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채 헌터. 쟤가 들고 온 거 꼭 받아와요!”
“넹.”
말 잘 듣는 채원우는 형민의 품에서 종이봉투를 빼앗아 내게 왔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솔솔 났다.
“빵인가 봐요. 그거요. 와플 기계에 달팽이처럼 생긴 빵 누른 거요.”
제대로 기억하는 이름이 별로 없다. 나는 그래도 이제 채원우를 이해했다. 대충 봉투 안을 들여다보고 ‘걔 취향이네요’ 하고 말았다.
내상은 모두 나았는데 강 책임과의 면담 날에 좀…… 난리를 피운 바람에 겉에 멍이 들었다. 피멍인지라 보기에 살벌했다. 채원우에게 보이기는 민망했다.
“옷 좀 갈아입게 나가죠?”
“뒤돌아보고 있을 게요.”
“그럼 그래요. 돌아보지 말고. 벽 보고 그 빵이나 드세요.”
채원우가 순순히 몸을 돌렸다. 나는 피멍 때문에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고 거의 분신 같은 후드티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짐을 차곡차곡 챙겼다. 사실, 짐이랄 게 없었다. 여분으로 챙겨 왔던 수건 따위가 전부였다. 그 사이에 폴라로이드 사진을 넣기로 했다.
“돌아봐도 돼요?”
“잠깐만요.”
나는 쭈그려 앉은 채 폴라로이드 사진과 채원우를 번갈아 보았다. 이목구비는 그대로였고, 볼살 자체가 통통한 어린애는 아니었던 터라 골격만 자랐다고 할 수 있었다. 진짜 잘 자랐다. 나는 픽 웃고 사진을 수건 안에 넣었다.
“이제 됐습니다.”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키니 채원우가 성큼 다가왔다. 빵이나 먹으며 기다리랬더니 그냥 기다리기만 한 모양이었다. 다가와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런다.
“나 심장이 빨리 뛰어요.”
완전 거짓말은 아닌지 손목에서 ‘심호흡하세요’ 하는 소리가 나왔다. 왜 외출할 때 찼던 시계를 하고 왔는지 모르겠다.
“외출했었어요?”
그러려던 건 아닌데 말을 돌린 꼴이 되었다. 어쨌든 손목을 걷어 확인하니 시계를 두 개 차고 있다. 하나는 외출 및 휴가 때 쓰는 사제용, 하나는 헌터청에서 지급한 거.
“무슨 시계를 두 개나.”
픽 웃자 채원우가 숙인 내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대며 웃었다.
“그냥 이거 끼고 있으면 그때 생각나서요. 형이랑 영화 보던 날.”
“아.”
“그때, 영화 보는 중간중간 심호흡하란 말 안 나와서 다행이었어요. 제가 담이 커서 다행이라니까요.”
“채 헌터가 담이 크긴 하죠.”
나는 채원우가 손에 세 개짜리 폐를 들고 오던 때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채원우가 은근하게 몸을 더 붙여 왔다.
“혀엉.”
“이 헌터가 왜 이래.”
나는 시장에서 종종 보던 새침데기 말투를 흉내 내며 채원우를 밀어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에 벌크업만 했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가슴도 더 커진 것 같았다.
“채 헌터 성장기 맞나 보네요…….”
5년간 조금의 변함이 없는 내 키와 몸무게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채원우는 내 뺨에 제 뺨을 비비며 칭얼거렸다.
“형이 없는 동안 집이 너무 컸어요. 이렇게 크다고 느껴진 건 처음이에요.”
“……그게 무슨 집입니까.”
“그럼 집이 뭔데요.”
“그냥 뭐……. 항상 돌아가고 싶은 곳. 떠올리면 그리운 곳, 있으면 편한 곳 아니겠어요.”
정작 나도 그런 장소가 없는 주제에 나는 그저 이론에 불과한 소리를 떠들었다. 그래도 채원우가 이곳에서 준 공간을, 이곳에 속하는 공간을 집이라고 부르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밀어내려던 손은 채원우의 머리에 안착했다.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채원우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느라 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형이 제 집이에요.”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우리가 뭐 얼마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채원우가 이렇게 나올까.
나는 채원우의 집이니 뭐니, 하여튼 그 어느 고유명사도 될 자격이 없었다. 그럴 만한 위인도 아니었다. 나는 겁이 많고 죽는 게 무섭고 후회할 일만 한 바가지라 뒤를 돌아보지 않는 고집쟁이에 불과했다.
“채원우 씨……. 부동산 투자 실패했네요.”
흰 소리나 뱉는 내가 네 집 같은 게 되어줄 수 있을 리 없다.
* * *
방으로 돌아오니 훈훈한 온기가 돌았다. 바깥이라고 해봐야 채원우와 다녀온 외출과 혼자 나갔다 온 외출 몇 번, 던전 출동밖에 없던 터라 계절이 겨울로 넘어간 걸 몰랐던 거다.
창밖으로 즐기지도 못했던 낙엽이 모조리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가 보였다. 살풍경한 회색 풍경이 지극히 이곳다웠다.
안 그래도 있다고 하기 어렵던 정이 똑 떨어진 나는 창문을 두드리다 몸을 돌렸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수건과 옷가지를 빨고 병실에 있는 동안 한 방울도 못 마신 카페인이 필요했다. 카페인 중독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멍한 정신에 슬리퍼를 직직 끌며 걸으니 채원우가 물었다.
“형. 저 빨래 돌릴 건데 형 것도 돌릴까요?”
“색 있는 건데 괜찮아요?”
채원우가 고갤 끄덕였다. 어디서 난 건지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었다. 나무 막대만 입술 사이로 쏙 나온 모습이 좀 귀엽기도 하고.
“같이 돌려주면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이스크림은 왜 혼자 먹어요?”
“형두 드실래요?”
헤헤 웃은 채원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냉동고를 열었다. 냉동고에는 아이스크림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퍼 먹는 거, 짜 먹는 거, 빨아 먹는 거.
“춥지도 않습니까?”
“전 몸에 열이 많아요.”
“음. 알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소리 없이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 깠다. 채원우와 똑같은 바닐라맛이었다. 채원우가 내 허리에 손을 얹었다. 슬슬 스킨십이 거침없어진다. 선을 넘은 순간 예상한 일이긴 했지만, 바로 전 파트너와 보기만 해도 으르렁거리던 사이라 그런지 약간 적응은 안 되는군.
“어떻게 알아요?”
“혀가 뜨겁잖아요. 키스할 때 뜨겁던데.”
채원우가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얘는 어쩜 홍조도 이렇게 생기냐. 이마나 목덜미가 아니라 정말로 볼이 분홍색으로 달아오른다. 나는 감탄했고 채원우는 새로 아이스크림을 까 물었다. 그러더니 쪽 빤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옮기곤 나를 싱크대로 밀었다.
양팔로 나를 가둔 채원우는 그사이에 어느새 성숙해져 보였다. 믿기지 않게도. 처음 만났을 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티가 마구 났는데, 왜 이렇게 지금은…….
“그럼 저 세탁기 돌리고 오면 실험 하나 해볼래요?”
“나 그 실험이라는 말 안 좋아하는데.”
“나랑 하는 건 좋아할걸요.”
채원우가 아이스크림을 한 번 쪽 빨았다. 이번엔 딸기샤베트맛이라 싸구려 색소가 채원우의 입술을 물들였다. 내 시선이 자연히 그곳으로 향했다. 채원우가 슬쩍 내 다리 사이로 자신의 하체를 붙여 왔다. 건방 떠네. 나는 채원우의 성장이 같잖고도 기대되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 아이스크림 다 먹고도 제 혓바닥이 여전히 뜨거운지, 말이에요.”
“나도 하날 먹어서 소용없을 것 같은데.”
“또 모르죠. 전 두 개 먹었으니까.”
“아하. 그리고 나는 아직 하나도 다 안 먹었구요.”
나는 아이스크림을 쥔 손을 들었다. 채원우에게 잘 보이게 든 뒤, 어느덧 흘러서 나무막대로 구물구물 내려오다 못해 내 손등으로 흐른 것을 혀로 길게 핥아 먹었다.
“얼른 먹어야겠다.”
채원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기만 굳었겠냐. 채원우의 몸도 경직되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서둘러 베어 먹었다. 입안이 얼얼하게 시렸다. 다 먹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남은 걸 망설임 없이 옆 싱크볼 안으로 던졌다.
“0.5 아이스크림 대 1.5 아이스크림은 어때요.”
손으로 채원우의 검은색 티셔츠 아랫자락을 끌어 올렸다. 내가 말했냐. 너 검은색 잘 어울린다고.
채원우는 아이스크림을 크게 베어 물었다. 채원우의 아이스크림도 싱크볼 속으로 들어가며 내 것과 뒤엉켰다. 차가운 입술이 곧 내 목덜미로 들러붙었다. 물기 좋게 고갤 옆으로 돌리자 싱크대 안에 묘하게 겹친 아이스크림 두 개가 보였다.
‘염병하는 소리지만 하트 같네.’
하지만 진짜 염병하는 건 나였다. 안정화의 필요성이 없이도 채원우와 선을 넘으려고 한다. 그러다가 내 티셔츠 안으로 들어오는 채원우의 머리를 감싸며 깨달았다. 이번에 안정이 필요한 건 사실 나였다고.
강 책임의 목소리가 악몽처럼 들러붙으니 채원우가 날 깨워줄 차례였다.
* * *
부엌에서 시작했는데 거실 소파에서 끝났다. 채원우는 막 퇴원한 나를 배려한답시고 굴었지만 내가 더 재촉했다. 채원우를 바짝 끌어안고 떨어지려 하면 으르렁거렸다.
조깅을 한바탕 한 뒤처럼 몸이 시원했다. 노곤함과 약간의 피로감이, 지금 낮잠을 자면 정말 다디달게 잠들 수 있을 거란 확신을 줬다.
“세탁기 돌리고 올게요.”
좁다란 소파에서 붙어 있는 게 용하긴 했다. 채원우가 내 등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굴러다니던 담요를 주워 덮어줬다. 나는 쌀쌀함에 담요를 끌어당겼다. 그러다가 담요에서 익숙한 체향이 나서 코를 박고 킁킁댔다.
채원우 냄새였다.
“여기서 잤나…….”
저 커다란 애가 이 소파에 몸을 구기고 자는 모습이 어쩐지 본 것처럼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속이 선득선득해졌다.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채원우의 과거가 녹록치 않을 것 같다는 건 이미 분명하다. 강 책임이 가르쳐 준단 순간에 거절한 건, 그저 본인에게 듣겠다는 예의 때문이 아니라…… 내가 두려워서였을지도 모른단 부끄러움이 엄습했다.
그걸 알면 채원우를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어서. 채원우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어서.
“난 영웅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다고.”
혼자 중얼거려 봐야 궁색하기만 하고 소용없는 소리였다.
그 때 채원우가 세탁실 밖으로 나왔다. 그사이 바지만 챙겨 입은 채원우의 상체에는 내가 남긴 손자국 조금과 흉터들이 보였다. 그걸 훑느라 나는 뒤늦게 채원우 손에 들린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왜 형한테 있어요?”
이런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