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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말고, 계약직 하고 싶습니다-39화 (4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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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둥이로 지껄인 용기란 말이 웃겨서 웃음이 터졌다. 용기는 개뿔. 나한테 어울리는 용기는 락앤락 용기가 다일 텐데. 내가 뭐라고 감히 용기를 운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을 꺼낸 김에, 약간 양심이 찔리고 하니 정말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이건 지금까지 내가 부려온 깡다구와는 결이 달랐다. 깡다구를 부릴 때는 정말로 ‘죽여보시든가’의 마음가짐이라면, 지금은 떨리고 긴장되는 속내를 숨기고 진정시키며 목소리를 떨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나는 침대 등받이에 지그시 몸을 기댔다. 채원우가 의자를 당겨 조금 붙어 앉았다. 내 한마디 한마디로도 부족해서 호흡에까지 집중하는 것 같았다. 꼴이 조금 웃겼다. 내가 유언이라도 하려는 상황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나도 모르게 유언처럼 묻고 말았다.

“채 헌터. 물어볼 게 있는데…….”

그러나 그 순간 채원우가 아래로 깔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누가 보아도 예쁘게 생긴 채원우의 눈빛만은 항시 형형했다. 나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종종 이게 바로 안광이라고 하는 거구나 싶었다. 심지어 똑바로 주시하는 눈빛에는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사냥감이 눈치도 못 채고 꿈지럭대는 걸 보며 킬각을 재는 눈빛이었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질문의 노선을 바꾸고 말았다.

“……채원우. 운명을 믿어요?”

헌터라는 호칭도 잊고 물어버린 것은 유치한 데다 한물 간 작업 멘트와 다를 게 없었다. 차라리 작업 멘트로 들리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이 말이 이제는 작업 멘트보다 길거리에서 아무 사람이나 잡고 맛 간 눈빛으로 말을 거는 사이비들의 멘트로 더 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채원우는, 직시하는 그 눈빛을 내게 고정하고 끄덕였다.

“네. 믿어요. 운명을 믿어요.”

‘그런데 믿는 사람 하나는 알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예상한 대로만 흘러가서 곤란할 지경이었다. 강 책임이 말한 운명을 믿는다는 하나, 그리고 내가 가장 망가진 순간 내 옆에서 나를 관찰했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참관인 1.

이후로도 내 삶이 지금까지와 달리, 또다시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간다면 이 둘은 같은 사람일 것이며, 그리고 그 한 사람은…….

“형은요? 아니. 대답하지 마세요. 형도 믿었으면 좋겠어요. 지금껏 안 그랬다면, 이제부턴 믿어요. 날 만났잖아요.”

채원우일 것이다.

채원우는 이후로 매일 나를 찾아왔다. 오지 않았던 게 언제였냐는 식이었다. 이렇게 문턱이 닳도록 뻔질나게 오가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이랬다.

“형은 제 거잖아요. 법이 그렇다면서요. 제가 제 거 확인하는 건데요?”

말문이 막혔다. 그런 느끼한 로맨스 대사를 느끼하지도 않게 지껄이는 건 헌터 채원우가 아니라 사람 채원우가 타고난 재능이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내가 마시고 있던 알로에주스를 공중에 띄워 통통한 화살표를 만들더니 문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문턱 없어요.”

웃기지도 않아서 정말 짜증 났다. 채원우 역시 그 던전에서 대미지와 피로가 꽤 많이 쌓인 상태였다. 안 그래도 제대로 풀리지 않는 능력의 불안정 때문에 골치 아픈데 이런 뻘짓이나 하다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수입니다.”

내가 이를 박박 갈며 말했더니 채원우는 눈을 사르르 접어 웃었다. 그리고 그 화살표를 이상한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건 뭡니까?”

“이모티콘이요. 그거, 미안하다고 손바닥 붙이고 있는 거요.”

어떤 건지 알겠다. 나는 비웃으며 말했다.

“그거 합장 아니고 하이파이브입니다.”

“진짜로?”

“네. 진짜로.”

채원우는 충격에 빠짐과 동시에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엽긴 했다. 나는 허공에서 컵을 그물처럼 휘둘러 알로에주스를 담았다. 시무룩한 채원우를 따라서 주스가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채원우가 불안정하다는 증명이었다.

“랩실에서 상태는 어떻대요?”

“그렇게 나쁘진 않대요.”

“아. 죽을 정도는 아니란 뜻이구나.”

“죽어도 그쪽에게 나쁜 일은 아닐 텐데요.”

“왜요? 채 헌터는 탱커에 전방위 딜러에 비록 전략은 무모하고 골 때려도 효과는 확실한 전투원인데.”

“탱커가 뭐예요? 탱크는 아는데.”

게임을 안 하는 사람도 대충은 아는 용어에 대해 채원우는 무지했다. 표정마저도 순진무구했다. 나는 설명해 주기 귀찮아서 말을 돌렸다.

“하여튼 우리 채 헌터가 죽어도 괜찮다는 게 어디 있습니까?”

이때 나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누가 보아도 과몰입 중이었다. 장난스러운 말투 뒤로는 헌터청 이 새끼들, 하는 배신감이 있던 거다. 이걸 깨달은 건 아주 나중이긴 했지만.

“저 죽으면 조사할 수 있어서 좋아할 거예요.”

“시신은 유족에게 넘겨집니다.”

“전 유족이 없잖아요.”

“…….”

“헌터청이 제 집이에요.”

“……마이 스윗, 스윗 홈.”

혹은 비터스윗 홈.

나는 중얼거렸다. 승규는 할머니가 살아남으셨다. 할머니만, 살아남으셨다. 새벽에 은행을 줍기 위해 나가셨던 덕이다. 형민이와는 무슨 사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 애 부모님이 모두 살아 있다는 건 안다. 나는 이제 동생도 없고 부모님도 없었다. 채원우와 마찬가지로 내 시신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거다.

그러나 궁상맞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자기 연민에 빠지기에는 애도의 시간이 지나치게 짧았다. 나는 무엇이든 깨닫기 전에 달려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닥친 문제를 그때그때 해결하는 게 나한테는 훨씬 더 잘 맞았다. 그리고 자신할 수 있었다. 채원우도 그런 과라는 걸.

나는 컵에 담은 주스를 채원우에게 내밀었다. 채원우는 내 타액이 조금 섞였을 음료수를 기껍게 받아 마셨다. 우리는 자주 접촉해야 했고 자주 섞여야 했다. 나는 채원우의 손등을 내 손으로 덮었다.

“우리 둘 다 고아네요.”

“네.”

“그러니까 되도록 죽지 맙시다. 헌터청 좋을 일 하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잖아요?”

“전 뭐.”

“아, 그냥 대답이나 해요. 나 환자잖아요.”

“전 뭐 형만 좋으면 다 괜찮다고요.”

“나하고 얼마나 만났다고 그런 유대관계를…….”

머쓱해서 머릴 긁적였다. 사실 이건 약간의 낚시질이었다. 하지만 이 말에 채원우가 깜빡 넘어가 술술 불 놈이었으면 진작에 나는 이 녀석과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리고 내 착각일지도 모르는 어떤 연결 고리를 발견하고도 남았을 거다.

“형. 그거 알아요? 형은 확실히, 반쯤 졸릴 때도 아니고 지금처럼 정신이 또렷할 때 눈이 제일 예뻐요.”

“알아요. 제 눈동자 색이 좀 예쁩니까. 아주 보석 같죠? 채원우 씨가 준 목걸이하고 가치는 달라도, 적어도 껍데기는 내 거가 더 예쁠 겁니다.”

“네. 너무 예뻐요. 한 번 핥아봐도 돼요?”

“그래요. 뭐……가 아니라 뭐요? 아, 갑자기 또 헛소리하고 나자빠졌네.”

나는 왈칵 짜증을 내며 채원우를 발로 밀어냈다. 어깨를 팍팍 밀쳐 내는 내 발목을 잡은 채원우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강 책임과 달리 채원우의 목젖을 미트 삼아 두들겨 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채원우는 항상 싱글싱글 웃고 있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웃을 때는 손에 꼽았다. 이럴 때 채원우의 눈은 완전히 접혀 말 그대로 이모티콘처럼 변하고 입꼬리는 예쁘게 올라가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흰 얼굴에 빨간 입술과 까만 눈썹과 머리카락. 나는 하마터면 채원우처럼 헛소리를 하고 나자빠질 뻔했다. 세상이 무너지기 전과 후를 합쳐도 내가 본 사람 중 네가 제일 예쁜 것 같단 말을.

* * *

‘헌터들은 다들 미쳐 있어. 조금 미쳤냐, 많이 미쳤냐, 아니면 아예 맛이 갔냐 셋 중 하나일 뿐이야.’

처음으로 가이드가 되었을 때 교육 시간에서 들은 말이었다. 강 책임의 동기라는 김 박사는 강 책임보다 조금 덜 맛이 갔고 강 책임보다 아주 많이 사회화가 되어 있었다. 그가 가이드로 발현되었다는 건 그 교육으로부터 반년 후, 그의 장례식장에서 알게 되었다. 헌터가 그를 죽이고 자살했다고 했다.

이 일은 쉬쉬하자는 아주 묵직하고 소리 없는 강요 아닌 강요에 짓눌려 이후 후배들에겐 알려지지 않았다. 안개처럼 새어 나간 소문은 아마 도시 괴담이나 선배들이 겁을 주려고 만든 헛소문으로 치부되는 모양이었다.

“미쳤다고 생각하면 무섭지 않지. 헛소문이라고 생각하면 겁나지도 않는다고.”

나는 강 책임의 개인 연구실을 앞에 두고 중얼거렸다.

물론 좋아서, 원해서 이곳에 온 건 아니다. 강 책임이 나를 불렀다. 아프다는 핑계로 오지 않기에는 강 책임이 내 상태를 지나치게 잘 알았다. 진통제를 끊어버리겠다는 협박에 결국 직접 나서게 됐다.

“접니다. 양백겸.”

안쪽에서는 답이 없었다.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당연히 열려 있지 않겠거니 생각하고 문을 살짝 열었다.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문은 쉽게 열렸다. 내 보안 등급이 그만큼 올랐다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단 거다.

“노트도 줄줄 흘리고 다니시더니. 감사과에 찌를까 보다.”

감사과는 횡령보다도 보안에 더 예민하다. 이곳이 그랬다. 나는 투덜거리면서 다시 문을 닫으려고 했다. 괜히 찔러봤다가 덤터기 쓰는 일은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가까이는 채원우와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걔가 옷을 받으러 갈 때의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더 멀리는……. 나는 이 목소리를 더 전에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러면 저랑 있으면 안 돼요? 저는 안 죽을 자신 있어요…….’

전에 들었던 목소리와 비교하면 더 얇고 더 허스키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안으로 옮겨졌다. 어디서 나는 소린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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