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먼지가 자욱하게 쌓여서 이게 액자인지 냄비 받침인지도 모르겠다. 손등으로 좀 털어내다가 입김을 불었더니 뽀얗게 작은 구름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뒤에서 다른 짐을 뒤적이고 있던 채원우가 어깨 너머로 고갤 기울여 물었다.
“뭐예요?”
“뻔한 거요.”
“뻔한 거?”
“영화 보면 이런 장면에서 꼭 나오는 아이템이 있거든요. 아, 영화 안 봤다고 했죠.”
나는 손을 쭉 내밀어 액자를 보며 웃었다. 어이가 없었다. 깨진 모양도 어쩜 이렇게 뻔할까. 정말 내 삶이 하나의 진부한 영화처럼 느껴졌다.
“가족사진이요.”
영화도 드라마도 본 적이 없는 채원우는 이 상황이 전혀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은근슬쩍 허리를 감싸더니 손을 내 상의 안에 넣어 바지 허리 라인 위로 올라온 장골을 문질러댄다.
나는 부모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엄마, 아빠. 아들이 남자랑 붙어먹는 대한의 자원으로 성장했습니다.
“형이에요?”
채원우가 손을 뻗어 액자를 쿡 찔렀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갤 끄덕였다. 조곤조곤 말하느라 예쁜 얼굴과 달리 묵직하게 낮은 목소리가 한결 더 낮아졌다.
“왜 넥타이를 매고 있어요?”
“교복인데요.”
“아. 어쩐지 어려 보이더라.”
“진짜……? 왠지 변명하는 거 같은데요.”
“아뇨. 진짜요. 나보다 어렸을 때죠?”
“아무래도 그렇죠. 교복을 입었을 때니까.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찍었던 거예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고등학교 생활은 산산조각이 났다. 학교 자체도 부서졌고 내 일상도 부서졌고 우리 가족도 부서졌다. 남은 건 졸업장 없는 고등학교 교복과 가족사진뿐이다.
나는 액자에서 사진을 빼내고 수첩에 끼워 주머니에 넣었다. 솔직히 짐 중에서 가져가야 한다 싶은 건 이것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고물상에서 가져왔거나 중고마켓에서 받아온 것들이고.
“형, 이건 안 가져가요?”
“그건 옆집 꼬마 애 거예요.”
나는 채원우가 든 먼지투성이의 곰 인형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가 갑자기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물건의 산을 황급히 뛰어 내려와서 인부들에게 이리저리 손짓하는 건물주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우습게도 목소리가 떨렸다.
“으응.”
“제 옆집이요. 거기는 어떻게 됐어요?”
대답은 필요 없다. 말보다 더 많은 소통 도구들이 있으니까. 표정, 손짓, 발짓, 뭐 그런 거.
그러니까 나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옆집 아이는 이제 더는 없고 곰인형도 이젠 그저 버려진 쓰레기와 다름없다는 걸.
* * *
“우리요. 술 마실래요?”
우뚝 서서 뒤따라 걷던 채원우에게 물었다.
고작 백팩 하나를 채운 정도의 단출한 짐을 챙기고 이후로는 아무 말도 없이 하염없이 걸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거리와 도시가 익숙하면서도 새삼 씁쓸했다.
채원우에게는 여기도 다른 곳이랑 똑같다고 했지만 사실 아니었다. 건물이 무너져도, 갑자기 이웃 사람이 죽어도 놀라지 않는 게 일상인 곳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좋아요.”
채원우가 선선히 대꾸했다. 내 기분이 엉망인 걸 아는지 평소와 달리 옆에 있는 듯 없는 듯해 준 게 고마웠다.
“자주 가던 술집이 있는데 남아 있을지 모르겠네요. 거기도 작살나 있을 수도 있어요.”
나는 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 장난이고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날 물끄러미 보던 채원우가 뒷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더니 담배를 한 갑 꺼냈다. 비닐도 뜯지 않은 새것이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말이다.
“한 대 피울래요?”
그 순간 나는 채원우가 어린애로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지고 있는 석양 때문일지도 모른다. 석양은 사람들을 감성적으로 만들고 감성에 젖은 얼굴은 성숙하게 마련이니까.
나는 울적한 날이면 의자를 끌어 몇 번이고 석양을 보았다는 어린왕자의 작은 별을 떠올렸다. 오늘은 나도 석양을 백여든세 번은 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몸을 망치자.
비닐을 뜯고 담배를 하나 물었다. 라이터를 꺼내려는데 채원우가 먼저 꺼냈다. 내가 손으로 바람을 가리자 채원우가 내 손 위를 덮었다. 던전이 터지고 전기가 끊겼다가 아직 복구가 덜 되었는지 가로등은 켜지다가 곧 꺼지고 말았다. 어두운 와중에 라이터 불빛만 반짝였다.
채원우는 내 눈을 응시하며 자신도 하나를 물었다. 내가 나쁜 걸 가르쳤다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가르치지 않아도 채원우는 내가 하는 거라면 따라서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확신이라고 보아도 부족하지 않을 거다.
채원우는 오로지 나만 바라보고 있다. 내 등만 좇고 있었고.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면 등신이거나, 이미 던전에서 죽었을 거다.
“술집 가기 전에요.”
나는 충동적으로 말을 꺼내고 말았다.
“우리 사진 하나 찍을래요.”
“좋아요.”
채원우는 네, 아니요도 아니고 좋아요라고 답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이 순간 내가 우리 같이 죽을래요, 라고 물어도 좋아요, 하고 답했을 것 같았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 난 개똥밭에 구르더라도 살고 싶으니까.
나는 구질구질한 내 생각에 푸하 웃었다. 연기가 나오고 채원우가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냥요. 웃긴 생각이 나서요.”
사실 하나도 안 웃긴 생각인데. 괜히 채원우가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묻기 전에 입을 막아야겠다.
“채원우 씨, 능력 써봐요. 아무거나. 무해한 거로.”
한 번쯤은 왜 그러냐고 물을 만도 한데 채원우는 바로 실행했다. 옆에 있던, 앞으로 부러진 나무 이파리에서 물방울들이 톡톡 올라왔다. 이슬처럼 올라와서 비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무해하고 예쁜 기술이었다.
“능력을 썼으니까 내가 진정시켜 줘야겠네.”
나는 허공으로 담뱃재를 털고 채원우의 뒷머릴 잡아채 당겼다. 턱을 조금 들어야 채원우의 입술과 맞물렸다. 항상 졸린 것처럼 나른하게 뜨여 있는 채원우의 눈이 감겼다. 나는 채원우의 속눈썹에 속으로 감탄하며 눈을 감았다.
씁쓸한 두 사람의 혀가 뒤엉켰다. 아주 조용하게. 석양과 제법 잘 어울리는 짓이 아닐까 싶었다.
제대로 된 연애라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나에겐 이게 연애나 마찬가지였다. 계약서로 묶이고 필요에 의한 스킨십으로 아슬아슬하게 선 넘은 관계. 아무래도 달콤한 키스보다는 씁쓸한 혓바닥이 더 잘 어울리긴 하지.
나는 곧 담배를 떨어트리고 남은 손마저 채원우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나직이 신음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는 술집에 가지 못했다. 술집 역시 던전의 영역 내에 있었다고 한다. 끄트머리에 걸쳐져 있어서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지만 정말 신기할 정도로 딱 반이 무너져서 좌석이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맥주를 뽑던 곳은 남아 있어서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사장님이 커다란 종이컵에 맥주를 따라주셨다.
종이컵에 맥주라니. 정말 별로인데도 돌무더기 위에 앉아서 안주 없이 마시는 건 나쁘지 않았다. 마시다가 미지근해진 맛에 물릴 즘엔 키스했다.
채원우는 핑계랍시고 물로 온갖 것을 했다. 투박하고 거칠기만 했던 컨트롤은 죽은 나뭇잎에 물방울을 피우고 진흙에서 물로 된 풀을 피워내느라 점점 섬세해졌다. 타고난 재능이 있긴 있는 게 분명했다.
“차라리 미술에 재능이 있지.”
“이 시대에 미술? 아서라.”
뒤에서 맥주를 새로 따르던 사장님이 고갤 저었다. 하긴. 그런가? 나는 취하지도 않았는데 기분이 좋아서 자꾸 웃었고 채원우는 자꾸만 나를 돌아봤다. 볼 때마다 채원우의 눈 색이 변하는 것 같았다.
일단 손님이면 남자끼리 키스를 하든 뭘 하든 개의치 않는, 퉁명스러운데 또 친절한 사장님 앞에서 우린 손을 잡았다.
차마 소리 내어 말할 순 없었지만, 나는 손잡는 게 자는 것보다 더 좋았다. 그래서 오래도록 잡고 있었다.
기분이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니지만 혼자 있을 때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만약 오늘 옆집 아이 소식을 듣고 혼자 있었다면 나는 고주망태로 취해서 길거리에 늘어져 있다가 복귀 시간을 놓치고 영창에 들어가 있었을 거다. 영창까진 아니어도 어쨌든 경고 정돈 받았겠지.
옆집 아이는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간다고 했었고 딸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붙임성이 좋고 수다쟁이였다. 부모님은 자주 바빴고 벌써부터 혼자 전자레인지를 사용할 줄 안다고 했다.
내가 아는 건 고작 그 정도다. 고작 이 정도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울지 않고 버티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채원우를 돌아보며 미지근해진 맥주를 홀짝였다. 채원우에 관해서는 그보다 훨씬 많이 아는데. 나는 우는 건 질색이고.
그러니까 채원우는 건강하고 무사해야 한다. 얄미울 정도로. 내가 단순히 우는 것 그 이상을 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 * *
“잠깐만.”
“잠깐? 왜?”
채원우는 반말을 하며 헐떡였다. 우리는 아주 늦은 밤에 겨우 숙소로 돌아왔다. 콜택시가 레드존 안까지 들어올 일이야 당연히 없기 때문에 술집 사장님이 외곽까지 태워줬다. 차단기를 넘고서도 차로 5분 정도를 더 간 후에야 택시를 부를 수 있었다.
우리는 내내 잡고 있던 손을 택시에 타서도 놓지 않았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채원우의 손바닥을 가볍게 긁었다. 그러면 채원우는 깍지를 세게 쥐어 반응했다.
숙소까지 어떻게 참고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CCTV가 달린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입술을 맞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다만 우리의 인내심은 거기까지가 전부라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를 때부터는 이미 한 몸인 것처럼 붙어 휘청대고 있었다.
복도에 달린 CCTV로는 술에 취한 두 난봉꾼 정도로 보였을 거다. ……그랬으면 좋겠단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