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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52화 (5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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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우가 담담히 고한 말을 매정하다고 할 순 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혹은 가이드와 사이가 더럽게, 더럽게 안 좋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가이드와 파트너의 유대감이 아주 깊고 돈독하다면, 혹은 드물게 부부나 연인이 함께 각성한 케이스라면 정말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 거다.

“일어나죠.”

울적한 상상을 하며 웅크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채원우와 나는 벌떡 일어나서 빠르게 차량을 찾았다. 플랫폼 거의 끄트머리에 살짝 꼬릴 드러낸 차량이 보였다.

그 차량에 올라탔지만, 소득은 없었다.

“……적잖은 던전을 들어와 봤지만, 이번만큼 기분이 더러운 던전은 처음이에요. 안 그래요?”

우리가 탄 차량은 꼬리 중에서 꼬리였다. 노약자석 일부만 남기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는 벼랑 아닌 벼랑 끝에 선 기분으로 사라진 나머지 부분과 차량이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는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했다.

“살고 싶다면 애도 같은 건 하지 않고 당장 움직여야 한단 점이 가장 기분이 더럽습니다.”

중얼거리는 내 어깰 감싸 당긴 채원우가 내 볼에 입 맞췄다. 이 순간만큼은 채원우가 나보다 연상처럼 느껴졌다.

“일일이 애도 같은 거 하다간 몸의 수분이 다 사라질 거예요. 나는 형 몸이 촉촉했으면 좋겠어요. GPS로도 찾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형 몸의 물로 찾아내고 싶으니까요.”

이상한 소리였다. 조금 기괴하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건 당연했고. 그런데도 상당히 위로가 되었다. 나는 채원우의 허릴 당겨 안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몸을 돌렸다.

“가죠.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찾아내러.”

* * *

안개가 자욱한 길을 걷자니 무성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찰리 채플린 영화 같은 거 말이다. 중학생 때 수업 시간 자료로 본 적이 있다.

적어도 그 영화는 우습기라도 했는데. 우리도 멀리 떨어져서 보면 꼴이 우스울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호러 판타지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1호선 보여요.”

채원우가 고글을 닦아내며 말했다. 나는 고갤 끄덕이며 채원우의 목덜미를 가볍게 빨았다. 채원우는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웃었다. 고양이라기보단 호랑이과려나. 채원우 뒤로 난자당해 죽은 몬스터 사체들을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형이 옆에 있으면 안전한 기분이에요. 컨트롤도 평소보다 잘돼요.”

상황과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채원우가 내 허릴 감싸고 중얼거렸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우리가 따뜻한 물로 가득 채운 욕조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채원우를 조금 밀어내고 물을 마셨다. 가이딩은 결국 가이드의 체력을 깎아 먹는 행위여서 몸이 무거웠다. 안개도 한몫했다.

“이 안개 말인데요.”

나는 나도 잘 모를 기준으로 반말과 존대를 섞어 썼다. 아마도 일에 관련된 일에는 존대를 하는가 보다 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체력을 빨리 닳게 하는 것 같아요. 안 그래요?”

동의를 구했지만 표정만 봐도 채원우가 공감하지 못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이 괴물 체력아. 내가 떨떠름한 눈으로 노려보니 채원우가 그제야 뒤늦게 맞장구를 쳤다.

“그런 거 같아요. 아마도.”

“됐습니다.”

“형이 있어서 잘 모르겠어요.”

가증스러운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채원우는 진짜로 모르겠다며 나를 더욱 껴안았다.

“형하고 있으면 힘든 걸 모르겠어요. 그냥 자꾸 신나는데요.”

“알았어요. 맞닿은 부분으로도 충분히 알겠네요.”

바짝 붙어 있는 몸 사이로 열기가 가득했다. 내 열기는 아니었다. 채원우가 능력을 끊임없이 방출해야 하는 상황이라 미열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맞닿은 부분들이 돌처럼 단단한 걸 보면 그 이유만은 아닌 게 분명했다.

벌써 몇 번을 죽을 뻔했는데도 채원우의 머릿속은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낙관과 낭만. 호러 판타지와는 거리가 먼 메르헨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나도 그 꽃밭에 전염된 건지 아니면 취한 건지, 평소와 다르게 금세 ‘에라, 모르겠다’ 하게 되는 거다.

“그래요. 뭐. 저도 힘들긴 해도 무섭진 않네요.”

“그건 저 때문이죠?”

“그래. 너 때문이다.”

채원우의 볼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떨어졌다. 열려 있던 천장 환풍구 구멍을 통해 훌쩍 떨어지는 몬스터가 보였기 때문이다. 몸이 아주 말라서 스피드형으로 추정되는 그린 고블린이었다. 사람처럼 생기진 않아도, 어쨌든 이족보행하는 몬스터는 기분이 찝찝하다.

채원우의 고갤 옆으로 밀어내 생긴 공간으로 총을 겨누었다. 채원우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를 지지대 삼아서 쏘니 반동 하나 없이 정확히 몬스터의 미간에 맞았다.

“이제 그만 내려가죠. 여기 있다간 또 몰려오겠습니다.”

“그랬다면 진작에 몰려왔겠죠. 몬스터 수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채원우가 축축하게 젖은 장갑을 허공에 털어냈다. 채원우의 말대로라면, 아마도 이 1호선 플랫폼에 갇힌 사람은…….

“운이 좋다면 오래 헤맬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헌터와 가이드 페어일 것이다.

* * *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서 헐떡이고 있는 헌터와 가이드가 있었다. 거의 완파된 차량 역시 보였다. 구멍이 무수하게 뚫려 너덜너덜한 몬스터가 채 삼키지 못한 차량 조각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이곳은 상황이 더 급박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차량의 끄트머리에 모여 있었다. 다 삼켜지기 직전에 구한 게 분명했다.

인기척에 고갤 번쩍 들었던 헌터가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또 몬스터인 줄 알고 놀랐네…….”

“저거 어떻게 없앴어요?”

채원우는 가벼운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대뜸 물었다. 아무래도 능력을 파악하려는 모양이었다. 채원우가 나 외의 다른 사람을 대하는 건 또 오랜만에 봐서 새삼 깨달았다. 사회성이 는 게 아니라 나랑 채원우가 서로에게 적응한 것에 불과하다는 걸. 나는 머쓱하게 앞으로 나섰다.

“채원우 헌터와 파트너 가이드 양백겸입니다. 같이 투입되었던 전투조 맞으시죠?”

“아. 맞습니다. 기억나네요……. 헌터 박석호와 제 파트너 가이드 민의수입니다.”

“안녕하세요.”

머리를 짧게 잘라 목과 볼이 모두 드러나는 덕분에 가이드 민의수가 입은 부상이 훨씬 더 잘 보였다. 거즈와 붕대로 덧대고 있긴 했지만 목을 다친 것 같았다. 그녀의 창백한 안색이 이해가 됐다.

드문 여성 가이드였다. 절대로 안 된다고 거부하는 게 아닐 경우 헌터와 가이드 페어는 같은 성별로 맞추는 게 대부분이었다. 애초에 가이딩을 위한 스킨십이 키스와 포옹 이상으로 넘어가는 경우는 드물기도 했고, 여러 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평소라면 묻지 않을 사적인 질문이지만, 익룡처럼 생긴 몬스터가 가이드를 물어간 걸 봤기 때문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례지만 죄송합니다. 혹시 두 분은 연인이신가요?”

“네. 맞는데 왜 물어보시죠?”

민의수가 지친 기색으로 되물었다. 호흡이 가쁘고 안색이 안 좋은 게 걱정이었다. 피를 많이 흘린 모양이다.

“사실은 오는 길에 사망한 가이드를 발견했습니다. 몬스터가 사체를 가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계약 이상의 관계가 있는 페어가 두 분만 있으신가 해서요.”

그러자 민의수와 박석호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불길했다. 나는 안 좋은 일은 드문드문 오지 않고 한 번에 굴러온다고 믿었다. 커다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불어나서 한꺼번에 덮친다고.

박석호가 고갤 저었고 민의수가 나를 향해 물었다.

“여자였나요, 남자였나요?”

“성별은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만약 평소와 같은 팀 구성원이었다면 따로 물어 확인할 필요가 없었겠으나 이번에는 투입되며 타 팀과 섞인 채 구획이 나누어졌다. 심지어 나뉠 땐 방독면을 쓴 상태였다. 불안감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민의수는 고갤 저었다.

“저희 팀 소속 페어가 하나 있어요. 남자 둘이고, 제가 알기로 형제라고 들었어요.”

가족이 함께 각성하는 경우는 헌터청이 군침을 흘리는 흥미로운 케이스였다. 서로를 인질 삼아 오래도록 묶어둘 수 있기도 하고,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거나, 때로는 대화를 나누는 정도로도 안정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가이드와 헌터의 관계 때문에 가족이 페어가 되면 편견을 유발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유전자가 흡사한 사이끼리는 농밀한 스킨십이 필요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가이딩이 되는 아주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말하자면, 존재의 부재만으로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경우의 수는 50 대 50이에요. 안 그런가요?”

민의수가 의연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되물었다. 일어난 그녀는 잠시 휘청거렸지만, 연인의 도움 없이 똑바로 서서 나를 응시했다. 최악의 상황부터 가정하는 나와 달랐다.

그래. 이 자리에서 폭주를 우려하는 것보다는 직접 찾아가는 게 나았다.

한참 가만히 있던 채원우가 문득 끼어들었다.

“그런데요. 못 들어서 그런데 헌터분 능력 좀 파악하고 싶은데요.”

“복제입니다.”

박석호가 대답했다. 그 역시 지친 기색이었다. 신체가 아니라 정신이 지친 게 분명했다. 나는 상상해 보았다. 겨우 찾은 연인이자 파트너가 목에 상처를 입은 채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면? 나는 박석호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쓰러질까 봐 두려운 거다. 잠시라도 일어날 뻔했던,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저는…….”

“압니다. 헌터청에서 좀 구른 헌터라면 무조건 알죠. 채원우 헌터 맞죠? 물을 다루는. 아주 드문 능력이라 한 번쯤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는군요. 함께 합을 맞춰 살아서 나가봅시다.”

겨우 일어난 박석호가 채원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채원우는 그 손을 한 번 보고 나를 쳐다봤다. 허락을 구하는 군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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