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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53화 (5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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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심히 눈빛으로 끄덕였다. 채원우는 박석호의 손을 아주 가볍게 잡았다가 금세 놓았다. 그러곤 내 뒤에 바짝 붙었다.

다행히도 박석호는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성격이 무던해서 그런지 채원우의 낮은 사회성을 드러내는 제스처에 불쾌해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각성제를 씹고 민의수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상태를 묻는 듯싶었다. 고갤 끄덕이더니 그녀가 앞장섰다.

“이쪽으로 가요.”

“길을 잘 아십니까?”

“네. 각성 전에 여기로 출퇴근했었거든요.”

엷게 웃은 그녀가 처음으로 조금 풀어진 말투를 했다.

“서울시청 공무원이었어요, 저.”

“저는 광범위하게 능력을 쓸 때는 공격력이 떨어져요.”

채원우가 박석호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조금 신기하게 봤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과 저렇게 대화를 잘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나도 체력이 떨어진 터라 민의수에게 지혈제를 나눠준 뒤 에너지바를 씹고 있었다.

1호선 플랫폼에서도 느낀 건데 확실히 플랫폼 안에서는 철로 몬스터 말고는 다른 몬스터의 출몰이 없었다. 계단에 걸터앉아서 빠르게 작전을 구상하는 참이었다.

“그럼 제가 그 수를 복제해서 수로 밀고 나가면 되는 거죠?”

“네. 다만 고체와 액체는 다를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액체를 복제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걸 복제라고 하기도 애매하고요.”

남겨진 몬스터의 사체로 보아, 박석호의 전투 스타일은 아마도 이런 식이었을 거다. 총알이나 칼을 던지거나 난사한다. 그것을 공중에 무작위로 복제한다. 그리고 동시에 공격한다. 잘만 사용하면 아주 효과적이며 전투에 큰 도움이 될 능력이었다.

“구형으로 뭉칠 거예요.”

구형으로 뭉친다고 액체가 고체가 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채원우를 막 만났을 때의 전투 스타일을 떠올렸다. 지금과 달리 정교함과 거리가 먼 무식한 방식이었다.

채원우는 몸으로, 위기를 극복하며 알아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법을, 전투하는 법을 터득해 온 게 분명했다. 누군가와 합을 맞춰본다거나 본인의 능력을 이해해서 연구하기도 전에 투박하게 능력의 크기만 키워 왔을 거다.

나는 에너지바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우물거리며 펜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뽑아서 채원우에게 내밀었다.

“이거를 물로 감싸서 띄울 수 있죠?”

채원우는 수통을 열어선 경단처럼 작은 물공을 만들었다. 그게 둥실둥실 떠 와선 펜 뚜껑을 삼켰다.

“박석호 헌터님. 펜 뚜껑에 초점을 맞춰서 능력을 전개해 보세요.”

“그러면 펜 뚜껑만 복제될 수도 있는데요. 이게 둥글둥글해서 글쎄요…….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지…….”

“이건 그냥 실험입니다. 위에 올라가선 뼛조각이든 뭐든 날카로운 걸 사용할 거고요. 펜 뚜껑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좀 두루뭉술하게, 초점을 흐린 것처럼 집중해 주세요.”

박석호가 민의수와 시선을 교환했다. 민의수가 박석호의 손을 잡고 고갤 끄덕여주었다. 둘의 신뢰와 애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박석호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움켜쥐듯 주먹을 쥐곤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펜 뚜껑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복제되었다. 끝으로 갈수록 물방울은 점점 작아져 끝내 뚜껑밖에 남지 않았지만, 괜찮은 성과였다.

“오. 너무 대단하신데요.”

나는 박수를 짝짝 치다가 채원우에게 손이 꽉 잡혔다. 채원우는 뚱한 표정으로 ‘다른 헌터 칭찬하지 마세요’ 하고 투덜거렸다.

얼굴에 꽂히는 시선에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저 둘이든 우리 넷이든 살아나가면 어떻게 소문이 퍼질지 빤했다. 나는 천천히 민의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그녀가 창백한 와중에도 손을 저었다.

“어디 가서 말 안 할게요.”

고맙긴 한데 그 말씀만으로도 채원우가 얼마나 노골적이었는지 확인하게 되었다고……. 그래도 감사하다고 고갤 끄덕였다.

“이만 가보는 게 좋겠습니다. 만약에 죽은 가이드가 정말 저희 팀원인 그 페어라면 상황이 안 좋아요.”

“그……. 형제라는 페어의 헌터분 능력도 아시나요?”

“알죠. 그래서 서둘러야 한다는 겁니다. 능력이 폭발이거든요.”

지하 3층 깊이에서의 폭발이라. 말 그대로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었다.

* * *

돌 조각이나 뼛조각을 물방울 속에 넣어서 복제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는 채원우와 박석호의 협동 공격을 약간 흥분된 상태로 지켜봤다. 채원우의 능력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내가 꽃피우고 있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 화려한 폭죽처럼 보이는 능력에 마냥 감탄하고 있을 순 없었다. 우리의 위치를 후방 지원팀이 모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GPS로 우리 위치가 뜨지 않는단 가능성을 점쳐야 했다. 그렇다고 낙담하고만 있을 순 없지. 민의수 가이드와 나는 메시지를 쉼 없이 보냈다. 그쪽이 도착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전달하며 동시에 두 헌터를 돌봐야 했다.

민의수는 확실히 이쪽에 빠삭했다. 그녀의 도움으로 가시거리가 엉망인 상황에서도 위치를 용케 파악해서 어디까지는 클리어했는지 공략팀에 전달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연되고 있긴 해도 진도는 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남은 점 하나였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에 우리들과 그 점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위치는 가까워지고 있는데.”

“헌터인지 가이드인지 모른다는 거죠?”

우리는 기둥 뒤에 몸을 엄폐하고 숨어 잠시 숨을 골랐다.

정말 가까운 곳에 점이 반짝이고 있었다. 드디어 처음 만나고 헤어졌던 진압 A팀이 다 모였다. 다만 그 남은 점이 좀 전에 익룡이 가지고 갔던 사체의 위치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게 문제였다. 혼자 남은 가이드는 괜찮지만, 혼자 남은 헌터라면……. 심지어 파트너 가이드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고 그걸 알고 있다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잡혀간 쪽이 헌터일 거라고 생각해요.”

민의수가 손을 들어 말했다.

“우리가 전투에 돌입한 지 어느덧 한 시간 반이 지나고 있어요. 석호의 몸에 한계가 온 게 40분 전이고요. 폭주가 진행되었다면 이미 진행되었어야 맞는데 아직 조용한 걸 보면 헌터가 죽은 게 아닐까요?”

“그럴 경우 가이드는 아무 일 없나요?”

채원우가 어딘가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민의수가 고갤 끄덕였다. 곧 입을 꾹 다무는 채원우를 보며 나는 가만히 턱을 괴었다.

민의수의 말에도 근거가 있었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찝찝함은 뭐지. 나는 감이 좋은 편이었고 특히 안 좋은 일에 발달되어 있었다. 불운과 가까이 사는 덕에, 불운이 찾아오는 기색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본달까.

“다른 의견 있나요?”

하지만 고작 예감, 촉, 삘 때문에 근거도 없는 주장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좀 더 조심성을 기하기로 했다. 제안을 하려는 순간 채원우가 손을 들었다.

“잠깐. 이거 움직이는데요.”

“어디요?”

들여다보자 정말이었다. 점이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시선을 교환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언제고 달릴 수 있게 쪼그려 앉은 채로 내가 제안했다.

“여기서 최대한 가이딩하고, 저희가 가운데에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민의수 가이드와 제가 가운데에서 위치하고 박석호 헌터가 뒤에 자리 잡아 채원우 헌터가 능력을 펼치는 방식을 보고 협동하는 건 어떨까요? 아, 무임 승차하려는 게 아니라 조심을 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나는 박석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박석호 헌터님, A급이시죠?”

박석호가 조금 당황했다가 고갤 끄덕였다.

“표면적으로는 B급입니다.”

망설이던 박석호가 민의수의 손을 잡더니 조곤조곤 이유를 풀어놓았다.

“지원형은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탐을 내기 때문에 등급을 속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말은, 채원우 헌터도…… A급이니 여기에 특급에 속하는 헌터가 둘이나 있다는 거죠.”

박석호가 나에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나도 채원우의 등급을 속였으니까. 채원우는 내 곁에 몸을 기댔다. 어깨에 괴어지는 고개에서 미열이 피어올랐다. 민의수와 박석호가 괜히 애정 표현을 하는 게 아니었다. 나 역시 손을 뒤로 해 채원우의 목덜미를 주물렀다. 채원우가 갸르릉 대듯 웃었다.

“이 상황에서 저희 둘 중 하나라도 잘못되면.”

그 순간 채원우가 내 손을 움켜쥐었다. 민의수의 손 역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단순히 계약으로 묶인 관계 이상의 파트너십. 게다가 파트너들은 A급과 그 이상으로 추정되는 특급이다. 시청역은 깊은 지하 아래에 있고, 이곳이 무너지면 무덤을 만들 필요도 없이 그냥 묻히게 되는 거였다.

“큰일이 생길 테고 인명 피해도 많이 생길 겁니다. 피하자는 거지요.”

“물론 가운데에 둘 생각이었습니다.”

울컥한 박석호가 나섰다. 민의수가 그런 박석호의 손등을 다독였다. 어쩐지 저 페어가 원래 소속되어 있었다는 팀의 분위기를 알 것 같았다, 형제가 있었다는 페어도 그렇고. 돈독한 분위기였을 거다. 다소 삭막한 분위기의 우리 팀과는 분명 달랐다.

채원우가 물을 마시더니 내게 내밀었다. 나는 가볍게 입만 축이고 다시 내밀었다. 그러자 채원우는 그것을 받아 손잡이 부분에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전용 무기를 정비했다. 저것으로 칼도 만들고 창도 만드는 모습은, 섹시했다.

“원소계는 편리하네요. 처음 봤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채원우 헌터밖에 없다고 하지요? 극비라던데.”

채원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대답하는 대신 일어나선 나를 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그……. 능력에 취하면 어리광이 좀 많아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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