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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림을 소원으로 듣기라도 한 걸까. 평소에는 내 소원 따위 전혀 들어주지 않던 신이 이번만은 딴짓을 안 하고 있던 모양이다. 발바닥에서부터 불길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재빠르게 중얼거렸다.
“이럴 거면 채원우도 제 주변에 있게 해주시고요.”
진압봉을 최대 길이로 늘였다. 문 너머로 보이던 암흑 속에서 없던 철로가 일어섰다. 철로가 고삐 줄처럼 요동치더니 꽈배기처럼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없이 두꺼워지고 두꺼워지다가…… 거대한 거머리 모양이 되었다.
“토 나와.”
나는 눈매를 찌푸리면서 웃었다. 이 정도는 그래도 역겨운 정도는 아니었다. 잡몹을 튀김 먹듯이 먹어치우던 커다란 괴물을 봐서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장갑을 껴서 다행이었다.
커다랗게 몸을 일으킨 거머리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나를 향한 반응이 없는 걸 보니까 무지성이거나 눈이 보이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듯싶었다.
입을 벌리자, 강철로 된 이빨이 보였다. 동굴 같은 입 전체에 빼곡하게 박힌 그것이, 입이 최대로 벌어지기 무섭게 톱니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와, 씨발.”
빠르게 달려 심박수를 높였다. 그리고 미리 설정해 둔 타이머를 켰다. 여성의 명랑한 목소리가 나왔다.
―타이머가 시작됩니다. 60, 59, 58…….
“57, 56,…….”
엄청난 속도긴 하지만, 1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세 줄로 이어지는 좌석의 맨 끝, 노약자석의 끝자리에 맞춰 섰다.
“어……?”
―30, 29…….
초는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칸을 미친 속도로 먹던 거머리가 멈췄다. 어쩐지 불길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발을 끌며 뒷걸음질 쳤다.
―15……!
어쩐지 타이머 목소리가 평소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분 탓이겠지만, 정확한 예감이었다.
멈췄던 거머리가 미친 속도로 차량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채 갈리지 않은 것을 마구 삼키고 있었다. 어느덧 노약자석만 남아 있었다.
콰직―!
거머리는 미리 세워둔 진압봉을 씹었다. 그곳에는 전기가 흐르고 있다. 생명체라면 잠깐 경직될 줄 알았지만, 철로라면 말이 달라졌다. 철로는 절연체다. 애초에 이 차량은 전기로 움직인다.
철로로 만들어진 거머리의 구불거리던 몸이 뒤로 쭉 펴졌다. 감전당한 것처럼 쭉 펴지더니 멈췄다.
그 순간 이 도박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던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터지기 시작했다. 바이털 지수가 미친 듯이 높아졌고 나는 재빨리 시계를 벗어 멈춘 거머리의 아가리와 차량의 틈 사이로 던졌다. 제발 저 너머가 플랫폼이길 바라면서.
삐─ 삐이─ 삐─ 심장에 따로 부착해 둔 센서 때문에 시계는 떨어져 나가면서도 요란하게 울렸다. 게다가 마침 끝난 알람 소리까지. 귀청이 터질 것만 같았고 진압봉의 허리가 부러지며 거머리의 입이 다시 움직였다.
“엿이나 먹어.”
나는 떨리는 입술로 비웃으며 미리 열어뒀던 문 뒤로 넘어갔다. 다음 차량으로 넘어와 문을 닫기가 무섭게 바로 앞에서 거머리의 입이 닫혔다.
콱, 닫히고 그것이 뒤늦게 거대한 꿀꺽 소릴 냈다. 그러곤 부르르 떨더니 만들어지던 방식을 그대로 되감기하듯이 심연 속으로 돌아갔다.
“…….”
말 그대로 찰나였다. 찰나의 상황으로 죽을 뻔했다. 고개를 천천히 떨구니 사정없이 떨리는 손이 보였다. 목숨을 걸고 한 도박인데, 안 되면 어떡하지? 그냥 뻘짓한 꼴이 되면 어떡하지?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채원우는……?
발을 끌듯이 옆으로 갔다. 의자에 스르륵 주저앉고는 몸을 숙여 무릎을 감싸 안았다. 나는 지금 한없이 약자가 된 기분이니까 이번만 봐달라고 중얼거리며.
* * *
사람들이 모인 마지막 칸까지 이제 한 칸만 남았다. 저 너머에서 불안감에 가득 찬 시선들이 느껴졌다. 나는 문에 등을 대고 섰다. 다행히도 문을 열어 이쪽에 말을 걸 미친 짓을 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내가 틈으로 시계를 던진 것은 결국 헛짓을 한 거였나. 아깝게. 차라리 가지고 있었다면 마지막으로…… 뭐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지극히 전투용으로 만들어졌으니.
그 때, 이제는 이후의 일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의 미묘한 변화가 보였다. 저 멀리 건너편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어둠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미묘하지만 분명 보였다.
조금 굽히고 있던 무릎을 폈다. 이제 철로가 꿈틀거릴 거다. 일어나서 꽈배기처럼 꼬인 뒤에, 한 덩어리가 뒤이어서 커다란 거머리 모양이 될 거다.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일어서는 거머리가 보였다.
“강 책임 미친 새끼. 분명히 난이도 이렇게 높을 거 알고 있었을 거야.”
작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그래도 강 책임 귀에는 들리지도 않을 거다. 나는 그래도 마지막까지 버텨보겠다고, 혹은 영 안 되면 나 스스로를 쏘기라도 하겠다며 총을 들었다. 혹시라도 거머리 입속으로 들어갔을 때 한 번 더 살아나서 고통을 겪는 일 따위는 없게 목걸이는 손에 들었다.
콰득―! 콰직―!
커다란 소리가 나며 차량 입구 부분이 통째로 뜯겼다. 그것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30까지만 세기로 했다.
“21, 22…….”
목소리가 엄청나게 떨렸다.
“24, 25…….”
채원우 이 배신자 새끼. 기대했는데.
눈을 질끈 감고 총을 들었다. 나를 겨눌지 저 몬스터를 겨눌지 고민하는 찰나였다. 갑자기 꽈지직, 콰직, 하는 금속이 찢어지고 유리가 깨지는 들렸다.
“설마 그거로 형을 쏘려던 건 아니죠?”
내가 이미 죽은 게 아니라면, 이 목소리가 진짜라면……. 그러면 정말 오랜만에 감사 기도란 걸 해볼까 싶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조심스러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만약 그랬다면 형, 다시 살아나는 대로 내가 죽였을 거예요.”
저 담담하면서도 정신 나간 소리. 채원우가 맞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입술이라고 해야 할지 주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괴물의 입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처음으로 저 커다란 입 구멍을 닫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채원우가 그 몬스터의 위에 서 있었다. 커다란 창 같은 것을 손에 쥐고 있었고, 창끝은 몬스터의 정수리를 꿰뚫어 바닥까지 이어져 있었다. 턱 아래로 나온 부분은 아주 예리하게 벼린 물로 만든 칼이었다.
“어떻게……. 그거로…….”
채원우가 손잡이를 쥔 손목을 비틀었다. 아래로 창날처럼 내려와 있던 게 옆으로 퍼지며 몬스터를 아예 찢어버렸다. 다행히도 피는 나오지 않았다. 그랬다간 채원우의 몰골이 말도 못 했을 거다.
채원우가 차량 바닥으로 가볍게 내려왔다. 깜빡거리는 전구 아래에 선 채원우의 꼴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마가 찢어진 건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옷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손이 빨간 걸 보아하니 피로 젖은 것 같았다.
“다이아몬드 있잖아요.”
갑자기 다이아몬드? 나는 여전히 지금 상황이 꿈만 같아서, 바보같이 입만 벌리고 나에게 다가오는 채원우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걸 깎을 때 물을 써요. 살점과 뼈를 자르고 부수는 건 식은 죽 먹기죠.”
어느덧 채원우가 내 앞에 섰다. 물로 만든 날이 사라졌다. 손잡이 부분에 물을 담아 채원우가 필요할 때 무기로 구현할 수 있게 만든 모양이었다. 영리했다. 아마도…… 강 책임 작품이겠지.
돌연 턱이 잡혀서 고개가 돌려졌다. 채원우가 고갤 기울이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얘, 눈이 맛이 가 있다.
“죽으려고 했어요? 나 두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아픈 건 싫은데 아프기 전에 죽을까. 근데 또 자존심이 상하는데 저건 좀 쏴 맞추고 죽을까.”
“그러니까 나를 두고?”
“그 전에 네가 왔잖아.”
채원우가 진압봉처럼 생긴 무기를 접어서, 허벅지의 유틸리티 벨트에 착용했다. 그러곤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내 눈앞으로 내밀었다. 시계였다. 내가 던진. 채원우의 피로 엉망이 된 손에 반짝거리는 그것이 걸려 있었다. 한 점 상처조차 없었다.
“겨우 찾았어요.”
“다행이네요. 목숨 걸고 한 도박이었거든요.”
“초반엔 심장 박동이 치솟기도 했는데 내가 여기 오기 직전까진 미동이 없더라고요. 죽을까 하는 고민을 그만큼 이성적으로 했단 거죠. 형은.”
“그거 말고 다른 반응은 없었습니까? 채원우, 이 새끼 왜 안 와. 올 거라고 믿었는데, 하느라 열받아 죽는 줄 알았는데.”
“그거 흥분된다.”
채원우가 짓궂게 눈을 비비며 몸을 붙여 왔다. 이 반짝거리는 눈이 순수하게 장난기면 좋겠는데 아닌 것 같다. 채원우는 능력에 취해 있었다.
가이드와 약물 없이 능력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다가 고통을 느끼는 단계를 넘어 하이의 상태로 간 게 분명했다. 뒤에 사람들이 있는데 키스할 수도 없고. 중간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상황이 달라진 것 같으니 바로 뒷문에 붙어 이쪽을 살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뒤에 사람들 안 보이게 가릴 수 있습니까?”
“왜요? 예전엔 형 모습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달라졌어요. 보여주면 안 돼요? 형이 내 앞에서 얼마나 예쁜지 다 알았으면 좋겠는데.”
음. 완전히 맛이 갔군.
나는 채원우 맞춤형으로 설득하기로 했다.
“나는 상관없는데, 내가 채원우가 얼마나 예쁜지 보여주기 싫어서. 너 나랑 키스할 때 엄청 야한 표정 짓거든.”
채원우의 눈썹이 움찔했다. 넘어온 게 분명했다. 채원우가 손바닥을 내 옆으로 내려쳤다. 흘끗 보니 핏자국이 보였다. 피가 천천히 유리 위로 퍼졌다. 저 너머에서 민간인이 보기에는 꽤나 끔찍한 풍경일 거다. 역시 저 너머에서 작게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너는 좀…… 호러야.”
“그래요? 나한테 형은 판타지인데.”
“호러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보다는 낫네.”
그렇게 말하고는 채원우의 목에 팔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