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신발. 신발 좀 벗고.”
몸이 단, 동정을 탈피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풋내기가 다급하게 내 신발을 벗겨냈다. 손가락도 아니고 신발로 뒤축을 누르는 극악무도한 짓으로 말이다. 아킬레스건이 긁혀서 아! 하고 신음했지만 그건 바로 채원우의 목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젠장, 더럽게 좋았다.
“넘어지겠어.”
“안 다쳐요.”
채원우가 내 상의를 황급히 벗기며 중얼거렸다. 주절거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씻고, 아. 산통 깨려는 건, 아닌데, 먼지가…….”
먼지가 더럽게 자욱한 레드존에서 왔는데 바로 이러는 건 아무래도 찝찝했다. 너나 나나 이왕이면 먼지를 먹는 건 피하는 게 낫지 않겠냔 뜻이었다.
채원우는 내 말을 듣고 이 상황에서 무슨 소리냔 얼굴을 했다. 그 일그러진 예쁜 얼굴을 보다가 뒤로 손을 뻗었다. 닿는 곳에 딱 스위치가 있었다. 스위치를 눌러 욕실 불을 켜고 채원우의 멱살을 잡고 당겼다.
“싫으면 같이 씻고.”
“……다른 헌터들이랑도 그랬어요?”
“아니. 나 씻는 시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업무에 불과한 스킨십을 한 뒤에 씻는 건 특히 중요했다. 던전 공략 이후나 업무 잠자리 이후나 기분이 안 좋긴 매한가지였다. 그걸 그나마 씻겨주는 게 샤워 시간이었다. 온수를 하염없이 맞고 있으면 한결 나아졌으니까.
그런데 그 공간에, 그 시간에 파트너를 데리고 들어온다고? 아무리 사이가 좋다 해도 내가 절대로 하지 않을 짓, 열 손가락 안에 들 짓거리였다.
그러니까 채원우를 데리고 샤워실에 들어온 건 채원우가 그만큼 중요하기도 하고 채원우가 온수 샤워만큼이나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요, 채 헌터는.”
뭐 이런 말을 구구절절 하나. 흥분 때문에 미치겠는데. 대화는 나중에. 나는 채원우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 * *
옆집 아이의 일은 그저 계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계기가 어떻게 발화되는지가 중요했다. 내 옆구리에 매미처럼 달라붙어서 어린 애들이나 낼 것 같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채원우를 두고 나는 천장을 노려봤다.
강 책임에게 궁금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채원우의 사진을 가지고 나왔으니 오히려 한 방 먹였다고 여겼다. 나는 손해 보는 게 없고 강 책임에게 사진만 얻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강 책임에게 꼭 물어봐야 하는 일이 생겼다.
내가 찾아가면 얼마나 즐거워할지 눈앞에 훤히 보여서 배가 아플 지경이지만 이건 채원우가 매너 없게 나를 들쑤신 탓이라고 슬쩍 책임 전가를 했다.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뜻이다.
날이 밝는 대로 강 책임을 찾아가서 물어볼 거다. 대답 대신 미지수 던전을 공략하라고 하겠지만, 까짓것 해보지 뭐. 설마하니 채원우가 날 죽게 두겠냐. 심지어 저번에도 그렇게 심하게 다친 와중에도 살아남았는데. 여차하면 목걸이도 있고 말이다. 나는 여분의 목숨줄인 목걸이를 쥐고 시선을 내렸다.
부스스한 머리의 채원우는 미간에 힘을 준 채 잠들어 있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아까부터 창문에 이리저리 그림이 그려졌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욕설인가 헤비메탈인가를 들은 물 입자가 딱 저렇게 생겼던 것 같은데.
나는 몸을 돌려서 채원우를 마주 안았다. 채원우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조금 숨이 막혔다. 그 압박감에 안정감이 들었다. 적당히 무거운 이불을 선호하는 이유와 같겠지. 그래도 채원우가 이불보다 따뜻하고 좋았다.
채원우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채원우에겐 들리지 않을 말을 소곤거렸다.
“나는 우는 게 더럽게 싫습니다.”
“…….”
“그래서 채 헌터가 안전했으면 해요.”
고양이 걱정하는 쥐 꼴이라 하더라도 상관없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채원우의 생존률이 아니라 채원우가 언제까지 여기에 묶여 있어야 하는지였으니까. 채원우의 목줄 길이. 그게 궁금했다.
* * *
강 책임은 연구실을 비우고 어디로 사라져 있었다.
“오늘 안에는 오실 거예요.”
비서 겸 연구원 겸 심부름꾼 등등……. 온갖 역할을 수행하느라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은 분이 알려줬다.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보아, 제대로 말도 안 하고 나른 모양이다.
나는 무지성으로 여섯 번째 커피 캡슐을 내리고 있는 말단 연구원을 보며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사이코 밑에서 일하느라 얼마나 힘드시겠어.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싶어서 강 책임의 사무실 앞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간 못 읽은 책을 해치우겠단 생각으로 본격적으로 안경도 가져왔다. 시력이 나쁜 건 아닌데 가이드로 발현하며 한 번 변형을 거친 눈은 오래 쓰면 초점이 안 맞곤 했다.
오늘 채원우는 혼자 있으라고 했다. 어차피 건강 검진이니 뭐니 이것저것 바쁜 날이었다. 내가 옆에 있으면 얌전하게야 굴겠지만, 또 금세 어딘가로 나가자거나 뭐 먹으러 가자거나 하며 꾀를 부릴 것 같았다. 얌전히 각자 할 일 하고 다시 만나면 오늘도 같은 침대에서 자겠다는 약속을 하고 떼어냈다.
여전히 채원우는 하루에 40퍼센트 정도는 애새끼처럼 굴었고, 변한 건 오히려 나였다. 이젠 채원우에게 짜증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애새끼같이 구는 모습도 괜찮게 보여서 문제였다.
“객관성을 잃었지. 눈이 삔…… 건 아니고 팔자를 스스로 꼬는 거겠지.”
눈이 삐었다고 하기에는 채원우가 너무 예뻤다. 나의 심미안에는 여전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골치 아픈 일을 자처하고 있단 점이 평소의 나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고갤 저으며 책을 덮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있는데도 도통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아서 같은 페이지만 맴돌고 있었다. 괜히 피곤해지기만 한 눈 때문에 눈 사이의 콧대를 꼬집었다.
“양 가이드, 안경 썼었어?”
안경을 쥐고 있던 손이 움찔했다. 고갤 드니 그사이 피로도가 쌓인 눈이 초점을 쉽게 잡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안경을 쓰고 보니 오늘 안에 올지 안 올지 모른다던 강 책임이 서 있었다.
“안경 예쁜데? 어디서 샀어? 나도 따라 사도 돼?”
나는 허어, 하고 웃고는 대답했다.
“안 돼요. 강 책임님하고 같은 안경 쓰고 싶지 않거든요.”
내가 기분 나쁘기도 하고 행여나 같은 안경을 쓰기라도 하면 지나가는 헌터와 가이드마다 내 뒤에 대고 이럴 거다. ‘야, 저기 강 책임이랑 같은 안경 쓴 애 지나간다.’ 마치 ‘야. 저기 미래 네 남친 지나간다’ 하는 말처럼. 좋은 뜻은 아니다.
“에이. 아쉬운데.”
“늦게 오실 것 같다더니요.”
“양 가이드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데 어떻게 시간을 끌겠어. 냉큼 달려왔지.”
안경을 쓰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오늘 거래를 하러 온 걸 강 책임은 분명히 알고 있다.
강 책임이 평소처럼 속내 모를 또라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 연구실 문을 열었다. 뾰족하게 자란 수염과 퀭한 안경테 너머로 눈빛만 반들반들거렸다. 사우나에서 갓 씻고 땀까지 쫙 빼고 온 것처럼.
강 책임의 연구실에 들어가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라 고작 세 걸음인데도 발걸음이 무거웠다. 뒤로 닫히는 두꺼운 방화문 소리까지 듣고 나니 더욱 울적해졌다.
잘하는 짓일까? 그냥 모르는 척 지내다가 토낄까. 원래 그게 내 스타일이잖아.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양백겸.
“나다운 게 뭔데…….”
나는 거의 하와유, 아임파인땡큐 수준으로 나오는 고리타분한 대사를 중얼거리며 고갤 들었다. 여러 대의 컴퓨터 전원을 동시에 누르는 강 책임의 뒷모습은 콧노래가 들릴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나?”
“일한 지도 꽤 되었는데 보안 등급 좀 올려볼까 하고요. 적어도 채원우 헌터에 대해선 열람할 수 있을 정도로.”
울적함은 아주 잠시였다. 나는 생각보다 더 차분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 오고 나니 후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확신이 들었다. 이걸 물어야겠다는 생각.
“일단은 던전을 다녀와야 하는 거 알지?”
“압니다.”
“그렇게 좋아? 채원우가.”
비실비실 웃는 모습을 보고도 크게 화나지 않았다. 채원우에 대한 감정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호감 정도는 된다는 걸 인정한 참이었다. 연애한다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아직까지 확신이 서지 않는 구석이 많긴 해도, 채원우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직접 물어볼 수 없다. 자신의 사진을 보고 채원우가 보인 반응을 보고도 직접 물어볼 만큼 내가 사이코 패스는 아니었다. 나는 단지, 채원우에 대해 알아서 채원우가 무서워하고 아파하는 걸 잘 피해가고 싶었다. 0점을 맞기 위해선 우선 100점을 맞아야 하는 것처럼.
지금쯤 아주 차가운 랩실에서 건강검진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몰인격, 몰인정한 방법으로 온몸의 데이터가 뽑히고 있을 채원우는 폴라로이드 사진 속과 닮은 표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린애다운 모습이라곤 겉껍데기밖에 없었다. 눈빛도 죽어 있었고, 웃지 않는 얼굴은 삶을 세 번은 산 것처럼 지쳐 보였다. 내가 모르는 채원우의 얼굴.
이상한 일이다. 내 옆에서 채원우는 항상, 언제나 애 같았는데.
“그나저나 채원우 헌터는 계약 기간이 얼마입니까?”
“헌터청에서 소속 헌터의 계약 기간을 묻는 거야?”
강 책임이 되물었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냐는 의미였다. 나도 안다. 헌터는 국가 소속이다. 하지만 그게 사표를 낼 수 없다는 뜻은 아예 아니었다. 모든 등록 헌터에게는 갱신 기간이라는 게 있다.
헌터들이 헌터청에 등록하기 전에 사설 길드에 가입시킨 전황을 발견한 후에 만들어진 법안이있다. 헌터들의 계약에는 기본 기간과 갱신 기간이 명시되어야만 한다. 계약을 검토한 후 철회하거나 갱신할 수 있는 기간을 명시한 계약서. 사실상 거의 쓰이지 않아도 모두 가지고는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