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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우의 소감은 정확했다. 굳이 채원우를 처음 만났을 때로 가지 않아도 됐다. 나는 분명 채원우에게 호감이 있고 우리의 관계는 미묘하며 어쩌면 더 나아갈 수 있지만, 난 여전히 우리의 계약 이후를 생각하고 있으니까.
재계약은 헌터청이 먼저 제안할 때만 가능하다. 나에게는 거절권, 혹은 승낙권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 짐이 너무 무거운 게 싫다, 원우야.”
이 말을 하면 네가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알면서도 했다. 나는 껍데기만 그럴싸한 되다 만 어른이고, 그건 레드존에 올 때면 더욱 명확해졌다. 나는 모나고 못난 인간이니, 우리 그냥 이렇게 미묘한 관계로 지내다가 서로를 가볍게 떠나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나는 채원우가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손목을 돌려서 손을 마주 잡았다. 내친 김에 깍지도 꼈다.
채원우는 말이 없었지만 화가 나거나 섭섭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그 반응에 내가 당황하며 섭섭함을 느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내가 정말로 쓰레기니까.
“형.”
“네.”
오래 관리를 하지 않아서 아래로 무겁게 우거진 나뭇가지를 위로 들고 부서진 도보를 겅중 건너며 대답했다.
“실망시킬 거 같아서 미리 말할게요. 나는 사진 속의 그 어린애도 아니고 무너진 건물 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생명 없는 짐덩이도 아니에요.”
“나도 채원우가 짐덩이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내가 지금 애착을 가진 것 중에선 유일하게 살아 있는데다가 먼지가 되지 않을 텐데, 어떡하나 고민하곤 있지만요.”
내 대답에 채원우가 성큼 다가왔다.
“형, 저 좋아해요?”
“뭐.”
얼버무리는 나를 대신해 채원우가 냉큼 대답했다.
“난 형 좋아해요.”
“…….”
“아니. 좋아하는 거 이상인 것 같아요. 전 형의 파트너가 저 하나였으면 좋겠어요. 영원토록. 이걸 뭐라고 해야 해요? 좋아하는 거랑 다른 것 같아요.”
“아마도…… 독점욕?”
“잘못된 거면 고치려고 해볼게요. 안 좋은 거예요?”
“상황에 따라 다르겠죠. 그런데 나도 느끼거든요. 그거. 채원우에게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경험의 대부분을 내가 차지했다는 걸 알고 나니 다른 것도 욕심나고. 그 정도 독점욕은 나도 있거든요.”
나는 픽 웃었다. 말하고 나니 그래, 내가 채원우에게 느끼던 게 욕심이고 애착이란 게 선명하게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채원우가 혀로 입술을 달싹였다. 빨간색이 잘 어울리는 채원우의 입술이 이 회색빛 도시 속에서 유독 고채도로 보였다.
“나는 형이 전 파트너들의 기억을 모두 잃었으면 좋겠어요.”
“음.”
“때론 그냥 헌터청 사람들도 그렇고, 아무도 형을 몰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계약이 끝나도 나한테서 형을 빼앗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건 좀 위험하게 들리는데.”
“그럼 여기까지만 말할게요.”
더 있다고? 나는 괜히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만 알고 싶은 게 아니라, 더 들은 다음에도 ‘그 정도면 감당할 만한데’라고 생각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양백겸 씨는 회복 탄력성이 좋네요. 정신력도 몸도. 그런데 때론 궁금해요. 이게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아서 피해가 크지 않은 건 아닐까 하구요.’
처음으로 파트너를 잃은 뒤로 다시는 그런 대미지를 입는 일이 없자 헌터청에서 강제로 시켰던 심리 검사에서 들었던 말이었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왜 웃어요?”
“예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라서요.”
“전 파트너 생각이에요? 아니면 전 애인?”
“저도 대다수의 제 또래 가이드나 헌터처럼 평범한 관계는 맺지 못한 채로 자랐습니다. 전 애인 같은 건 없고요. 전 파트너도 아니네요, 일단은. 근데 과거 좀 묻지 말라니까.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묻는 거예요? 애초에 검색하면 볼 수 있잖아요. 나보다 보안 등급 높지 않아요?”
“제가 캐고 싶은 게 아니라 듣고 싶은 거예요.”
불퉁해진 채원우가 대꾸했다. 그래서 장난 좀 쳐볼까 하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채원우가 손바닥으로 내 입을 텁 덮었다.
“사실 듣고 싶지도 않아요. 나보고 키스 못한다고 한 걸 보면 전엔 잘한 사람도 있었을 거 아니에요.”
대답 대신 고갤 끄덕이지도 않고. 뭐, 그냥 시선 좀 피했다. 채원우는 모른다. 테크닉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걸.
나는 그 키스 좀 한다는 놈과 파트너를 할 때 일과에 불과한 스킨십을 하며 다음 끼니 메뉴나 고민했다. 근데 풋내기 채원우와는 음식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비슷한 충동은 들긴 하지. 식욕과 비슷한데 조금 더 노골적이고 원초적인 거 있잖아. 직장 동료에게 느끼는 거면 여간한 마음이거나 여간 미친 게 아닐 텐데 나는 둘 다일지도 모른다.
살면서 만나본 적 없는 캐릭터라 그런지, 채원우와 있는 나도 태어나서 살아온 것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그게 기분 나쁘기보단 유쾌했다.
“그럼 좀 가죠. 이러다가 외박하게 생겼는데. 내가 집도 없어서 노숙하는 꼴이 될 텐데 그건 싫거든요.”
마침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전단지가 날아와서 우리 쪽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허공으로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노리던 종이를 잡아챘다. 구겨진 걸 펴니 ‘단돈 1,000만 원으로 누릴 수 있는 그린존의 편안한 노후 생활!’이라고 적힌 부동산 전단지가 보였다.
“진짜예요?”
나와 머릴 맞댄 채원우가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난 대번에 구기고 옆으로 던져 버렸다.
“당연히 사기죠.”
공포는 가장 좋은 장사 수단이고 요즘은 특히 더 쏠쏠한 흥행 수단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레드존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 * *
집보다는 창고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내가 발품 팔아서 구한 곳이었다. 계약이 한도 끝도 없이 미뤄져서 숙소에도 들어갈 수 없을 경우엔 유일한 믿을 곳이었고.
그래서 나는 말 그대로 반이 폭삭 무너진 빌라의 흔적을 보고 잠시 충격에 빠져 머리가 하얗게 비고 말았다.
“D급 던전이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채원우가 목소릴 낮게 깔아 물었다. 분명 내가 듣기에도 D급이라고 했는데, 파괴력이 C에서 준B-급은 되어 보였다. 성장형 던전. 그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본격적인 지진이 오기 전에 자잘자잘한 지진이 먼저 온다던 말도 떠올랐다. 애써 불길함을 지워내고 돌을 밟으며 올라갔다.
“아이고, 양백겸 씨!”
나를 기다리고 있던 집주인 아저씨가 보였다. 손뼉을 치며 헐레벌떡 달려오시기에 조심하시라 하려는 차였는데, 놀라울 만큼 요리조리 잘 다니셨다. 왕년에 산 좀 타셨던 모양이다.
“이 꼴이 뭐예요? 진압팀은 안 왔어요?”
“무슨 진압팀 같은 배부른 소릴 하고 있어. 후처리팀은 왔어.”
익숙해지면 안 되는 일상도 일상이라고 익숙해진 모양이다. 나는 씁쓸함을 참고 고갤 끄덕였다. 집주인 아저씨는 나를 보더니 내 뒤의 채원우에게 흘끗 시선을 던졌다.
“하이고오, 잘생겼네. 새 파트너야? 지금까지 본 애들 중 최고인데? 이거야, 이거.”
넉살 좋게 웃으시며 엄지를 치켜드시는데 등골이 오싹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이전 파트너 어쩌구 하는 대화를 했는데. 보지 않아도 채원우의 눈빛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으하하, 웃으며 아저씨의 어깰 두드렸다.
“제가 무슨 파트너를 많이 데려온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한 번이었어요, 한 번.”
게다가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고 서로 이 새끼 저 새끼 하던 놈이었다. 혼자 나오려고 했는데 하필 그놈도 레드존에 친구가 있어서 같은 날 나왔다가 마주친 것뿐이었다. 그날 돌아가는 길에도 니가 날 쫓아왔네, 니가 날 스토킹했네 하며 뒤지게 싸웠었다. 사건의 전말을 안 뒤에도 화해는 당연히 안 했다.
“그으랬던가? 아무튼 아주 예쁘장한 총각이야. 근데 백겸 씨, 헌터청에서 근무하는데 무슨 특혜 같은 거 없어? 거주지 특혜 같은 거.”
“저 정규 계약이 아니라서 그런 거 없어요.”
“아니, 너 거기서 몇 년째 일하고 있지? 아직 젖살도 덜 빠졌을 때부터 일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계약직이라고?!”
그때 젖살이 있진 않았는데……. 내가 원해서 이 상태로 있다는 말을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아서 그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이런저런 대우가 달라지는 건 맞긴 하지만, 나는 원할 때 그만두기도 힘든 직장에 평생 얽매여 있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헌터청은 그럴싸한 외양과 다정한 목소리로 만들어진 감옥처럼 느껴졌다.
“전 프리가 좋아요. 아무튼 제 짐은 좀 나왔습니까?”
“저 뒤에 가면 꺼낸 거 널어놨어. 대충 분류는 해봤지만 말 그대로 대충이야. 직접 다 보고 양백겸 씨 물건 같으면 챙겨 가.”
“감사합니다. 저, 아저씨. 보상 신청하실 때, 던전 규모를 D 말고 미분류로 적어서 내세요.”
“으응? 왜? 분명 D라고 했는데.”
“그냥요. 그러면 조사 나올 거고, 나와서 C나 B로 책정되면 보상 더 나올 거예요.”
그리고 강 책임이 신나서 조사해 보자고 하겠지. 나 역시 현장에서 뛰는 입장에선 강 책임에 대한 감정과 별개로 던전의 데이터가 많을수록 좋고, 그러길 바라니 조언을 하고 넘겼다.
“가요. 뒤에 있다고 하네요.”
돌아보니 채원우가 허릴 숙였다가 일어서고 있었다. 무엇을 챙긴 건지, 아니면 그냥 제스처인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나는 무표정일 때 부쩍 서늘해 보이고 성숙해 보이는 낯선 채원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채원우가 보다 높은 곳에 서 있는 내 손을 맞잡았다. 뜨거웠다.
“능력 썼어요?”
“네. 먼지가 너무 많아서 흙을 조금 적셔놨어요. 먼지에 던전 유해물이 섞여 있어서.”
“그런 것도 알아요? 대단하네.”
그리고 나는 채원우의 손을 꽉 잡고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뭘요.”
어쨌든 나 역시 이곳의 주민이었다. 채원우의 별거 아니라면 아닐 수 있는 작은 친절이 고마웠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