 점차 거리를 두고 있었다.

격리가 끝난 마지막 날, 채원우가 낮잠 한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비척대며 방에서 나왔다. 내가 그 침대에서 벗어난지 50분만의 일이었다. 이것도 많이 늘은 거다. 읽던 책을 가슴에 얹고 좀비처럼 느리게 걸어오는 채원우를 기다렸다. 이쪽으로 오자마자 내 위로 풀썩 엎어지는 묵직한 무게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악몽 꿨어요.”

어린애처럼 칭얼거리고 있지만 점점 더 나보다 더 커져 격차를 벌리고 있는 신장에, 워낙 좋은 뼈대를 가진 커다란 덩치의 성인 남자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근데 다 큰 애가 이러니까 좋네.

“무슨 꿈이요?”

“형이…… 없어지는 꿈이요. 말 안 할래요. 하기 싫어요.”

“다 했으면서, 무슨.”

“못 들은 걸로 해요.”

자고 일어난 채원우는 따끈따끈했다. 어린애 같다. 하지만 나는 어린애랑 이런저런 일을 하는 역겨운 인간 말종이 아니니까 얘는 성인이 맞지. 채원우의 어깰 토닥이다가, 채원우가 깨어나길 기다리느라 식사를 못 한 배가 너무 고파서 더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배고파, 원우야.”

“저도요.”

아니, 그 배 말고. 우리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맞나 싶게 채원우는 내 어깨에 고갤 파묻었다. 아예 옷 속으로 손이 들어오길래 밀어냈다. 하도 오래 자서 말랑하게 부은 얼굴에 못마땅함이 퍼졌다.

“그게 싫은 건 아닌데 일단 진짜 배부터 채우고요.”

“뭐 먹고 싶어요?”

“음……. 떡볶이 먹을래요?”

채원우는 긴 팔을 커피 테이블 위로 뻗었다. 내 핸드폰을 마치 제 것처럼 사용하는데 나도 어차피 얘 카드를 내 카드처럼 긁으니까 상관없었다.

채원우는 그래도 몇 번 해봤다고 이제는 능숙하게 배달 어플을 사용했다. 떡볶이를 시킨 채원우가 내 옷자락을 들추고 머릴 들이밀었다. 손바닥으로 밀어내려니 힘이 어마어마하다. 이게 애교도 아니고 힘으로 해보려고 해?

“지금 상대방 동의도 없이 하겠다 이거지.”

“안 해요. 형 배고프다면서요. 형 배고프면 빨리 끝내잖아요. 그냥 형 냄새 맡고 싶어서 그래요.”

힘이 아니었네. 머리통을 밀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예쁘고 어린 애인이 이렇게 나오는데 엄하게 거절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있다 하더라도 그 애인이 채원우면 말이 달라질 걸.

“보고 싶었어요. 고작 한나절 자느라 못 본 건데도 이상하게 오랫동안 못 만난 거 같아요. 보고 싶었어요, 형.”

내가 거실에서 채원우를 기다린 시간은 고작해야 세 시간 정도일 거다. 그런데 나도 그랬다. 세 시간이 세 달 같았다. 허리를 감싸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양 버티는 채원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떡볶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약간 부족할 정도였다. 엄청난 열량이 소모되는 전투를 벌인 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내리 잔 헌터와 가이드의 식욕은 상상 초월이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 중 아무거나 더 주문한 뒤, 오는 틈을 이용해서 다른 욕구도 좀 채웠다. 식욕을 채우고 욕망을 해결한 뒤 다시 꺼진 식욕을 채우는 아주 원초적인 삶이었다.

“던전이 변화하고 있다는 거죠?”

채원우는 닭강정을 삼키고 되물었다. 과학 쪽에서는 문외한인 우리 둘이지만 그래도 경험자로서 어느 정도 대화는 통한다. 오히려 연구원보다 더 잘 알 거다.

“연기가 헌터들의 충동을 거세게 한다고 듣긴 들었는데 저는 괜찮았어요. 저는 평소랑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 같은데.”

“맞아. 넌 그랬지. 그런데 박석호는 분명 과하게 흥분한 상태였어. 상황이…… 어쩔 수 없긴 했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채원우의 분위기를 살폈다. 던전 안과 다를 게 없었다. 은근히 단단하다니까.

“자신이 화가 난 이유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운 기색을 보이기도 했고.”

“음. 그런 것 같긴 하네요.”

“근데 또 이상한 게, 헌터를 자극하고 이성을 약화시킨다면 가이드를 잃은 헌터의 폭주가 더 빨라야 했다는 거지. 그런데 그 헌터는 꽤 오래 이성을 잡고 있었어.”

“이런 가설은 어때요. 위협의 가능성이 있고 던전의 환경에 대미지를 주는 대상에만 영향을 준다면?”

그건 분명 솔깃한 가설이었다. 폭주 직전의 헌터들은 잠시간 무력해진다. 폭풍전야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던전의 입장에서는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을 거다. 하지만 박석호는 날뛰고 있었고.

다만, 이렇게 해석해도 채원우가 영향을 받지 않았던 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안에 들어가서 박석호 헌터 만났어?”

“우리 계속 잠들어 있어서 모르겠어요. 소독하고 피 검사하고 수치 검사, 뭐 그 정도 했을걸요? 형, 왜 더 안 먹어요. 많이 먹어요.”

“어쩐지 네가 더 먹으라고 하면 사심이 담긴 것 같아서 좀 찝찝해…….”

“먹으라고 할 때 말고도 전 늘 형한테 사심 가득해요. 그러니까 드세요.”

요즘 채원우는 말이 정말 많이 늘었다.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채원우가 벌린 내 입속으로 빠르게도 강정을 넣었다. 꽉 차서 볼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제야 흐뭇하게 웃으니 뭐, 네가 좋다니 나도 좋다는 마음으로 웃고 말았다.

하도 자서 잠이 안 오는 우리는 아예 소파를 밀어버리고 거실에 자리를 폈다. 영화를 보다가 책을 보다가 뒹굴며 졸다 깨기도 반복했다. 그래서 이른 아침 모든 일정 취소 알람을 실시간으로 받을 수 있었다. 출동 후 몸 상태가 좋지 않을 테니 쉬라는 건가?

“전 검사실 오라고 하네요.”

아무래도 휴식은 가이드에게만 주어진 모양이었다. 채원우가 가기 싫어서 몸부림치며 날 꽉 껴안았다.

“그냥 빨리 가서 첫 번째로 받고 와.”

“그럴까요.”

“매도 먼저 맞는 사람이 낫다잖아.”

“그런 말이 있어요?”

채원우는 이제 스킨십도 제법 잘하고 상황에 맞는 맞장구도 좀 치지만 여전히 상식이 좀 부족했다. 그런 말이 있다고 하고 일으켰다. 채원우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옷을 갈아입었다. 내려가는 사이에 마음이 바뀌어도 배웅한다고 생각하지 뭐.

마주 보고 양치를 한 다음 나란히 신을 신었다.

“이러니까 우리 부부 같아요.”

제법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며 흐흐 웃는 얼굴이 밉지가 않다. 오글거리는 말이라면 딱 질색인데 이 정도 상황극에는 맞장구쳐 줄까 싶다. 뭐 얘가 이상한 변태 성욕자라서 괴랄한 롤플레잉을 하자는 것도 아닌데.

“사내 연애하다가 부부로 이어진 거겠네, 그럼.”

진짜 별것 아닌 말인데 채원우는 감동에 겨운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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