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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54화 (5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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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이해합니다. 게다가 능력을 워낙 많이 썼으니까요. 대단하네요. 같은 급이라도 확실히 달라요. 저였다면 그 정도 운용을 한 뒤에는 쓰러지고 말았을 겁니다.”

박석호 페어는 슬쩍 자리를 피해줬다. 그 의미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채원우의 볼을 감싸고 눈을 마주했다. 피곤한지 왼쪽 눈의 실핏줄이 살짝 터져 있었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번갈아 보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눈 색이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비상구 불빛 때문인가.

채원우는 나를 당기며 앓는 소릴 냈다. 입술을 벌리며 혀부터 내미는 모습이 무척이나 야했다. 나는 곤란하게 웃으면서도 속으론 환영하며 입 맞췄다.

“좋아…….”

채원우는 달콤한 꿈으로 잠꼬대를 하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살짝 입술을 떼고 좋냐고 물어봤다. 고갤 끄덕이며 동시에 옆으로 튼 채원우가 고개부터 내밀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 입술을 막고 채원우의 곧게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댔다. 깊이 빨아들이고 핥았다. 아이스크림을 핥듯이 섬세하고 부드럽게. 그러자 채원우의 손이 내 옷을 찢어져라 쥐는 게 느껴졌다.

“그만……! 못 참겠어요.”

거친 목소리로 채원우가 날 밀어냈다. 나는 채원우의 이마와 내 이마를 짚고 열을 쟀다. 조금 내려갔다. 앞으로 30분은 더 싸울 수 있을 거다. 물론 평소와 같은 수준의 전투를 한다는 가정하에.

“가자. 나 여기서 어서 나가고 싶어.”

사실은 나도 무척 피곤했다. 그래도 채원우와 닿고 싶기도 했다. 우습게도 내가 헌터고 얘가 가이드인 것도 아닌데, 닿아 있었다고 힘이 조금 났다.

채원우는 내 손깍지를 끼고 천천히 나갔다.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니 핏물이 옆으로 천천히 밀려나고 있었다. 아주 작은 파도였다. 채원우가 내 앞길을 치워주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군화는 진창을 밟고 있는데도.

이런 대접은 처음 받는다. 이런 마음도 처음 받는다. 순간 숨이 막혔다.

나쁜 의미가 아니었다. 아주 작은 줄 알았던 게, 사실은 스펀지라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엄청 크고 무거운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원우야. 너는 성장이 빠른 것 같아.”

복합적인 의미를 담아 중얼거렸다. 내 한숨 섞인 목소리를 오해했는지 채원우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그래서 싫어요?”

“아니. 좋아. 나 연하보다 동갑 좋아하거든.”

“너무해. 나이를 어떻게 할 수는 없는데.”

“좋게 생각해야지. 취향을 넘어서 너를 좋아하는 건데.”

채원우는 그제야 빙긋 웃었다.

피바다 위를 걷고 있는 게 아니라 그런지 지금 이 상황이 그저 산책처럼 느껴졌다. 유동 인구가 많은 역을 조용히 걷는 일도 나름 특별하지.

아니면 반대로 여기가 평소의 시청역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그러니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아주 평범한 연인처럼 느껴졌다. 너는 괴물이 아니고 나는 괴물에 기생해서 사는 반괴물도 아니고 던전 같은 건 생겨나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행복 어린 상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 * *

쓰러진 인영을 발견했고 반 정도밖에는 기능을 안 하는 GPS 신호가 저 인영이 우리와 함께 들어왔던 이 중 하나라는 걸 알려주었다. 정비를 마치자마자 우리는 다급히 달려갔다.

박석호와 민의수가 뒤에서 보조를 하고 채원우와 내가 앞장섰다. 무슨 공격이 들어오든 채원우가 빠른 반사 신경으로 막기야 하겠지만, 이럴 때면 채원우가 쓰는 물에도 감지 능력이 있으면 한다.

지척까지 접근했지만 바로 다가가진 않았다. 던전은 랜덤 상자와도같다. 언제고 어떤 것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거다. 만약 다가갔는데 저것 역시 몬스터라면?

“몬스터는 아니에요.”

민의수가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 끝에는 군번줄과 같은 용도인 식별 목걸이가 있었다. 분명히 이름과 생년월일까지 적혀 있었다. 아무리 몬스터여도 저런 디테일까지 흉내내긴 힘들었다.

알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언제 폭주할 줄 모르는 시한폭탄이니까.

그 때 박석호가 고백했다. 너무 늦은 고백이었다.

“사실은 저희 넷이 친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바람 소리가 나게 그를 돌아봤다. 씨발,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저희 넷이 동창이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하지만……! 하지만 그냥 보낼 수가 없었어요!”

일촉즉발의 분위기로 변했다.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열받은 내가 한마디 하려는 참이었다. 쓰러져 있던 헌터에게서 으으,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우리 모두의 고개가 그쪽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곤 눈이 천천히 커졌다.

“형!”

거의 동시에 박석호 역시 ‘의수야!’ 하고 외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며 바닥에 있는 것 중 무엇이든 잡히는 대로 던졌다. 때에 맞춰 채원우가 채워뒀던 봉 안의 물을 허공으로 뿌렸고 박석호 역시 뒤로 몸을 돌리며 손을 뻗었다.

이물질과 섞인 물은 넓게 퍼져 헌터를 고치처럼 감쌌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고, 간발의 차로 쓰러져 있던 헌터의 몸에서부터 엄청난 빛과 충격이 터져 나왔다.

물은 투명했고 그래서 모든 게 보였다. 헌터는 몸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능력 때문에 중독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중독이었다. 능력이 폭발이라고 했었지. 손톱이 덜렁거리고 빠르게 회복되길 반복했다.

“안 돼.”

초조했다. 시간이 다급했다. 아주 정신을 차리기 전에 처치하는 게 맞았다. 정신을 차린다는 게, 이성을 찾는단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여야 합니다.”

나는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매뉴얼엔 그렇게 적혀 있다.

<폭주하기 직전인 헌터를 마주한 경우 피해를 막기 위하여 사살한다.>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고, 지금까지 알려진 유일한 처리 방법이었다.

무서움을 느낄수록 차가워지는 말투 탓에 아주 이성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 같겠지만,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웠다.

바깥에서, 그리고 심지어 헌터청 안에서조차 헌터를 같은 사람으로 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논의가 있지만, 우리한테는 그저 평범한 직장 동료였다.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게다가 모두의 악몽이라 할 수 있는, 헌터의 폭주에 대한 것은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일어난 일은 드물었다. 실제로 폭주가 일어나기 직전에 막은 경우는 그보다 더 드물었다. 아니, 없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아직 뒤에 남겨진 민간인을 생각해야 한다.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동질감을 느끼는 쪽은 민간인이 아니라 헌터와 가이드였다. 같은 외부인이고 같은 괴짜, 같은 돌연변이이자 괴물이었다. 언제고 나도 저 꼴이 되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었다.

“자, 잠시만요! 다른 방법이,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우리 중에서 누구보다 똑똑했던 친굽니다. 정신 차릴 거예요……!”

이렇게 말한 사람은 박석호였다. 그러니까 그도 잘 알 거다. 유대감이 깊은 파트너 가이드를 잃었을 때의 헌터는, 평소 얼마나 이성적이었든 똑똑했든 전혀 상관없이 절망한다는 걸.

“제발요, 잠시만요……. 그, 그래. 우리 저 상태로 헌터청에 데려갑시다. 예?”

“……폭발 피해를 이 정도로 줄인 것도 기적이란 걸 알잖아요.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고 뇌를 망가뜨리는 에스퍼가 온다 하더라도 폭주 헌터는 못 막을 거예요.”

그런 에스퍼는 존재하지 않기도 하고.

박석호는 채원우가 아니라 내게로 방향을 틀었다. 민의수는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그녀 역시 처음에는 말릴 생각이었을 거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하고 나니, 직접 보고 나니 이게 그저 만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죽이는 일을, 그 일에 동의하는 짓도 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내게 매달린 무게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고.

“내가 하죠.”

그러나 우리 중에 그런 사실로도 망설이지 않는 이가 한 명 있었다.

채원우가 허벅지의 건 벨트에서 총을 뽑고는 안전장치를 풀었다. 손목을 뒤집어 총신을 가로로 한 뒤 장전하며 다가가는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잠깐, 잠깐만요. 같은 헌터잖습니까. 같은 헌터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해요!”

“그럼 우리가 다치지 않고 저 사람과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지금 당장 말해 주시든가요.”

“……우리도 저 꼴이 될 수도 있는데, 죽이자고요!?”

“나는 안 될 거예요. 저는 제 파트너가 죽게 두지 않을 거거든요.”

채원우는 말씨름 자체가 지겹다는 기색이었다. 그 와중에도 물고치 안의 남자는 쉼 없이 파괴되고 회복되길 반복하고 있었다. 저러다가 터지고 말 것이다. 말 그대로.

나는 얼굴을 감싸 쥐고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무책임하단 소릴 들어도 좋으니까 이 상황에서 도망만 칠 수 있다면.

흘끗 돌아보니 민의수가 보였다.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앞니로 물고 주먹이 벌벌 떨리도록 쥐고 있었다. 박석호는 그 와중에 채원우를 막고 있었다.

“일단 지금은 괜찮잖아요! 이대로 지상으로 데려가면…….”

“물로는 못 막아요.”

채원우가 고갤 갸웃하며 말했다. 당연한 일을 왜 막느냐는 천진난만한 태도였다. 박석호는 순간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막아야겠다. 싸움을 할 시간은 없었다. 나 역시 아직 마음이 내키지 않는 주제에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박석호가 낯빛을 확 바꾸었다.

“열네 살에 이미 헌터 여섯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을 땐 헛소문이겠지 했습니다.”

일어나기 무섭게 귀에 꽂힌 말에 몸이 휘청였다. 지금 내가 들은 말이 뭐지?

채원우가 나를 돌아봤다. 눈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말은 채원우가 숨기고 싶었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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